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첼란, 「베르너 베버에게 보내는 편지」(1960)
시, 그것은 선물이기도 합니다.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 운명을 동봉한 선물.
파울 첼란, 「한스 벤더에게 보내는 편지」(1960)
사과 알처럼 눈동자 여물었다는 그의 두상은
우리는 들은 적 없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토르소는 여전히 등잔처럼 빛을 발하고,
등잔 속 시선은 오로지 사랑을 향해,
가만히, 빛난다. 아니라면 너는 그의 가슴
곡면에 눈부실 리 없고, 살며시 비튼
허리, 생식의 중심으로
미소를 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이 돌덩이는
투명하게 깎아지른 어깨 아래 마모되어,
맹수의 모피처럼 윤기를 내뿜지도 않고,
윤곽선을 따라 별처럼 분광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토르소가 너를 바라본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 (1908)
시는 선물이라고 파울 첼란은 확고하게 반복한다. 약 두 달 간격으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첼란은 시와 선물의 동일성을 되풀이해 읊는다. 시라는 말은 한 번 울릴 때마다 무수한 선물들로 메아리친다. 시는 선물 . . . 선물입니다 . . . 선물 . . . 시는 선물 . . . 선물 . . . 선물입니다 . . .
이 편지들에서 첼란의 주요 수사법은 정의다. 시는 선물이다. 그런데 정의는 맥락에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물음을 전제하고 그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 시는 무엇인가. 시를 규명하는 물음에 첼란은 사전이나 시론서에 기재되었을 법한 기술적인 정의가 아니라 메타포로 응답한다. 메타포는 언제든 우리를 다른 물음들로 이끈다. 시는 선물이라는데,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선물인가. 더 나아가, 선물은 또한 무엇인가.
시는 무엇인가. 그리고 선물은 무엇인가. 누구든 이 물음들에 대답할 수 있다. 시와 선물에 각자의 정의가 있다. 아, 아니다, 나는 없구나. 그러니 앞의 단언은 철회하는 수밖에. (왜 삭제하고 다른 문장으로 바꾸지 않느냐고? 철회라는 단어를 한 번쯤 꼭 써보고 싶었으니까. 우아하고도 애상적이다. 언술의 내용은 취소하되 화행의 기억은 보존한다. 그러므로 철회는 오류를 자인하는 가장 예의 바르고 세련된 방식이 아닐까. 게다가 나는 고질적인 삭제 습관을 교정하고 있다.) 두 물음에 내가 가진 답은 밀도 높고 적확하게 영근 하나의 메타포라기보다는 최종의 형상을 갖추지 않은 채 여전히 생성, 변태, 진화 중인 말의 한 단계거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사례들일 뿐이다. 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움직이는 말. 이것이 현재까지 내가 도달한 시의 잠정적 정의다. 움직이는 말을 미지의 메타포로 형상화하려면 아직 떨쳐낼 피막들, 다시 해체하고 접합해야 하는 관절들, 덧붙일 날개와 더듬이와 섬모가 많다. 그렇다면 선물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라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타인들과 실제로 주거나 받은, 그러지 못했던, 또는 그러고 싶은 선물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뿐, 그것들의 공통 속성을 추출하고 응축해서 간명한 답을 내놓기란 불가능하다는 예감이 든다. 선물은 각각 다르다.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왜 주고 받았는지, 왜 그러지 못했는지, 왜 주고 싶고 받고 싶은지, 나는 그 상황, 타인, 사물 들을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절대적인 개별성이 선물에 대한 나만의 불가능한 정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첼란에게 시는 선물이다. 그렇다면 첼란에게 선물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고 가는 사건은 어떻게 일어나고 그 사건에 연루되는 행위자들은 누구인가. 시인이 시를 선물이라 말할 때, 우리는 막연히 선물을 주는 사람은 시인이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독자라 여기게 된다. 시인은 우리에게 시를 선물하고,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받는다. 그러나 젤란의 말을 주의 깊게 읽으면, 놀랍게도, 이런 통념적 상상과 달리 시 선물을 받는 사람은 시인 자신이다. 아니, 시인이라는 직업적 자의칙이 개입하지 않은, 미리 욕망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은 무념의 상태에서,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 선물을 받는다. 이것은 진정 경이로운 사건이다. 주의 깊은 존재는 시를 쓰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불가피한 선물로 받음으로써 운명적으로 시인이 된다. 첼란에게 시가 생성되는 방식은 계시적 영감에 의해서도 아니지만 발명 같은 적극적인 기술의 사용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에게 시가 오므로 그는 그것을 받는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잘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받은 것을 잘 썼을 따름이지요)” 라는 겸양은 그의 시작 방식을 함축한다. 이에 따르면, 선물받은 시의 정식 사용법은 받아쓰기가 될 것이다. 내게 왔기에 들은 말을 종이 위에 옮기기. 말을 그것과 닮은 다른 말로 옮기는 번역은 받아쓰기의 한 형식이다. 시 선물의 수신자는 시의 겸허한 서기이자 번역인이 된다. 첼란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폴 발레리, 스테판 말라르메, 오시프 만델스탐, 세르게이 예세닌, 에밀리 디킨슨, 페르난두 페소아, 제라르 드 네르발 등 무수한 다른 시인들의 탁월한 번역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
