베아트리스 아스크 법무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Jonas Hassen Khemiri
2009년, 스웨덴 정부는 치안 당국과 스웨덴 이민국의 협조 하에 비합법적인 입국∙체류자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일명 프로젝트 REVA의 시행에 나섰다. 스톡홀름에서는 그 효력이 근래 발휘되어, 경찰은 체류 허가증이나 거주증 등 유효 문서의 소지 여부가 의심되는 자에 대한 불심검문을 실시하고 있다. 경찰이 겉모습에만 근거해 불심검문을 요구하는 것은 명백히 금지되어 있음에도 '스웨덴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검문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하는 가운데, 경찰이 강제퇴거자 수를 올리고자 인종차별적 검문관행(인종 프로파일링)을 조성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REVA의 시행과 인종 프로파일링 여부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뒤따랐는데, 이 와중에 스웨덴의 현 법무부 장관인 베아트리스 아스크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인종 프로파일링로 간주한 것은 사실상 '개인 경험'의 차원에서 이해할 문제라고 답함으로써 이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조치도 취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아래 실린 공개서한은 스웨덴 작가인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아스크 장관의 인터뷰에 답하여 보낸 것이다. 이 공개서한은 2013년 3월 13일, 스웨덴의 대표적인 일간지인 다엔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에 게재되었고, 게재된 지 하루 만에 소셜 미디어를 통해 최다 공유된 DN.se 기사로 신기록을 세웠다. 다엔스 뉘헤테르의 한 관련 기사에 따르면, 트위터에서 공유된 횟수만 놓고 봤을 때 트위터 계정을 가진 스웨덴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 공개서한을 읽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의 공개서한은 이제 스웨덴 역사상 가장 많이 링크된 텍스트이다.
—레이첼 윌슨-브로일스
존경하는 베아트리스 아스크 법무 장관님께,
장관님과 저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장관님은 50년대 중반에, 전 70년대 후반에 태어났죠. 장관님은 여자고 전 남자입니다. 장관님은 정치인, 전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공유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국제경제학을 공부했죠(끝내 졸업은 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헤어스타일도 흡사합니다(비록 색깔은 다르지만요).
무엇보다 장관님과 저 둘 다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같은 국경 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동일한 언어와 깃발, 역사와 사회 기반 시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법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렇기에 지난 목요일, P1 모론 라디오 방송 중에 받은 질문에 장관님이 답변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여러 사람들(시민, 납세자, 유권자들)이 단지 자신들의 (갈색, 검정색, 혹은 금발 이외의 머리 색깔을 가진) 외모 하나 때문에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신분증 제출을 요구 받았다고 주장하는 현 상황이 우려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장관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죠.
"'내가 불심검문을 받은 이유'는 당연히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가령 전과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수시로 불심검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겉모습만 봐서는 전과범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다고 해도요 [...] 경찰이 법과 원칙에 준거하여 행동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봐야만 합니다."
"전과범"이라니, 흥미로운 단어 선택입니다. 우리가 딱 그 경우에 해당하니까요.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기 전에는 범죄자 취급을 받는 우리들이요. 그런데 사적인 경험은 언제 구조적인 인종 차별로 자리매김하는 겁니까? 어느 시점에 차별 대우와 탄압과 폭력으로 변질되는 겁니까? 그리고 "전체 그림"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그리도 많은 시민들 개개인의 경험들이 배제되고 마는 건 왜입니까?
제가 베아트리스 아스크 장관님께 이 공개서한을 보내는 건 간단한 부탁을 드리기 위해섭니다. 장관님과 제가 피부와 인생 경험을 서로 맞바꿔 보았으면 해서요. 어떻습니까? 까짓것 한번 해봅시다. 장관님은 조금은 생뚱맞은 아이디어라도 꺼리는 적이 없는 분이잖습니까. (성매수자들에게 통지서를 보낼 때는 연보라 색 봉투에 넣어 보내자는 제안으로 장관님이 논란을 샀던 일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스물네 시간 동안 장관님과 제가 서로의 몸을 맞바꿔보는, 아니, 빌려보는 겁니다. 먼저 제가 장관님 몸을 빌려 여성으로서 가부장적인 정치계에 몸담은 사람의 경험을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장관님은 제 피부를 빌려 제 입장이 되어 보시는 겁니다. 제 몸을 빌려 길거리로, 지하철로, 쇼핑 센터로 나가보십시오. 어디에서건 경찰만 눈에 띄면, 법의 편에 서서 언제고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이 범죄자가 아님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는 경찰과 맞닥뜨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비슷한 기억들—과거의 다른 탄압들, 다른 제복들, 수상쩍게 바라보던 눈초리들—을 연상하게 되는 제 입장을 장관님께서 직접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굳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나 1980년대의 남아공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겪어온 스웨덴의 최근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경찰과 맞닥뜨리는 순간, 장관님과 저, 우리가 나누는 몸이 습관적으로 떠올리고 마는 과거의 몇몇 순간들, 무작위로 연상되는 다음 경험들처럼 말입니다.
