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요트의 선창 위로 검은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나와 리는 501 부두에서 유기농 코카인을 정제하고 있었다. 리는 등이 유연하고 팔다리가 튼튼했다. 고양이처럼 담을 넘었고 도벽이 있어 항구 주변을 돌며 보이는 건 다 훔쳤다. 마약중독이 된 것도 훔친 물건 중에 캔-D가 있어서였다. 캔-D는 코카인과 실로시빈, 세르그산, DMT, MDMA 따위를 정제, 합성해 만든 것으로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세 배인 꿈의 약물이었다. 정품은 비싸서 살 수 없지만 다들 야매로 만들어 주사했다. 오픈소스 드러거들이 제조법을 공개한 덕분이었 다. 건강에도 문제없었다. 문제는 중독이 아니라 중독 제어다. 리가 말했다.
게다가 이 코카인은 볼리비아에서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수익의 20퍼센트가 저소득층의 교육 프로그램에 쓰인다는 뜻이지.
착한 마약이네?
그렇지?
나는 택배 기사로 일하며 쏠쏠한 일 뭐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처지였다. 리가 훔친 물건들을 팔기도 했지만 수익은 하찮았다. 경쟁업자가 너무 많아 헐값에 넘기지 않으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꿈은 작가였다.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고 번역문을 올리고 일기도 썼지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글에 대해 할 얘기가 있으니 메일 주 소를 알려 달라는 거였다. 신이 나서 알려 줬다. 곧 메일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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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노바스페이스에 소설을 연재하라고 했다. 노바스페이스는 MR에서 운영되는 가상 텍스트 플랫폼이다. 요즘은 다들 그것만 한다고 했다.
난 몰랐어.
당연하지. 담 달부터 유행이거든.
담 달에 유행할 예정이라고?
아니. 유행했어. 담 달에.
리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음 달에 유행할 걸 어떻게 알아? 시간 여행이라도 하는 거야? 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이 답답아.
가상 화폐가 왜 돈이 되는지 알지?
어……. 아니, 몰라.
블록체인이 있잖아. 여기 노드들이 있고. 알고리즘에 따라 합의하면 그게 사이버 장부에 기록되니까 돈이 되는 거야. 노바스페이스도 마찬가지야. 블로거들 사이에 어떤 텍스트가 현실이라고 합의되면 현실이 되는 거야.
음…… 그럼 글만 쓰면 다 이루어지는 거야?
그건 아니지. 합의에 참여하기 위해선 자격을 취득해야 돼.
어떻게 취득하는데?
작업을 증명해야지.
작업은 어떻게 증명하는데?
…….
리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검보랏빛 대기의 불연속면에서 전하를 띤 바람이 불어왔다. 미세한 물 분자 알갱이들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리는 캔-D 제조 키트의 파이프에 유기농 코카인을 넣고 급속 가열했다.
우선 다음 일곱 가지를 기억해. 리가 말했다.
첫째, 인사를 잘하자.
둘째, 합평에는 열린 태도.
셋째,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 마세요.
넷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다섯째, 쓴 물건은 제자리에.
여섯째, 꽃을 꺾거나 밟지 말고.
일곱째,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지 말기.
리의 혈관 속에 들어간 캔-D가 벌써 약효를 내고 있었다. 어젯밤에 머신건을 훔쳤는데 총알이 없잖아……. 팔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거세졌고 수류탄만 한 빗방울이 쿵쿵 떨어졌다. 바닷물이 요트를 집어삼켰고 빗물 사이로 지느러미를 펼친 가오리가 녹색 형광물질을 번쩍이며 날아다녔다. 나와 리는 부둣가의 기울어진 콘크리트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전봇대의 전단이 펄럭이고 있었다. 미신 파괴자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신 파괴자들에 대해서 좀 알아? 오호츠크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아니…… 나는 입속으로 들어가는 차가운 빗방울들을 뱉으며 소리 질렀다. 미신 파괴자들에 대해 아냐고! 오호츠크해가 어쨌다고!?
