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 예술

Kim Cheom-seon

Artwork by Weims

글머리에

몸이 아픈 것, 병이 든다는 것도 때로는 어떤 새로운 계기가 되기다 한다. 지난해 늦가을, 너무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많은 그림을 그려서 오른쪽 어깨가 탈이 났다. 병들었다. 눈물이 줄줄 날 정도로 아팠다.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오십 견이라고 했다. 몇 해 전에도 왼쪽 어깨의 오십 견을 앓았는데, 그때는 왼쪽이 아파도 오른쪽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오른쪽이 아픈 것은 훨씬 더 불편했다.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오른팔 몰래 그림을 살짝 그려봤는데, 그래도 오른쪽어깨 통증이 더 심해졌다. 오른팔을 솔이고 몰래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봇 하고 징징 울고, 왼팔로 책 같은 것을 들고 읽었다. 팔이 아프니 다리나 많이 쓰자, 많이 걸어 다녔다. 외출도 많이 했다. 얼마 나 불만이 쌓이던지. 자신에게 화가 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슬퍼만 하다가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때 문들 컴퓨터가 떠올랐다.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린 채 어께는 안 써도 손목과 손가락의 힘만으로 도 컴퓨터 작업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을 아들에게 하자 대단히 좋아했다. 아들이 엄마를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노트북을 사왔다.

처음엔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생각했다. 펜으로 글을 쓰면 오른손만 쓰게 되는데 컴퓨터를 이용하면 최소한 오른손의 부담을 전반은 덜어줄 수 있었다. 글꼴 익힘부터 속도에 욕심을 내지 않고 정확하게 새끼손가락까지 써가면서 손을 훈련시켰다. 그러니까 아픈 중에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픈 시간을 무의미하게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뭔가 자신을  좋게 훈련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연어 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때 아들이 이제는 글자 연습만 하지 말고 그림도 그려 보라도 했다. 그리고는 뭔가를 설치해줬다.

아들의 도움을 받아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더니 아들이 놀라 소리쳤다. “와아, 화가라는 게 이런 거구나!” 컴퓨터를 전공한 아들이 진짜 화가가 작업한 것을 봄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초보적인 출로도 이런 기림이 나올 수 있다니!” 하면서 아들은 더 좋은 것을 설치해 신나게 그립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타자 연습은 안 하고 그림만 그렸다. 팔이 아픈 줄도 몰랐다. 전신 없이 그림을 그릴 때는 펜 마우스를  워낙 긁어 대어 사방 10cm의 손바닥만한 그림판, 태블릿 (tablet)에 구멍이 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펜 마우스를 긁어 대다 걱정이 되어서 작업 도중 태블릿을 들고 수없이 들여다봤다. 그렇게 문질러 댔지만 신기하게도 흠집 하나 없었다. 게다가 손바닥만한 태블릿에 펜 마우스로 작업을 하며 손목만 움직여도 다양한 크기의 그림이 완성되니 아픈 중에도 마음껏 그림을 그릴 소 있었다. 이런 현대 문명이 있게 한 과학자들에게 감사한다.

한 소재의 그림들이 자꾸 반복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감행하고 싶었던 성실하고 혹독한 과정이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에 여러 번 접근해서 그려보고 싶기 때문에. 나는 고향이 같은 하나의 대상을 접하면, 이렇게 저렇게 수없이 되풀이해서 그리게 된다. 마티스가 (루마니아의 블라우스) 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여러 장의 비슷한 그림을 그린 게 고등학교 때의 미술 교과서에 나왔다. 그의 연습 그림들이 평생 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도 그처럼 성실하게 한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그려보는 연습을 끝없이 해야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컴퓨터를 만나니 그 생각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컴퓨터는 종이에다 가 물감과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물감으로 작업을 하면 색을 섰었다가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다시 썩고, 또 다른 물감을 더 넣고 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재료를 버릴 때는 아깝고 낭비도 심했는데, 컴퓨터는 색을 띄워서 마우스로 콕 찍으면 일초 만에 새로운 색을 고를 수가 있어서 너무 신이 났다. 붓도 아주 넓은 붓에서부터 아주 가는 붓까지 순식간에 바꿀 수 있고 아무리 구려도 종이나 캔버스가 떨어질 염려도 없고 … 그림을 그리다가 화방에 전화해서 당장 필요한 것을 주문하고 배달해 달라던 번거로운 일도 사라져버렸다. 이제까지 나를 짓누르던 번거로운 일들이 사라져버렸다. 온갖 불편 함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세계에 내가 살고 있었다. 나는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서 민 먼저 컴퓨터를 켜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습관이 되었던 아침 신문도 읽지 않고 오로지 그림에 만 몰입했다. 컴퓨터를 알기 전에는 해만 잤는데, 어떤 때는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새벽 세 시까지도 앉아서 그렸다. 그래도 피곤 한 줄도 몰랐다. 팔이 아픈 줄도 몰랐다.