여섯 살 나이에 장관님과 제 공통의 조국인 스웨덴의 알란다 공항에 도착하던 기억. 우리는 땀에 젖은 아버지 손을 잡고 세관으로 향합니다. 아버지는 수시로 헛기침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무릎에 구두를 문질러 닦습니다. 스웨덴 여권이 안주머니에 무사히 들어 있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분홍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무사 통과됩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세관원에게 저지를 받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열 살이 되던 해, 거의 동일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번엔 아버지의 억양 탓이겠죠. 열두 살이 되어서도 같은 광경을 맞닥뜨립니다. 아마도 지퍼가 고장 나고 구멍 뚫린 가방 탓이겠죠. 열네 살 때도, 열여섯 살 때도, 열여덟 살 때도 이 장면은 반복됩니다.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지에게 사회 개론을 듣게 됩니다. 그때 이미 외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당신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 될까 봐 두려워하던 아버지가 말합니다.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수천 배 더 노력해야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어."
"왜?"
"사람들은 누구나 인종차별자니까."
"아빠도 인종차별자야?"
"아빠만 빼고 다."
이게 인종차별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니까요. 결코 <우리> 역사, <우리> DNA의 일부인 법이 없고, 그에 대한 죄책감 또한 <우리> 몫으로 간주되는 적이 없죠. 언제나 다른 곳에 존재하지 여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 있지는 않아요.
여덟 살 나이에 액션 영화를 보던 기억. 그 영화들 속에서 피부가 검은 남자들은 강간하고, 욕설을 내뱉고, 주변의 여자들을 손찌검하고, 제 자식들을 납치하고, 상습적으로 모함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열여섯 살이 되고, 열아홉 살이 되고, 스무 살, 서른두 살이 되어서도 그때 보았던 1차원적인 캐릭터들이 반복해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보게 됩니다.
아홉 살 때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범생,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아첨꾼이 되리라 마음먹었던 기억. 계획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데, 다만 대리 교사가 반을 맡은 동안 유일하게 차질이 생깁니다. 그때 처음으로 반의 문제아로 지목을 받고 말죠.
열 살 되던 해에 난생 처음 스킨헤드 족에게 쫓기게 되는데, 물론 그게 마지막은 아닙니다. 술주정뱅이들이 죽치는 회갈리드 교회 앞 벤치 근처에 서있는 우리를 보고, 스킨헤드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고, 우리는 냅다 줄행랑을 쳐 간신히 건물 문간에 몸을 숨기죠. 입에서는 비릿한 금속 맛이 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심장이 토끼 가슴처럼 벌렁거립니다.
열한 살 때 만화책에서 맞닥뜨린 동양인들은 신비하고 이국적이고, 예쁘장한 갈색 눈을 가졌으며 관능미가 넘치죠 (하지만 순 사기꾼들이기도 합니다).
열두 살 때 CD를 들으러 메가 시바카데미엔 상점에 갈 때마다, 경비원들이 상어 떼처럼 몰려들어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워키토키로 교신을 주고받으며 우리에게 따라붙죠. 그럼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정상적으로 행동하려고, 최대한 범죄자처럼 안 보이고자 몸동작 하나하나를 제어하려 안간힘을 쓰죠. 자연스럽게 걸으세요, 장관님. 숨도 평소처럼 쉬어요. 저쪽 선반으로 가 투팍 앨범을 꺼내 들되, 절대 CD를 훔칠 의도가 <아니라는> 게 명백해 보이도록 꺼내 드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경비원들은 계속 우리를 염탐하고, 그 동안 장관님과 저는 마음 깊숙이, 우리가 공유하는 이 몸 속 깊숙이, 수치심과 굴욕감이 섞인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을 옭아맸던 구조적인 병폐와 직접 맞닥뜨리게 됐다는 사실에, 우리 아버지들이 어째서 이 나라에서 끝내 성공을 이루지 못했는지, 어째서 당신들이 꾸던 꿈들은 반송된 지원서의 산더미에 묻혀 일제히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닫게 됐다는 사실에.