센티멘털 에듀케이션(Sentimental Education)
프랜은 효창공원에서 용산까지 걷기로 했다. 카카오 맵에는 33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온화한 바람이 불었고 형태가 선명한 구름이 해를 적당히 가렸다. 미세 먼지는 좋음을 가리켰다. 프랜은 일상적인 용어에서 혼란을 느꼈다. 미세 먼지 농도가 낮아서 좋다는 의미를 왜 미세 먼지 좋음, 최고 좋음으로 표기할까. 사람들은 생략을 어려움 없이 이해한다. 프랜은 반대였다. 아무것도 생략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생략해선 안된다. 아무것도 생략할 수 없다.
프랜의 목적지는 예전 용산 미군 기지 부지에 생긴 메타북스라는 서점이었다. 3시에 면접을 보기로 했다. 일하고 싶진 않지만 대안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할 예정이었고 집에서 지원을 끊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배우나 드라마 작가가 되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어야 했지만 원룸에서도 쫓겨날 판이었다.
프랜은 영문과를 다녔고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수업은 듣지 않았지만 소설과 희곡을 좋아해서 도서관과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20대 중반까지는 배우를 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대신 그가 심심풀이로 쓴 글을 본 친구들은 무릎을 쳤다. 프랜은 그 길로 한겨레 교육문화센터에 드라마 수업을 등록하고 대본을 썼다. 프랜이라는 필명도 그때 정한 것이다. 왜 프랜이죠? 강사가 물었다. 그는 10년 전 수목 드라마를 만들었지만 역사 왜곡 논란으로 조기 종영을 맞은 후 사설 아카데미로 직행한 불행한 드라마 작가였다. 이가 없어 발음이 부정확했고(임플란트는 의료 산업의 음모라며 거부했다.) 손톱을 바싹 깎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프랜은 시트콤 「프렌즈」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했다. ‘프렌’이라고 하면 어색해서 ‘프랜’으로 했어요. 한국어는 아이가 자연스럽죠. 강사와 수강생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어이나 아이나……. 어쨌든. 「프렌즈」를 좋아하나 봐요? 프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프렌즈」가 제일 성공한 드라마니까요. 수강생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기지? 프랜은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쫄보들. 나는 시시한 드라마나 만들면서 시간을 죽이진 않을 거야. 바로 OTT로 직행이다.
프랜이 쓰려고 한 작품은 레즈비언 택배 기사의 일상을 담은 시트콤이었다. 자전적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사실은 함구했다. 장르는 SF. 사람들에겐 「에일리언」 시리즈와 유사한 구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1편은 공포와 불안, 2편은 세계와의 투쟁, 3편은 절망과 투항, 4편은 부활과 영원. 에일리언/딜리버러 말한다. 우리는 우리 밖의 존재다. 강사와 수강생들은 내용을 납득하지 못했다. 시트콤이라면서요?
큰소리쳤지만 막상 드라마를 쓰기 시작하니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스토리를 어떻게 전개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없는 일을 어떻게 말하지? 에세이처럼 끄적였던 글과 는 문제가 달랐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며 몇 년을 날렸다. 대학원으로 피신할까 생각했지만 먼저 대학원에 들어간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대학원생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돼. 학교에 불을 지르거나 하버드를 가거나.
지우는 어떻게 하면 학교에 불을 지르고도 법망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 첫째, 인명 피해가 없을 것. 둘째, 캠퍼스 전체를 태울 것.
지우는 외고와 서울대 학부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을 다니는 엘리트였다. 지도 교수와 가족, 대학원 동료들은 하버드에서 박사 과정을 하라고 종용했다. 프랜이 봤을 때도 하버드에 갈 것 같았다.
내가 하버드에 가면 나를 밟고 앞으로 나아가라.
뭐래.
그거 알아? 대학원생들은 드라마만 봐.
지우가 말했다. 드라마를 써야 한다는 거였다. 초기 희랍철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교수님도 수업 시간마다 드라마 얘기를 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으로 우주를 설명하지요. 규정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의 질서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본성들이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도 말합니다. 니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뭐래…….
