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물류창고>에서

이수명

물류 창고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무얼 끌어 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건의 전개는 여러 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휴가

휴가가 7일째로 접어들었을 때 수원을 가기로 했다.
수원 어때요 물었을 때 그가 말했다. 좋아요
출발할까요 좋아요
수원은 환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수원은 가까우니까

사람들의 피부가 둥둥 떠다닐 텐데
차를 가지고 갔다. 서울에서
톨게이트를 두 번 거치고 계속 터널이 나왔다. 떠다니는 터널이 좋아요
잊지 못할 휴가일 거야 정말 그래

화성을 따라 걸었다. 검은 돌벽 흰 돌벽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좋아요 실현되어버린 약속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늘어서 있어요 뛰쳐나간 개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여기서 살 거로군요

그렇게 해요 우리 좀더 걸어요 아니 더 걷지 말아요

잠시 흥분이 서 있었다. 죽은 시간 위에


멀리서 흘러와 서 있는 이상한 돌들처럼 우리는 여기 붙어 서서 꿈쩍도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요 우리는 똑같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화성에 닿았다. 잊지 못할 휴가일 거야 정말 그래
우리는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우리는 조금 웃어보자
좋아요 흰 부츠를 나란히 신었을 뿐인데

우리는 정말 다 꿰매어진 것만 같았다.

 

원주율

베란다에서
옷걸이가 돌고 있다. 옷걸이에 걸린 옷이 돌고 있다.

저 옷을 어제 입었는데 입고 닳아빠진
솔기를 따라 잠에 빠져들었는데

옷은 저 혼자 천천히 돈다.

옷은 이제 다 틀렸다.
다음 날이 되면 또 맞지 않는다.
한 움큼의 날이 거기서 빠져나간다.

그래도 매일
옷을 입는 꿈을 꾼다.

몸이 좋지 않아
집 안을 이리저리 몸이 돌아다닌다.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꿈

좀 나와볼래?
누가 찾아왔어

거기 누가 서 있는 거지? 잘 안 보이는데

옷을 다시 입는 꿈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꿈
베란다에서 내다보며
옷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여름에 우리는

여름에 우리는 만난다. 만나서 좋아 보인다. 여름에는 멀리 갈수 없고 다가온 폭풍을 알아차릴 수 없고 여름에는 집을 헐어 가까운 노점으로 간다.

언제라도 좋아
노점이 사방에 둥둥 떠 있다.

이쪽으로 앉을까, 여기 테이블을 밀어 저기 테이블이 생겨난다. 아무 데나 좋아 할 얘기가 너무 많아 몇 개의 태이블을 붙이자

여름에는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앞뒤로 삐걱삐걱 의자를 덜컹거린다. 내 말 좀 들어봐 컵을 엎어놓고 게의 집게발을 찢는다. 이제는 더 이상 발을 쳐들지 않겠지

저기압이 발달한 여름에는 노점들이 발달한다. 사람들이 발달한 곳에 있으면 우리는 좋아 보인다. 한번에 마셔도 좋아 그래 좋은 생각이야 잔을 들어 올리는

노점의 순간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도 좋아

여름에 우리는 만나다. 만나서 혼잣말을 한다. 여름에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고 여름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언제라도 좋아 우리는 단번에 서로의 목을 부러뜨린다.

 

항상 새것 같은

옷을 턴다. 항상 새것 같은 옷을 입는다. 항상 새것 같은 공기 아래 새것 같은 곰팡이가 피고

새것 같은 눈물 천천히 눈에 고인다. 오늘은 상하지 않은 점심을 먹는다.

겨울은 없고 겨울 헤엄도 없는

오후에는 칠이 벗겨진 의자 위에 앉는다.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 빛을 창에서 책꽂이로 옮겼다가 시탁으로 옮겼다가 닫으려던 문 아래 잠시 세워둔다. 기분이 자꾸 바뀌어서 작성하려고 했던 명단이 또 바뀌어서 내가 불청객이 되고 나서야 모든 기분이 사라진다. 모르느 사람이 많이 올 거다.

중계방송을 듣는 일이 가장 즐겁다. 아나운서의 흥분이 볼륨을 높이고 그래도 금방 날이 어두워진다. 창밖으로 곧 어둠이 가득해진다.

나는 어둠 속에 뚫린 커다란 구멍처럼 보인다.

 

밤이 날마다 찾아와

밤이 날마다 찾아와
우리는 밤이다.
머뭇거리며 차를 마시러 나간다.
하던 일을 멈추고

오늘을 벌써 잃어서
아무 일도 없어서
계속 오늘을 잃는다.

공이 허공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밤

위험해요

밤이 오면 눈썹이 사라져서
나는 운다.

네가 죽은 줄 알고
나는 운다.

밤에 나는 녹슬고
어딘가로부터
똑바로 날아드는 공이 무서워

뛰어오르며 my ball 외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외치는 건 좀 이상해 보여

밤이 너무 빨리 찾아와
밤에는 나쁜 공기
움직이지 않는 구름

하던 일을 멈추고
계속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