열세 살이 되던 해부터는 청소년 센터를 들락거리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듣게 되죠. 노르말름 경찰에게 말대꾸를 했다가 호송차에 실렸고, 코피를 흘리며 스톡홀름 교외인 낙카의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는 친구네 형. 슬루센 지하철역 승강장의 조막만 한 방으로 끌려가 경비원들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또 다른 친구의 사촌 (멍이 들지 않게 양쪽 허벅지에 전화번호부를 대고 때렸다죠). 그리고 아버지 친구 분 N씨. 발음이 샌다는 이유로 순찰 중이던 경찰한테 잡혀 주폭 전용 유치장에 갇혔고, 그 다음날이 될 때까지 경찰이 아무 낌새를 못 채 결국 응급실로 실려가고 나서야 동맥류 파열 사실이 밝혀졌다는 이야기. 장례식 날, 그분 여자친구는 "경찰서에서 나한테 확인 전화만 걸었어도 그 사람은 술엔 손도 안 대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줄 수 있었을 거예요." 라고 말했어요.
열세 살 반이 되었을 때, 우리는 소총과 레이저 조준경으로 무장하고 전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한 남자 때문에 불안감에 떨어야 하죠. 그 사람은 7개월에 걸쳐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 11명을 저격하고 다니지만, 경찰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요. 그맘때쯤 장관님과 제 머릿속에는 표적이 되는 건 언제나 모슬렘들이라고, 아랍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게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일반론이 자리잡기 시작하죠 (요즘과는 다른 구조적인 차별이 횡행하던 시절의 기억은 억누르면서 말입니다—이를테면 학교 아이들이 노상 "유태인"이라고 부르던 애가 청바지 허리춤째로 울타리에 묶였던 때처럼 말예요. 벨트 고리에 자물쇠까지 걸어놓고는, 그 애가 발버둥치는 꼴을 보며 다들 깔깔대고 웃었죠. 하긴, 그 애도 웃었어요. 혹은 웃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거나. 장관님과 저도 걜 보며 웃었던가요?).
열네 살, 혼스가탄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나오는데 경찰관 두 명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해요. 열다섯 살, 엑스퍼트 가게 앞에 앉아 있는데 죄수 호송차에서 내린 두 경찰관이 신분증 체크를 하겠다며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묻죠. 그러고는 유유히 차를 몰고 사라져요.
그런 내내, 내면의 갈등은 끊이질 않아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죠. 경찰이 우릴 예단할 권리는 없어. 제복 경찰로 도시 전체에 저지선을 치고 출입을 통제할 권한이 어디 있는데. 우리가 단속에 걸릴 게 불안해서 동네도 마음대로 못 나다니게 만드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어요: 우리 탓이었을 수도 있잖아. 우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굴었던 걸 테지. 후드 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다닌 게 누군데. 건달처럼 주머니가 수두룩하게 달린 헐렁한 청바지나 입고 나다닌 게 누군데. 범죄자처럼 보이는 머리 색깔을 가진 우리 잘못이지. 멜라닌 색소가 좀 적은 피부를 타고났으면 될 것을. 이 작은 나라도 실은 더 큰 세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끔 만드는 요상한 이름을 갖고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게다가 우린 아직 어리니까. 나이가 더 들면,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그 동안 우리 몸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베아트리스 아스크 장관님. 우리는 청소년 센터에서 발을 끊었고, 후드 셔츠 대신 검정색 코트를 입고 야구 모자 대신 스카프를 두르기 시작했어요. 농구도 그만두고 스톡홀름 경제대학교에서 경제학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하루는 스톡홀름 중앙역 앞에서 공책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죠 (아무리 경제학도라고는 해도, 작가가 되고픈 말 못할 꿈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덩치 큰 남자가 우리 옆에 다가와 섰죠. 귀에는 이어피스를 끼고 있었어요. "별일 없죠?" 그러면서 남자는 신분증을 제시하랬고, 다음 순간 용의자를 체포하듯 우리 팔을 번쩍 붙들어 쥐고는 호송차로 끌고 갔어요. 우리는 그 안에서 얌전히 기다려야 했죠. 우리가 밝힌 이름이 진짜 우리 이름이 맞는다는 OK가 떨어질 때까지요. 하필 수배자와 용모가 닮았다나요. 우리는 20분을 호송차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혼자서요. 하지만 사실 완벽히 혼자는 아니었죠. 그 사이 지나친 사람만 좋이 100명은 됐으니까요. 차에 탄 우리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저거 봐, 또 한 놈 잡혔잖아. 우리 선입견이 옳다는 걸 확증해 주는 증거야."
