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슬픔이 택배로 왔다

정호승

택배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낙수(落水)
 
절벽 끝에 떨어지는 폭포는 아니다
절벽 끝에 부서지는 파도도 아니다
해 뜨기 전부터 풀잎에 맺혀
나를 기다리는 아침 이슬도 아니다
가을비 오는 날
낡은 아파트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늦가을의 눈물이다
바쁘나 내가 니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
그런데 니가 너무 바빠서
말끝을 흐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늙은 눈물이다
아버지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러 바쁘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흙이 된 아버지 앞에 떨구는

참회의
때늦은
눈물이다



흙탕물
 
흙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도도히 계곡을 휩쓸고 지나가던 여름날의 흙탕물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흙탕물이 맑아지려면 내가 먼저 맑아져야 하고
묵상의 바닥에 고요히 무릎을 꿇어야 하므로
흙탕물에 새벽별이 뜨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흙탕물이 흙탕물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
내 일찍 당신과 만나 한 몸을 이루었듯
흙탕물도 흙과 물이 만나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미워했을 뿐
흙은 물을 만나 더러운 흙이 되는 게 아니다
물은 흙을 만나 흐린 물이 되는 게 아니다
흙탕물이 튀어서 내 마음이 더러워진 적은 없다
한때는 분노와 증오의 붉은 흙탕물이 되어
내가 썩어간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흙탕물이 흙탕물 그대로 있는 게 아름답다
모내기를 끝낸 저 무논을 보라
물은 흙탕물이 될 때 비로소 흙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흙은
흙탕물이


비로소
물에서
모를
키운다



소금
 
모든 설탕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설탕의 달콤함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달콤함의 유혹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유혹의 죄악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모든 불의가 소금이 된 소금이다
불의의 분노가 소금이 된 소금이다
분노의 증오가 소금이 된 소금이다
증오의 칼날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모든 죄인의 죽음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죽음의 절망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절망의 희망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희망의 먼지가 소금이 된 소금이다
 
모든 눈물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눈물의 기도가 소금이 된 소금이다
기도의 축복이 소금이 된 소금이다
축복의 감사가 소금이 된 소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