때부분의 사람을 언어로 생각하고 수학지는 숫자나 기호로 생각하지만 화가는 눈과 손으로 생각한다. 손을 통해서만 사고는 앞으로 나아간다. 손으로 그려보지 않으면 상식적인 단계에서 시각전인 사고가 멈춰버린다. 화가는 생각과 동시에 손을 움직에서 그려야만 한다. 손이 그린 것을 눈이 보면서 생각은 더 앞으로 나아간다. 손의 도움 없이 눈만으로 나아가는 세계에는 한계가 있다. 자꾸 손으로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이럴 때 컴퓨터는 아주 좋은 도구이다. 물감과 화폭을 무한정 쓸 수 있고 그림 백 개를 그려서 쌓아 둬도 짐이 되지 않는 데다, 어딘가로  옮겨도 무겁지 않고 곰팡이도 안 술어서 더할 수 없이 좋다.

나는 “사람이 언어를 떠나서 시각만으로도 사고할 소 있울까’ 에 대해 줄 곧 생각해왔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주제를 여러 각도로 탐구하듯 아주 깊이, 아주 많이 그려보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그림’ 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수많은 고양이를 그리고 수많은 말을 그리고 꽃을 그리고 더 많은 내면을 그리고 …. 그렇게 그리면서도 나는 분명 더 많이 그리고 싶어할 것이다.

이 그림들은 팔로 그림을 못 그려서 컴퓨터로 그려졌고, 굉장히 개인적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준 다기 보다는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해서 내 자신에 게로 몰입해가는 성실하고 진솔한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들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2002 년 6월



바다 의 컵 속에 서 꿈꾸는 인간

순수 시가에 빠져라.
이 그림을 보고 언어적인 사우를 하는 자들은 머리가 굳을 것이라고 어떤 시인이 말했다.
이 그림을 놓고 감히 말 같은 것으로 표현하겠다고 덤비지 말라고 화가가 말했다.
이곳에 감히 언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언어적인 기능을 완전히 제거하고 오로지 시각만으로 접근하라.

 

우주 말

 
우주에 말이 있다. 아주 먼 거리를 두고 말 두 마리가 있다. 동물적인 육감으로는 전혀 상대를 감응할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두 마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느껴지지 않는 선으로, 어떤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전파로, 두 마리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은 아버지와 살아 있는 아들, 아들은 지사에 남아 있다. 아버지는 멀고 먼 우주로, 우리의 육감으로는 전혀 닿을 수 없는 세계로 멀어져갔다. 아버지는 지상의 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냥  놔둘 수 없다. 교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들은 무심하다. 아버지는 자기가 보낼 수 있는 모들 방향으로 전파를 쏜다. 그 중 한 가닥이라도 지상의 아들에게 닿을 거라는 희만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전차를 쏜다. 어리고 친진한 아들은 무심히 그 전파를 받는다. 그러면서 우주의 광선이라고 부른다. 아들은 할 수 없는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애정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희망 같기도 아다. 아들은 뭔지는 모르지만 좋은 기분을 느끼면서 그냥 웃는다. 아버지는 보고 있다. 아버지는 알고 있다. 아버지도 웃는다.



우주 새

태양 한가운데 세 발 달린 새가 살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날아 올라 태양 속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살 가진 동물이 상상할 수 없는 온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온도. 이 세상의 모들 물질을 액체로 만들어 버리는 그 세계에 세 발 달린 새가 감히 살아 숨쉰다.