그날 베아트리스 아스크 장관님도 호송차에 타고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장관님은 그 자리에 없었죠. 전 혼자였어요. 그리고 지나치는 사람들 하나하나와 눈맞추어 가며, 난 아무 죄가 없다고 눈빛으로 호소했어요. 범죄를 저지르기는커녕, 단지 특정 장소에 특정한 모습으로, 특정한 용모로 서 있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경찰 호송차 뒷좌석에서 결백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죠.
마찬가지로, 권력에 의해 쉴 새 없이 '타자'로 낙인 찍히는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20분 뒤에 우리는 호송차에서 풀려났지만 사과의 말도, 해명의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말뿐이었죠: "이제 가봐도 좋소."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몸을 이끌고 그 자리를 뜨는 동안, 이 일을 글로 남기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다짐에 그치고 마리란 걸 우리 두 손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겪은 경험 따위는 말입니다, 장관님, 다른 이들이 당하는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세관 저편이 아닌 이편에서 성장한 몸이고, 우리 어머니는 스웨덴 사람이며, 진정 힘 없고 자원도 기댈 데도 없으며 체류 허가증도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가 영위하는 현실은 배게 가득한 아늑한 방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우리는 강제 퇴거의 위협을 받으며 살지 않죠. 재입국할 때마다 구금을 무릅써야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보다 훨씬 악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기에, 우리는 입을 열기보다는 침묵을 선택했고, 그렇게 세월만 흐르다가, 한참이 지나서 '정책의 법적 및 효과적 실행'을 의미하는 이른바 프로젝트 REVA가 도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은 쇼핑 센터를 뒤집고 다니기 시작했고 미등록 외국인들을 돕는 진료소 밖에 진을 쳤으며, 스웨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타국으로 강제 추방되는 고초를 겪고, 스웨덴 시민들은 국적을 증명하기 위해 수시로 여권을 제시해야 하는 와중에, 사법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이런 조치가 인종 프로파일링과 전혀 무관하다고, 오히려 '개개인의 경험'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의 관행. 폭력의 행사.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제 맡은 일을 하고 있다 뿐이었죠. 경비원이건, 경찰이건, 세관원이건, 정치인이건, 시민이건.
이 시점에서 장관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실 테죠. "그렇게도 납득하기 어려운가요? 법 앞에 예외란 없어요." 우리는 대답합니다: "법 자체가 비합법적이라면요?"
장관님은 또 말합니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인데, 국가 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답합니다. "그런데 자원이 희소한 사람들을 핍박하고 억압할 때는 돈이 넘쳐나면서, 자원이 희소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때는 돈이 늘 부족한 건 왜입니까?"
장관님은 또 말합니다. "광범위한 사회 안전망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주민에 대한 무조건적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면 우리는 먼 산을 보며 헛기침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명백한 해법은 우리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자명합니다 — 사람은 결코 불법일 수 없으며, 경찰이 불안감을 확산하고 법이 자국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면 그에 대응하고 나서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장관님은 그만하면 됐다면서 우리 몸에서 벗어나려고 하겠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글이 왜이리 기냐고, 요지는 안 밝히고 비슷한 얘기만 되풀이한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요, 맞습니다, 도무지 끝이 안 보이고 해답이 안 보이고 비상구 하나 안 보이는 상황에서 동일한 일만 되풀이되고 있는 게 맞습니다. REVA 정책이 부결된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프로젝트 REVA는 항시적이고 강도 낮은 탄압의 필연적 확장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만큼, 우리 스웨덴 시민들이 국가 이미지 쇄신의 필요성에 대처하지 않는 한 그 근저의 정신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밤, 당신도 즐겨 찾는 술집 앞에 줄을 선 백인 이외의 사람들은, 문전 박대를 당하지 않으려고 조직적으로 백인들 틈에 섞여 들어갈 것이며, 내일 임대주택을 신청하러 간 자리에서, 당신은 입주 자격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외국 성(姓) 대신 동반자의 성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스웨덴 시민임이 분명한 한 여성이 구직 지원서에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람'이라고 대문자로 또박또박 기입 중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잘 아니까요. 우리들 모두 어떤 불평등한 대우와 불이익이 도사리고 있는지 잘 압니다. 그럼에도 다들 잠자코 있죠. 외려 안전한 환경을 찾아 이 땅에 온 사람들의 소재를 파악해 강제 퇴거 명령을 내리는 데만 급급합니다. 우리가 그리도 자부하는, 박해 받는 자들을 위한 망명지요 피난처로서의 스웨덴은 이제 '일부' 시민들에게나 불안감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라고 씁니다. 