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빛그물>에서

최정례

1mg의 진통제

1mg의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들었다

설산을 헤매었다

설산의 빙벽을 올라야 하는데 
극약 처분의 낭떠러지를 
기어올라야 하는데

1mg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 1mg을 안고
빙벽을 오르기가 힘들었다

그 1mg마저 버리고 싶었다

너무나 무거워
엄마 엄마 죽은 엄마를 불렀다

텅 빈 설산이 울렸다



토끼도 없는데

갈 거야 말 거야
그대가 소리치는데
나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사라질 수도 없고
할 일을 쌓아두고
하지도 않고

대신물병을 넣고 지도를 넣고 토끼를 넣는다
토끼라니, 토끼 같은 건 없다
불가능해, 못 가

그러나 간다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깡총깡총
따라 간다 못 간다

토끼도 없는데 토끼풀 많다
아파트와 아파트, 또 아파트 사잇길에
토끼가 없으니까 토끼풀이 더 많다

갈 거야 말 거야
가기도 하고 말기도 한다
그러다가엉뚱한 길로 접어든다

목줄에 매달린 강아지가
토끼풀에 코를 대다 끌려간다
보이는 것을 보는 동안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온다

토끼풀에 대고
우물쭈물하는 이들
토끼는 아니다
토끼 대신 아파트 구멍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이
웅크리고 있다


 
삼단어법으로

염소들이 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괴이한 열매처럼 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었다 
염소들이 지붕 위로 올라갔던 산자락의 집
그 길을 지나 한참을 헉헉대며
산으로 올라갔던 일
웃으며 둘이서 손을 잡았던 일
아이들이 다 자라
각자 자기 가지에 매달려 있는 풍경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말없이 숟가락을 놓고
다녀올게 서둘러
일하러 나가고
나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고
애국적인 사람들이 애국적인 말을 하는
뉴스를 보면서 그들처럼 흥분한다
그들은 삼단논법으로 말한다
아파트는 콘크리트로 짓는다
콘크리크는 시멘트 물 자갈의 결합이다 
그러므로 아파트는 그들만의 결합이다
그들의 주장은 바꿀 수가 없다
보드카는 감자로 만든다
감자는 식물이다
그러므로 보드카는 샐러드다
누군가 그들의 삼단논법을 흉내낸다
열심히 듣는다고는 하지만 듣지 않는다
살기 위해 먹는다 아니다
먹기 위해 산다
낡은 명제다
염소들이 나무에 올라가 있다
먹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다
살기 위해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올라가기 위해 그냥
올라가서는
내려오지 못해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V자 편대 비행으로 철새가 날아간다
그물 던졌다 당기듯 포물선을 그리다 순간에 
선두가 바뀌고 날개의 리듬도 바뀐다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잠을 자면서도 날아가는 그들
기어이 찾아가는 북쪽의 한 지점과
그들 눈 속에 나침반 같은 것이 
양자역학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으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날아가는 그들 
강변북로의 이 자동차 군단과도
아무 상관없이 날아가는 그들
철갑에 철갑을 두른 이 단독자들과 
정체 중인 이 개별자들과
늘어선 강변의 부동산들과 
불투명한 잿빛의 겨울 하늘과 
슬플 것도 없이 유리를 두른 
이 유리자들의 부동산
완전 안전유리를 배경으로. 
새들과는 역방향으로 
강변도로를 질주하다 정체하는 
정체자들 위로
날아가는 날아가는
V자 편대 비행의 새들이 있고 
이유도 없이 그들과는 상관도 없이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하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입자들의 스타카토

반짝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줄은 몰랐다

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 
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

당신은 죽었는데 흐르고 있고 
아직 삶이 있는 나는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의미가 있다는 듯
의미가 아니라는 듯
무심한 격랑과 무차별 속으로 
입자들이 떠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