세상에는 수많은 태양이 있고,  그 태양 하나하나 속에는 어디에나 세 발 달린 새가 살고 있다. 나는 두 마리의 삼족 홍조, 세 발 달린 붉은 새를 머릿속에서 기른다. 한 마리는 우리처럼 땋을 딛고 서 있다. 또 한 마리는 땅을 향해 무중력 상태로 서 있다. 한 마리는 정적이고 한 마리는 동적이다. 두 마리가 그런 자세로 있을 때 내 머리는 균형을 이룬다. 두 마리가 동적인 자세로 배치될 때 나는 미친다. 두 마리가 전적인 상태로 있을 때 나는 우울 속으로 침잠한다. 두 마리의 새는 내 머리의 추다.



우주 토끼

토끼 두 마리가 각각 다른 변에서 살고 있다. 귀는 길쭉하고, 눈은 빨갛고, 뒷다리는 길다. 그들은 다른 별에 사는데도 똑같은 모양, 똑같은 습성으로 존재한다. 두 별 사이로 수많은 우주선이 날아다닌다. 두 별 사이로 수많은 별똥별과 꼬리별들이 흐른다. 거침없이 흐른다. 두 별 사이로 수많은 별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수많은 별들이 쉬지 않고 맴돈다. 그럼에도 두별 사이에는 수많은 줄기의 감정파, 뇌파, 희망파,, 느낌파, 생각파 들이 끊임없이 흐른다. 떨어져 사는 두 마리의 토끼는 어떤 문명의 도움 없이도 모든 것을 교류한다. 그들의 교류이는 어떤 물리적인 현상—거리, 시간, 흐르는 유성 등—도 장애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고독하지 않다.



토끼

누더기를 입은 거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더기가 아니라 거적을 두른 거지가 집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당연히 그를 무시했다. 밥을 주기는 커녕 웃어주지도 않고 물도 안 주고 나가라고 소리쳤다. 거지는 집 안을 둘러보다가 마당 한쪽에 토끼장이 있는 것을 조았다. 그는 토끼에게로 다가갔다. 옆에 있던 풀을 토끼에게 주었다. 토끼는 풀을 먹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행복이다.

이것이 초등학교 국이 교과서에 삽화와 합계 실린 글이다. 행복이 나쁜 옷으로 변장을 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어떤 빚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내쫓았다. 그런데 토끼는 그를 보고 웃었다. 인간은 편견으로 완전 무장 되어 있어서 어떤 행복도 스며들 수가 없는 웃었다. 토끼는 갇혀 있는데도 평온하다. 토끼는 갇혀서도 태평스럽게 자신의 삶을 영의하고 있는데, 사람은 토끼를 가둬 놓고도 좌불안석이다.

그때부터 어린 나는 토끼를 사랑하며 인간을 토끼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삽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다 자라서 교복을 벗게 되면 거적을 쓰고 다녀야지. 그러면서 옷 차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토끼만도 못하다고 비웃어 야지.”

지금도 토끼를 좋아한다. 토끼를 그러면 행복을 받아들이던 유순한 토끼가 생각난다. 토끼는 단순해서 다가오는 행복을 받아들이지만 인간은 들끓는 욕망이 뒤엉켜서 복이 와도 알아보지 못하고 내쫓는다. 토끼보다 못한 인간들.



코끼리

처음 코끼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릴 때 배운 국어책에서는 육지에서 제일 큰 동물인 코끼리와 바다에서 제일 큰 동물인 고래가 줄다리기를 했다. 줄의 가운데가 끊어져서 둘의 싸움은 주가 더 센지 경판이 나지 않았다.

책으로만 코끼리를 보고 얼마나 상상을 크게 했던지, 실제로 본 코끼리가 너무도 작아서 실망했다. 내 상상 속에서 코끼리는 육삼 빌딩 높이에다 그 높이의 세 배 정도의 길이를 가졌는데, 내 눈으로 본 코끼리는 겨우 일층 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실제로 코끼리를 보면 인제나 측은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철책에 갇힌 채 몸에 배설물을 달고 있는 코끼리를 보면 더욱 측은한 생각이 든다. 저건 아니다. 저건 코끼리가 아니다.