프랜은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다. 유년 시절에 이미 늙어 버렸다고 생각했고 또래 친구들이 애같이 느껴졌다. 육체와 정신, 세계가 각기 흩어져 어긋난 타임라인 속에 흐르고 있었다. 때로는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능력에 비해 성공이 늦게 찾아오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성공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건 성공하고 난 뒤에 할 말이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요트의 비치 체어에 누워 위성 전화로 이렇게 말하는 거다. 돈은 그저 숫자일 뿐이야. 갑판에는 프랜의 연인과 연인의 연인과 연인의 연인의 전 연인이 선탠을 하고 있다. 프랜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대서양의 물결을 느끼며 파라솔 그늘 아래 책을 읽는다. 연인들의 살갗이 자외선에 지글지글 타는 소리와 청새치가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진짜 행복은 이런 소박한 일상에 있지……라고 지껄이면서…….
문제는 이런 꿈에 도달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왜 자신이 이런 꿈을 꾸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한심한 영화나 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거겠지. 지우가 말했다. 가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몽상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선유도에서 난지 공원까지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UN 평화 공원 벤치에 앉아 인공 호수를 바라보며 새해 다짐 따위를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뭐가 되어야 할지 어떻게 되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NE: 면접
스키폴 공항에서 708편 비행기에 탑승. 면접을 비행기 안에서 본다고 함. 뭐 하는 짓인지. 이코노미 석에는 나 같은 면접자들이 간격을 두고 앉아 있다. 비행기는 인도양을 지나 충칭에 도착할 예정. 그러니까 네덜란드에서 시작해 제3 차이나에서 채용.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물론 면접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잭콕을 한 잔 마시고 알딸딸해짐. 뒷자리의 사내가 말을 건다. 광각 선글라스를 끼고 시종일관 고개를 까딱이는 조증 환자 같은 놈인데, 노랫말 같은 걸 중얼거렸다. 스윗 스윗 지저스…….
미신 파괴자들에 대한 소문은 들었죠? 면접에서 떨어진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려야 한답니다. 착륙하기 전에요.
착륙하기 전이라니. 어디서 또 가짜 뉴스를 듣고 왔나 보군. 나는 속으로 외친다. 꺼져, 이 멍청아. 그러나 착하게 대함. 내 원칙은 간단하다.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그러나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는 말라. 사내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는다. 우리가 비행기에 타기 전 동의한 서류에 면접 도중 사망 및 상해 사고에 대한 모든 내용이 있다나. 자신은 그걸 다 읽어 보고 사인했단다. 비데를 설치할 때도 약관을 모두 읽어 본다고, 동서가 변호사 출신 오디오 수리 기사인데 작년에 폭발 사고로 목숨을잃었다고 했다. 폭발 사고요? 사내가 광각 선글라스를 까딱하고 내렸다. 종종 있는 일이죠. 노즐 성능을 업그레이드 하려고 배수관에 나노 크기의 세라믹 입자 및 카본 파우더를 결합한 패시브 와이어 코일을 설치했거든요. 그가 나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융.
낙하산은요? 사용해 본 적 있으세요?
아……. 사내는 선글라스를 올려 쓰고는 기내 잡지를 펼친다. 스윗 스윗 지저스……. 나는 사내의 잘생긴 머리통을 보며 중얼거린다. 취미가 스쿠버다이빙이세요? 사내는 대답이 없다. 우리의 스몰 토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왜지? 내가 재미없는 반응을 보였나. 면접자들끼리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한 걸까. 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깊은 실망을 느낀다…….
면접은 퍼스트 클래스에서 진행됐다. 콘도르가 그려진 점퍼를 입은 남자가 방금 면접을 끝내고 나왔다. 상기된 얼굴이다. 주머니에서 캔-D를 꺼내 목덜미에 주사. 능숙한 손놀림, 정품 인증. 셔츠를 풀어헤치고 위스키를 들이붓는다. 문 열림 경고등이 켜지고 귓가에 팽창된 공기가 부딪치는 굉음이 들린다. 곧 창밖으로 허공을 날고 있는 면접자가 보인다. 그의 안전을 기원하며 잭콕을 한 잔 더 시켰다. 졸리기 시작. 망할…… 면접이 코앞인데……. 스튜어드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비행기 날개 끝에 걸려 퍼덕거리는 콘도르 점퍼가 보인다.