사회라는 이 한 몸, 이 단일체를 공유하고 구성하는 것은 일부가 아닌 전체, 우리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당연히 REVA의 시행과 인종 프로파일링 여부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뒤따랐는데, 이 와중에 스웨덴의 현 법무부 장관인 베아트리스 아스크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인종 프로파일링로 간주한 것은 사실상 '개인 경험'의 차원에서 이해할 문제라고 답함으로써 이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조치도 취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아래 실린 공개서한은 스웨덴 작가인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아스크 장관의 인터뷰에 답하여 보낸 것이다. 이 공개서한은 2013년 3월 13일, 스웨덴의 대표적인 일간지인 다엔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에 게재되었고, 게재된 지 하루 만에 소셜 미디어를 통해 최다 공유된 DN.se 기사로 신기록을 세웠다. 다엔스 뉘헤테르의 한 관련 기사에 따르면, 트위터에서 공유된 횟수만 놓고 봤을 때 트위터 계정을 가진 스웨덴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 공개서한을 읽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의 공개서한은 이제 스웨덴 역사상 가장 많이 링크된 텍스트이다.
—레이첼 윌슨-브로일스
존경하는 베아트리스 아스크 법무 장관님께,
장관님과 저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장관님은 50년대 중반에, 전 70년대 후반에 태어났죠. 장관님은 여자고 전 남자입니다. 장관님은 정치인, 전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공유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국제경제학을 공부했죠(끝내 졸업은 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헤어스타일도 흡사합니다(비록 색깔은 다르지만요).
무엇보다 장관님과 저 둘 다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같은 국경 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동일한 언어와 깃발, 역사와 사회 기반 시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법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렇기에 지난 목요일, P1 모론 라디오 방송 중에 받은 질문에 장관님이 답변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여러 사람들(시민, 납세자, 유권자들)이 단지 자신들의 (갈색, 검정색, 혹은 금발 이외의 머리 색깔을 가진) 외모 하나 때문에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신분증 제출을 요구 받았다고 주장하는 현 상황이 우려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장관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죠.
"'내가 불심검문을 받은 이유'는 당연히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가령 전과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수시로 불심검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겉모습만 봐서는 전과범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다고 해도요 [...] 경찰이 법과 원칙에 준거하여 행동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봐야만 합니다."
"전과범"이라니, 흥미로운 단어 선택입니다. 우리가 딱 그 경우에 해당하니까요.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기 전에는 범죄자 취급을 받는 우리들이요. 그런데 사적인 경험은 언제 구조적인 인종 차별로 자리매김하는 겁니까? 어느 시점에 차별 대우와 탄압과 폭력으로 변질되는 겁니까? 그리고 "전체 그림"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그리도 많은 시민들 개개인의 경험들이 배제되고 마는 건 왜입니까?
제가 베아트리스 아스크 장관님께 이 공개서한을 보내는 건 간단한 부탁을 드리기 위해섭니다. 장관님과 제가 피부와 인생 경험을 서로 맞바꿔 보았으면 해서요. 어떻습니까? 까짓것 한번 해봅시다. 장관님은 조금은 생뚱맞은 아이디어라도 꺼리는 적이 없는 분이잖습니까. (성매수자들에게 통지서를 보낼 때는 연보라 색 봉투에 넣어 보내자는 제안으로 장관님이 논란을 샀던 일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스물네 시간 동안 장관님과 제가 서로의 몸을 맞바꿔보는, 아니, 빌려보는 겁니다. 먼저 제가 장관님 몸을 빌려 여성으로서 가부장적인 정치계에 몸담은 사람의 경험을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장관님은 제 피부를 빌려 제 입장이 되어 보시는 겁니다. 제 몸을 빌려 길거리로, 지하철로, 쇼핑 센터로 나가보십시오. 어디에서건 경찰만 눈에 띄면, 법의 편에 서서 언제고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이 범죄자가 아님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는 경찰과 맞닥뜨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비슷한 기억들—과거의 다른 탄압들, 다른 제복들, 수상쩍게 바라보던 눈초리들—을 연상하게 되는 제 입장을 장관님께서 직접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굳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나 1980년대의 남아공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겪어온 스웨덴의 최근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경찰과 맞닥뜨리는 순간, 장관님과 저, 우리가 나누는 몸이 습관적으로 떠올리고 마는 과거의 몇몇 순간들, 무작위로 연상되는 다음 경험들처럼 말입니다.