코끼리는 크고 무겁다. 무거운 몸으로 천천히 걸어 다닌다. 코끼리는 초식동물이지만 사자나 표범 같은 육식동물들도 덤비지 못한다. 그 점이 좋다. 날카로운 이빨과 재빠른 행동으로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들도, 그 순한 동물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그 점이 좋다. 넓적한 이빨로 나뭇잎을 씹어 먹는 순하고 느릿느릿한 동물을 사자가 잡아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코끼리는 내게 느리게 사는 선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풀만 먹고 사는 성스러운 존제들. 코끼리는 큰 무리를 지어서 초원을 가로지르며 살아야 한다. 가족들로부터 한 마리 씩 떼어내서 동물원에 가위 놓은 코끼리를 보면 화가 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나마 그들을 자유롭게 풀밭에 놓는다. 나는 화가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화폭으로 옮겨진다. 때로는 화면에 가들 차게 코끼리를 그려서 코끼리 본래의 존엄성을 표현해주고 있다.



헤엄치는 코끼리

물 속에서 헤엄치는 코끼리를 본 적이 있다. 수중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었는데, 파란 물의 여백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뭍에 사는 동물이어서 물을 두려워한다. 코끼리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코끼리가 물 속에서 그토록 자연스럽고 태평스럽게 떠 있는 모습을 보고 날랐다. 코끼리는 헤엄을 잘 칠 뿐만 아니라 물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사진에서 물의 여백이 넓은 것은 코끼리가 헤엄치고 있는 물이 마치 바다처럼 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 육중한 몸이 풍선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내가 가진 물에 대한 공포가 그 사진을 보는 기쁨을 더욱 크게 했다. 코끼리가 부러웠다. 코끼리는 참 좋겠다. 틀림없이 코끼리는  날 때부터 헤엄을 칠 중 알았을 것이다. 다리가 네 개 있어서 땅에서만 걸어 다리고, 꼭 나처럼 땅에서만 사는 동물인 줄 알았는데 ….. 그 사진을 보자 코끼리는 나와는 아주 다른 존재임을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나도 태어나자마자 물에 던져졌으면 코끼리처럼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처 능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엄마의 물에 대한 공포가 나에게로 유전되어서 나도 엄마처럼 물을 보면 벌벌 떤다. 코끼리 엄마가 우리 엄마보다 더 훌륭하다. 우리 엄마도 코끼리 엄마처럼 무식하고 용감했으면 나도 코끼리처럼 물 속에서도 행복할 텐데.





칼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에게는 12 년에 한 번 신검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 기회는 단 두 시간 뿐이다. 그 시간을 잘못 쓰면 신검을 만들기 의해 또다시 12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날이 바로 닭의 해 닭의 날 닭의 시이다. 칼 만드는 사람은 12년동안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모들 준비를 해둔다. 닭은 그렇게 칼과 암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새벽에 닭이 운다. 닭이 울면 그 시간부처 낮이다. 그렇게 밤과 낮을 칼로 자르듯이 닭이 구분한다. 어둠과 밝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버릴 것과 취할 것, 죽일 것과 살린 것, 질서와 혼돈. 닭은 이 모든 것들을 확연하게 칼로 자르듯이 분별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닭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전주의 눈과 같다. 오리는 발에 물갈퀴가 있어 순해 보이고 선도 부드러운데, 닭의 모든 선은 말할 수 없이 날 카롭고 강력하다. 눈은 더욱 기개에 차 있다. 전쟁터지로 무장된 무인의 눈이다.

           

히아신스

3월 초 현관 옆 꽃밭에서 히아신스가 피어났다. 하얀 색, 분홍색, 보라색 여러 송이가 피어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날 나의 미국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꽃밭을 보더니 “히아신스!” 하고 소리치면서 대뜸 무릎을 꿇고 엎드려 향기를 맡았다. 신에게 경배하듯이 히아신스에게로 몸을 낮춰 한참 동안 냄새를 맡고 일어 썼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나와 똑 갖은 사람인 것을 느꼈다. 히아신스는 서양의 풀인 데도 우리나라에 와서 그토록 진한 향기를 뿜으면서 피어 있었다. 나는 미국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히아신스를 보고 감탄하기 전까지는 그 꽃이 서양 꽃이라는 걸을 잊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그냥 꽃이라고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우리와는 다른 발음과 억양 꽃을 예찬하며 엎드렸을 때 ‘아, 이것이 그들의 꽃이었구나. 그런데도 꽃에 대한 느낌이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미국인 친구를 처음 만남 건 실험영화를 만들어서 발표회를 가질 때 였다. 그때 나는 가방에 팸플릿을 가득 넣고 신물사를 돌아다니면서 나누어 주었다. 그때 나는 가방에 팸플릿을 가들 넣고 신물사를 돌아다니면서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 시청 부근 코리아해럴드 사 앞을 지나게 되었다. 친구에게 말했다.