퍼스트 클래스의 커튼을 걷고 들어가니 세 면접관의 홀로그램이 있다. 면접관들은 현장에서 뛰고 있는 미신 파괴자들이다. 각국의 정보기관에서 차출된 일급 수사관들로 면접을 통과하면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생각만큼 흥미로운 일은 아닙니다. 아랍계 여자 수사관이 말한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거라고 말이다. 이 바닥엔 미친놈들 천지거든요. 미신 파괴자는 21세기 초 세계적인 팬데믹을 겪으며 창설된 초국가적 기관이다. 바이러스보다 심각한 건 바이러스에 대한 소문이다. 미래의 문제는 환경도, 기아도, 전쟁도, 팩트도 아닌 “현실”(손으로 따옴표 그림. 귀여움.)이라고 수사관이 말한다. 미신파괴자들이 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아요. 음모론을 수사하고 음모론자를 수사하고 가짜 뉴스, 미신, 광신도를 퇴치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가 뭔지 아세요?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긴 동양계 남자 수사관이 묻는다. 글쎄요. 문득 창밖으로 허공을 날고 있는 면접자가 보인다. 낙하산 없음. 흠……. 아까 본 장면인데. 점퍼에 그려진 콘도르가 날갯짓을 한다. 분홍빛 머리가 가죽을 뚫고 나오고 여러 마리로 분열하는 콘도르가 비행기 날개에 부딪혀 튕겨져 나간다. 중독 제어. 나는 리가 한 말을 떠올린다. 핵심은 그거죠. 중독 제어.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아랍계 여자가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현실을 관리하는 겁니다. 기관 내부에서도 의견은 갈린다. 현실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미신 파괴자들의 수사로 인해 현실이 구성되는 거라면? 우리가 박스를 열어 현실에 영향을 주는 거라면? 현실이 여러 개라도 된다는 뜻인가? 동양계 수사관의 홀로그램이 번득거리며 두상이 길게 늘어난다. 첫 번째 문제는 음모론을 수사하는 것과 음모론자를 수사하는 일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법체계의 관점에서는 진짜이거나 가짜지 둘 다일 순 없습니다. 수사관의 두상이 물결처럼 흔들리며 여러 개로 분열한다. 전형적인 양자역학적 문제죠…… 음성이 다중 레이어의 파동으로 갈라지고…… 유죄와 무죄의 구분이 불가능한 지대……를 다루기 때문에…… 미신 파괴자……들은 사법기관과 상충한다…… 각 레이어들이 반향을 일으키고…… 식별과 색출…… 물리적 살육의 현실적 가능성…… 인류를 입에 담는 자는 사기꾼이다……. 오오. 흥미로운데. 나는 중얼거린다. 현실 중독. 현실 제어. 두 단어가 (네 단어인가?) 반들반들한 유리 벽 안의 3D 패널에서 스물네가지 색상의 빛을 발하며 회전한다. 문제는 그거군요. 비행기 흔들림. 우박이 양철통에 부딪치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나는 수사관 중 누군가는 아바타일 거라고 생각한다. 마리아나스 웹의 사후 거래 사이트에서 판매자로 본 적 있는 인물이다. 별점 한 개 반. 후기: 반려견의 영혼을 주문했는데 코만 왔어요. 판매자 답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나요?
SE: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메타북스에 처음 온 사람은 누구나 그 규모에 놀란다. 메타북스가 속한 복합 콤플렉스 단지인 메타플렉스는 용산에 있지만 용산보다 규모가 크다. 건축과 지정학, 지질학, 4D 매핑, GIS, 메타피직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의문을 가질 법하다. 부분이 전체보다 크면 어떻게 부분이 전체에 속할까. 이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다. 우리의 감각과 지각은 자연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당신이 포티니 마르코폴루칼라마라의 토포스 이론에 대해 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메타플렉스는 여타 대형 몰과 달리 지붕이 없다. 1851년 런던박람회의 조셉 팩스턴으로부터 시작된 미래주의적 관습에 의해 모든 건축가와 계획가들은 외부 자연으로부터 격리되고 보호되는 공간을 상상하고 창조했다. 온도와 습도가 완벽히 통제되고 관리되는 시스템. 그러나 mall은 본래 걷기 좋은 산책로라는 뜻이다. 메타플렉스 프로그래머들은 미래의 몰이 진짜 mall이 될 거라고 예측했다. 몰이 화려해질수록 사람들은 낡고 녹슨 옛 동네에 낭만을 느끼고 디지털이 일상이 되면 아날로그의 가치가 상승한다. 메타플렉스는 거대한 지붕 아래 조성된 억지 정원이 아니라 진짜 가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자연의 이치를 감각하는 장소를 제안한다. 메타플렉스의 목표는 자연과 구분 불가능한 인공을 현실에 겹치는 것이다. 전 지구에 몰적 층위를 공존시키기. (메타플렉스 웹사이트의 nature 항목 참조.)