여섯 살 나이에 장관님과 제 공통의 조국인 스웨덴의 알란다 공항에 도착하던 기억. 우리는 땀에 젖은 아버지 손을 잡고 세관으로 향합니다. 아버지는 수시로 헛기침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무릎에 구두를 문질러 닦습니다. 스웨덴 여권이 안주머니에 무사히 들어 있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분홍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무사 통과됩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세관원에게 저지를 받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열 살이 되던 해, 거의 동일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번엔 아버지의 억양 탓이겠죠. 열두 살이 되어서도 같은 광경을 맞닥뜨립니다. 아마도 지퍼가 고장 나고 구멍 뚫린 가방 탓이겠죠. 열네 살 때도, 열여섯 살 때도, 열여덟 살 때도 이 장면은 반복됩니다.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지에게 사회 개론을 듣게 됩니다. 그때 이미 외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당신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 될까 봐 두려워하던 아버지가 말합니다.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수천 배 더 노력해야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어."
"왜?"
"사람들은 누구나 인종차별자니까."
"아빠도 인종차별자야?"
"아빠만 빼고 다."
이게 인종차별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니까요. 결코 <우리> 역사, <우리> DNA의 일부인 법이 없고, 그에 대한 죄책감 또한 <우리> 몫으로 간주되는 적이 없죠. 언제나 다른 곳에 존재하지 여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 있지는 않아요.
여덟 살 나이에 액션 영화를 보던 기억. 그 영화들 속에서 피부가 검은 남자들은 강간하고, 욕설을 내뱉고, 주변의 여자들을 손찌검하고, 제 자식들을 납치하고, 상습적으로 모함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열여섯 살이 되고, 열아홉 살이 되고, 스무 살, 서른두 살이 되어서도 그때 보았던 1차원적인 캐릭터들이 반복해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보게 됩니다.
아홉 살 때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범생,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아첨꾼이 되리라 마음먹었던 기억. 계획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데, 다만 대리 교사가 반을 맡은 동안 유일하게 차질이 생깁니다. 그때 처음으로 반의 문제아로 지목을 받고 말죠.
열 살 되던 해에 난생 처음 스킨헤드 족에게 쫓기게 되는데, 물론 그게 마지막은 아닙니다. 술주정뱅이들이 죽치는 회갈리드 교회 앞 벤치 근처에 서있는 우리를 보고, 스킨헤드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고, 우리는 냅다 줄행랑을 쳐 간신히 건물 문간에 몸을 숨기죠. 입에서는 비릿한 금속 맛이 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심장이 토끼 가슴처럼 벌렁거립니다.
열한 살 때 만화책에서 맞닥뜨린 동양인들은 신비하고 이국적이고, 예쁘장한 갈색 눈을 가졌으며 관능미가 넘치죠 (하지만 순 사기꾼들이기도 합니다).
열두 살 때 CD를 들으러 메가 시바카데미엔 상점에 갈 때마다, 경비원들이 상어 떼처럼 몰려들어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워키토키로 교신을 주고받으며 우리에게 따라붙죠. 그럼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정상적으로 행동하려고, 최대한 범죄자처럼 안 보이고자 몸동작 하나하나를 제어하려 안간힘을 쓰죠. 자연스럽게 걸으세요, 장관님. 숨도 평소처럼 쉬어요. 저쪽 선반으로 가 투팍 앨범을 꺼내 들되, 절대 CD를 훔칠 의도가 <아니라는> 게 명백해 보이도록 꺼내 드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경비원들은 계속 우리를 염탐하고, 그 동안 장관님과 저는 마음 깊숙이, 우리가 공유하는 이 몸 속 깊숙이, 수치심과 굴욕감이 섞인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을 옭아맸던 구조적인 병폐와 직접 맞닥뜨리게 됐다는 사실에, 우리 아버지들이 어째서 이 나라에서 끝내 성공을 이루지 못했는지, 어째서 당신들이 꾸던 꿈들은 반송된 지원서의 산더미에 묻혀 일제히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닫게 됐다는 사실에.