“어, 이것도 신문사잖아. 우리 여기도 들어가자.”

쑥 들어갔다.

신문사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웬 서양 여자 한 면만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 여자에게 팸플릿을 꺼내 주면서 “신문에 내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그 여자는 팸플릿을 보더니 선선히 “그러죠”라고 하면서 우리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사진 기자를 불러 사진도 찍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태어나서 찍은 사진 중 가장 근사하게 나왔다.

미국인 친구는 일본의 도쿄에서 그 신문을 보고 나를 찾아 한국으로 왔다. 내가 실린 신문 하나만 달랑 들고. 그는 무작정 동부이촌동에 있던 카페 “장미의 숲” 에 가서 주인에게 신문을 내보이며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때마침 그 자리에 내 친구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지금 이 사람은 미국 공보원에서 그룹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공보원 화란으로 가면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미국 공보원 화랑 땅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짝 펴고 팸플릿을 접고 있었다. 그때 밀짚 색깔의 머리칼을 뒤로 묶은 꽁지머리 미국인이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김전선?”

“그래, 내가 김전선이다. 왜?”

우리는 만나자마자 떠들어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둘은 미친 듯이 떠들었다. 마침내 그는 우리 집까지 놀러 오는 사이가 되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조카들, 동네 사람들까지 그가 내 친구인 것을 다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 스무 변도 더 널러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글을 쓴답시고 집에 처박혀 습작하고 있었다. 그가 진화해서 놀자고 하면 나는 습작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면 그는 무작정 집으로 노러 왔다.

나중에는 그가 숙소를 집 근처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목욕 시절만 갖춘 싸구려 여관에서 잠잤다. 눈만 뜨면 그는 우리 집으로 왔다. 그래도 수박이나 복숭아 같은 과일을 사들고 올 줄도 알게 되었다. 그가 오면 엄마가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때는 밥상에 주욱 둘러앉아서 밥을 먹던 칠십 년대 초반이었다. 엄마는 겸상을 차려주었다. 우리는 상을 들고 마루에 가서 마주모고 앉아서 밥을 먹었다. 흰 쌀밥에 멸치볶음, 풋고추와 마늘을 넣고 졸인 쇠고기 장조림,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 깍두기, 워 이런 음식을 그는  잘도 먹었다. 젓가락질도 잘했다. 어떤 때는 밥상을 옥상 위에까지 들고 올라가서 흰구름을 바라보면서 한 시간도 넘게 떠들면서 밥을 먹었다. 꽤 오랫동안 좋은 친구도 지냈다.

내가 집 나가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사이에 우리 교류는 언제 인지도 모르게 끊겨버렸다. 요즘도 히아신스를 보면 마도 그때의 그처럼 “히아신스”라고 발음한다.



세 겹의  눈

나는  세 겹으로 본다.  나는 언제든지 물체를  볼 때 세 개, 또는 그 이상의  코드로 읽는다.     분홍의 눈으로 보면 식물의  줄기도 분홍으로 보인다.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식물둘은 모두 분홍 줄기에 붉은 잎사귀와  붉은 꽃을 달고 있다.  사람들이 붉은 색에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한 반항으로 식물을 붉게 그렸다. 그 무렵에는 학교에 리포트를 낼 때도 편지를 쓸 때도, 심지어 사람의  이름까지도 붉은 색으로  썼다.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조금만 자신들과 다르면 단순히 미쳤다고 표현해버린다. 나는 나를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을 단세포적이라고  무시했다. 또 한편 그들의 단순함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인간을 도발 시키는 붉은  색으로 나는 최상의  평화를  표현하고 싶었다. 붉은 줄기와 붉은 잎과 붉은 꽃을 가진 무수히 많은 식물들을 그렸다. 초록색 식물보다 더욱 평화 스럽게 그려졌다. 나의  성취감은 혼자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듯했다.

거의 언제나 내 눈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쉽게 현실을 이탈하기도 하고, 현실을 겹겹이 포갰다가 한 번에 뭉개 버리기도 하고,  그림자가 있는 그 뒤편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나는 세 겹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