메타플렉스의 중요한 특징은 경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1967년 국제연합에서 승인한 외기권 우주 조약(Outer Space Treaty)에 따라 각 나라의 상공인 우주 공간은 영공에 포함되지 않으며 대기권을 벗어난 인공위성, 스페이스십과 탐사로켓의 영역은 메타플렉스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가정된다. 메타플렉스의 모회사인 MCU(Meta Culture Universe)의 지분 일부를 버진갤러틱홀딩스가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를 증명한다. (MCU는 아직 IPO 전으로 정확한 지분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표상의 경계 역시 마찬가지다. 아울렛이나 놀이동산, 행정구역처럼 어디까지가 메타플렉스의 영역이라는 표시는 없다. 벽도 없고 담이나 철망 같은 울타리도 없다. 메타플렉스는 당신의 땅과 당신의 빌딩, 당신의 점포를 환영한다. 경제 신문은 메타플렉스의 대지 면적이 오픈 반년 만에 1.5배 확장됐다고 보도했다. 주위의 건물주나 토지주, 자영업자들이 자발적으로 메타플렉스에 참여했다. 메타플렉스에 속하게 되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 인테리어? 부대이익? 회원 카드? 배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메타플렉스의 일원이라는 사실이다. 메타플렉스가 좋은 이유는 메타플렉스이기 때문이라고 프로그래머들은 설명한다. 메타플렉스란 그곳에 있지만 더 이상 그 자체의 이름으로 현전하지 않는, 그 자신의 실재로는 더 이상 가시화되지 않는 실재이자 개념으로 내용이나 형태 없이 명명 그 자체로 내재하는 어떤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vision 항목 참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메타플렉스에는 중심이 없다. 오픈과 함께 코스메틱 매장, 카페, 플라워숍, 편집숍, 공유 오피스, 레코드점, 갤러리, 빈티지 마켓, 국제적인 경매사, 과자점, 자동차 극장, 피트니스 센터, 종교시설, 레지던스, 대안 공간, 캠핑장, 회원제 스파 등이 메타플렉스의 산책로와 정원, 호수와 광장 사이에 입점했으며 유일한 직영점인 메타북스도 오픈했지만 어느 곳도 지리상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메타북스가 메타플렉스의 유일한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간이 특정 벡터 없이 무한히 확장한다면 어떻게 중심이 존재할 수 있을까. 메타플렉스는 이를 가상의 중심이자 부재하는 중심, Invisible Forc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메타북스는 force-core 개념의 실천을 위해 메타플렉스 전체 공간에 산개되어 있다. 6층짜리 메인 서점과 사무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노드일 뿐이다. 메타플렉스 곳곳에 소규모 업장과 부스, 책장 형태로 노드들이 퍼져 있으며 바닥에 떨어진 단 한 권의 책이나 책이 아닌 책의 콘텐츠를 운반할 수 있는 디지털 신호 역시 노드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책의 흔적, 책의 신호, 책의 찌꺼기, 책의 정신, 책과 관련된 모든 정보 흐름의 엔트로피가 메타북스의 촉수가 된다. 프로그래머들은 이를 두족류의 생물학적 원리에서 착안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진이 여섯 마리의 갑오징어에게 실시한 스탠퍼드 마시멜로 실험에서 갑오징어는 자제력과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열 개의 다리로 분산된 뇌가 중앙집권적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목표를 달성한 것이죠. (《SCI News》의 닥터 슈넬 인터뷰 참조.) 메타북스의 구조는 메타워크 (META+NETWORK)의 원칙을 따르며 메타플렉스는 메타워크의 창발성에 의해 이종 정보적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조직됩니다. 지금까지 어떤 설계 회사나 기관도 도전하지 못한 혁신적인 시도지만 안타까운 건 이와 같은 도전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인건비가요. 드론이나 로봇이 완전한 기능을 하기 전까지는 인간이 모든 노드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무척 아쉬운 일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