열세 살이 되던 해부터는 청소년 센터를 들락거리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듣게 되죠. 노르말름 경찰에게 말대꾸를 했다가 호송차에 실렸고, 코피를 흘리며 스톡홀름 교외인 낙카의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는 친구네 형. 슬루센 지하철역 승강장의 조막만 한 방으로 끌려가 경비원들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또 다른 친구의 사촌 (멍이 들지 않게 양쪽 허벅지에 전화번호부를 대고 때렸다죠). 그리고 아버지 친구 분 N씨. 발음이 샌다는 이유로 순찰 중이던 경찰한테 잡혀 주폭 전용 유치장에 갇혔고, 그 다음날이 될 때까지 경찰이 아무 낌새를 못 채 결국 응급실로 실려가고 나서야 동맥류 파열 사실이 밝혀졌다는 이야기. 장례식 날, 그분 여자친구는 "경찰서에서 나한테 확인 전화만 걸었어도 그 사람은 술엔 손도 안 대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줄 수 있었을 거예요." 라고 말했어요.
열세 살 반이 되었을 때, 우리는 소총과 레이저 조준경으로 무장하고 전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한 남자 때문에 불안감에 떨어야 하죠. 그 사람은 7개월에 걸쳐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 11명을 저격하고 다니지만, 경찰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요. 그맘때쯤 장관님과 제 머릿속에는 표적이 되는 건 언제나 모슬렘들이라고, 아랍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게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일반론이 자리잡기 시작하죠 (요즘과는 다른 구조적인 차별이 횡행하던 시절의 기억은 억누르면서 말입니다—이를테면 학교 아이들이 노상 "유태인"이라고 부르던 애가 청바지 허리춤째로 울타리에 묶였던 때처럼 말예요. 벨트 고리에 자물쇠까지 걸어놓고는, 그 애가 발버둥치는 꼴을 보며 다들 깔깔대고 웃었죠. 하긴, 그 애도 웃었어요. 혹은 웃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거나. 장관님과 저도 걜 보며 웃었던가요?).
열네 살, 혼스가탄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나오는데 경찰관 두 명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해요. 열다섯 살, 엑스퍼트 가게 앞에 앉아 있는데 죄수 호송차에서 내린 두 경찰관이 신분증 체크를 하겠다며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묻죠. 그러고는 유유히 차를 몰고 사라져요.
그런 내내, 내면의 갈등은 끊이질 않아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죠. 경찰이 우릴 예단할 권리는 없어. 제복 경찰로 도시 전체에 저지선을 치고 출입을 통제할 권한이 어디 있는데. 우리가 단속에 걸릴 게 불안해서 동네도 마음대로 못 나다니게 만드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어요: 우리 탓이었을 수도 있잖아. 우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굴었던 걸 테지. 후드 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다닌 게 누군데. 건달처럼 주머니가 수두룩하게 달린 헐렁한 청바지나 입고 나다닌 게 누군데. 범죄자처럼 보이는 머리 색깔을 가진 우리 잘못이지. 멜라닌 색소가 좀 적은 피부를 타고났으면 될 것을. 이 작은 나라도 실은 더 큰 세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끔 만드는 요상한 이름을 갖고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게다가 우린 아직 어리니까. 나이가 더 들면,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그 동안 우리 몸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베아트리스 아스크 장관님. 우리는 청소년 센터에서 발을 끊었고, 후드 셔츠 대신 검정색 코트를 입고 야구 모자 대신 스카프를 두르기 시작했어요. 농구도 그만두고 스톡홀름 경제대학교에서 경제학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하루는 스톡홀름 중앙역 앞에서 공책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죠 (아무리 경제학도라고는 해도, 작가가 되고픈 말 못할 꿈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덩치 큰 남자가 우리 옆에 다가와 섰죠. 귀에는 이어피스를 끼고 있었어요. "별일 없죠?" 그러면서 남자는 신분증을 제시하랬고, 다음 순간 용의자를 체포하듯 우리 팔을 번쩍 붙들어 쥐고는 호송차로 끌고 갔어요. 우리는 그 안에서 얌전히 기다려야 했죠. 우리가 밝힌 이름이 진짜 우리 이름이 맞는다는 OK가 떨어질 때까지요. 하필 수배자와 용모가 닮았다나요. 우리는 20분을 호송차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혼자서요. 하지만 사실 완벽히 혼자는 아니었죠. 그 사이 지나친 사람만 좋이 100명은 됐으니까요. 차에 탄 우리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저거 봐, 또 한 놈 잡혔잖아. 우리 선입견이 옳다는 걸 확증해 주는 증거야."
그날 베아트리스 아스크 장관님도 호송차에 타고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장관님은 그 자리에 없었죠. 전 혼자였어요. 그리고 지나치는 사람들 하나하나와 눈맞추어 가며, 난 아무 죄가 없다고 눈빛으로 호소했어요. 범죄를 저지르기는커녕, 단지 특정 장소에 특정한 모습으로, 특정한 용모로 서 있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경찰 호송차 뒷좌석에서 결백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죠.
마찬가지로, 권력에 의해 쉴 새 없이 '타자'로 낙인 찍히는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20분 뒤에 우리는 호송차에서 풀려났지만 사과의 말도, 해명의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말뿐이었죠: "이제 가봐도 좋소."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몸을 이끌고 그 자리를 뜨는 동안, 이 일을 글로 남기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다짐에 그치고 마리란 걸 우리 두 손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겪은 경험 따위는 말입니다, 장관님, 다른 이들이 당하는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세관 저편이 아닌 이편에서 성장한 몸이고, 우리 어머니는 스웨덴 사람이며, 진정 힘 없고 자원도 기댈 데도 없으며 체류 허가증도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가 영위하는 현실은 배게 가득한 아늑한 방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우리는 강제 퇴거의 위협을 받으며 살지 않죠. 재입국할 때마다 구금을 무릅써야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보다 훨씬 악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기에, 우리는 입을 열기보다는 침묵을 선택했고, 그렇게 세월만 흐르다가, 한참이 지나서 '정책의 법적 및 효과적 실행'을 의미하는 이른바 프로젝트 REVA가 도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은 쇼핑 센터를 뒤집고 다니기 시작했고 미등록 외국인들을 돕는 진료소 밖에 진을 쳤으며, 스웨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타국으로 강제 추방되는 고초를 겪고, 스웨덴 시민들은 국적을 증명하기 위해 수시로 여권을 제시해야 하는 와중에, 사법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이런 조치가 인종 프로파일링과 전혀 무관하다고, 오히려 '개개인의 경험'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의 관행. 폭력의 행사.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제 맡은 일을 하고 있다 뿐이었죠. 경비원이건, 경찰이건, 세관원이건, 정치인이건, 시민이건.
이 시점에서 장관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실 테죠. "그렇게도 납득하기 어려운가요? 법 앞에 예외란 없어요." 우리는 대답합니다: "법 자체가 비합법적이라면요?"
장관님은 또 말합니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인데, 국가 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답합니다. "그런데 자원이 희소한 사람들을 핍박하고 억압할 때는 돈이 넘쳐나면서, 자원이 희소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때는 돈이 늘 부족한 건 왜입니까?"
장관님은 또 말합니다. "광범위한 사회 안전망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주민에 대한 무조건적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면 우리는 먼 산을 보며 헛기침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명백한 해법은 우리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자명합니다 — 사람은 결코 불법일 수 없으며, 경찰이 불안감을 확산하고 법이 자국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면 그에 대응하고 나서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장관님은 그만하면 됐다면서 우리 몸에서 벗어나려고 하겠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글이 왜이리 기냐고, 요지는 안 밝히고 비슷한 얘기만 되풀이한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요, 맞습니다, 도무지 끝이 안 보이고 해답이 안 보이고 비상구 하나 안 보이는 상황에서 동일한 일만 되풀이되고 있는 게 맞습니다. REVA 정책이 부결된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프로젝트 REVA는 항시적이고 강도 낮은 탄압의 필연적 확장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만큼, 우리 스웨덴 시민들이 국가 이미지 쇄신의 필요성에 대처하지 않는 한 그 근저의 정신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밤, 당신도 즐겨 찾는 술집 앞에 줄을 선 백인 이외의 사람들은, 문전 박대를 당하지 않으려고 조직적으로 백인들 틈에 섞여 들어갈 것이며, 내일 임대주택을 신청하러 간 자리에서, 당신은 입주 자격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외국 성(姓) 대신 동반자의 성으로 신청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스웨덴 시민임이 분명한 한 여성이 구직 지원서에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람'이라고 대문자로 또박또박 기입 중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잘 아니까요. 우리들 모두 어떤 불평등한 대우와 불이익이 도사리고 있는지 잘 압니다. 그럼에도 다들 잠자코 있죠. 외려 안전한 환경을 찾아 이 땅에 온 사람들의 소재를 파악해 강제 퇴거 명령을 내리는 데만 급급합니다. 우리가 그리도 자부하는, 박해 받는 자들을 위한 망명지요 피난처로서의 스웨덴은 이제 '일부' 시민들에게나 불안감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라고 씁니다. 사회라는 이 한 몸, 이 단일체를 공유하고 구성하는 것은 일부가 아닌 전체, 우리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