첼란에게 시는 운명이 동봉된 선물이다. 독일어에서 “운명 Schicksal”은 동사 보내다 schicken 에서 파생되었다. 독일어권 문학에서 어원에 의거하여 시인의 운명을 미지의 신적 존재가 보낸 선물로 여기는 관습은 첼란 이전에도 있었다. 덜린의 『휘페리온」 (1797~1799)에 삽입된 『운명의 노래」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루친데」 (1799)가 대표적인 예다. 첼란의 텍스트가 편지인 것과 유사하게 덜린과 슐레겔의 텍스트는 둘 다 서간체 소설이다. 휠덜린, 슐레겔, 첼란은 각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한, 전혀 주어지지 않은, 의혹했으나 종국에는 받아들인 운명이자 시적 선물을 우편의 글쓰기로 전이 한다. 세 텍스트는 편지 형식을 차용하여 선물뿐만 아니라 시적 언어 자체에 내재한 우편적 속성을 현시한다. 시인은 자기가 받은 시적 선물을 사유화하여 독점하는 대신 편지라는 특수한 매체적 글쓰기를 통해 다시 선물로 발송한다. 시인 못지않게 주의 깊은 무명의 독자들에게로. 형용사 “주의 깊다 aufmerksam” 는 동사 “인지하다 merken”에서 파생되었다. 동사의 어근 “Marke”는 영어 “mark”처럼 기호, 부호, 표지 외에도 우표를 의미한다. 시, 시인, 독자 사이에 우편의 메타포가 순환한다.
시는 선물이다. 그런데 선물은 무엇보다 우편물이다. 특히 대면하지 않은 미지의 존재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면.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미지인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면. 그러므로 시 역시 우편물이다. 발송과 수취 사이에 놓인 시간을 측량할 수 없을지라도. 시는 선물이라는 말이 반세기가 지나 프랑스 국립도서관 기념품점의 우편엽서에 인쇄되어 누군가에게 닿았듯. 「자유 한자 도시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 (1958)은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이 삼단논법이 과히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할 것이다.
말을 현현하는 형식이자 따라서 본질상 대화적이므로 시는 유리병 우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가망성이 높지는 않지만, 언젠가 어디엔가 땅으로, 아마도 심장의 땅으로 물결쳐 닿으리라는 믿음으로 보내버리는 겁니다. 시들도 이런 식으로 길을 갑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갑니다.유리병 우편의 메타포는 선물 메타포에 담긴 시의 우편적 속성을 더욱 확연히 표출한다. 첼란에게 시적 사건은 발신인 불명의 선물을 수취하기를 넘어 그것을 유리병 속 전언으로 다시 발송하는 일까지 아우른다. 주의 깊게 행해야 한다. 그런데 주의 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기호, 흔적, 자취, 징표, 얼룩, 낙인을 지워버려야 할 오점이 아니라 시적 메타포로 인지하고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것들을 받아쓰고 번역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가 받아쓰고 번역한 선물에 새로 우표를 붙여 다시 발송하는 사람이다. 미지의 손으로부터 받은 메타포를 미지의 심장을 향하여 떠나보내는 사람이다.
선물의 메타포, 그러나 메타포야말로 선물, 한 마디 말에서 다른 한 마디 말로 옮아가는 우편물 그 자체, 포장과 우표를 무한히 갱신하며. 메타포를, 다른 말로 옮긴 말을, 다른 곳의 다른 사람에게 그것과 닮은 다른 말로 옮기는 사람이다. 스스로 메타포를 밀봉한 유리병이 되어 시간과 공간 멀리 헤엄쳐 떠나는 사람이다. 주의 깊은 사람은, 시인은, 번역인은. 손과 심장의 사람은.
*
타자의 언어와 부단히 접촉하면서 자기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번역은 기꺼이 수행해야 하는 업무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여러 기술적 정의가 있다. 그런데 번역이 생활의 일부인 사람은 누구든 동의하리라 확신하건대, 기본적으로는 고독한 작업인 번역을 마치 스승이 사라진 공방의 도제처럼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묵묵히 연마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은 원론적인 정의를 탈피하고 자기만의 메타포로 다듬어져 있으리라는 것이다. 번역의 신비로운 작용은 이것이다. 번역의 정의가 무엇이든 번역의 실천은 그것의 기술적 테두리를 넘어 우리를 미지의 메타포의 영역으로 이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일을 메타포로 소개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전적으로, 동어반복적으로, 번역은 메타포다. 말을 다른 말로 옮기는 일. 말을 그 말 너머로 데려가기. 번역은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이 시는 무엇인지 묻는 말에 자기만의 메타포로 응답하듯, 경험이 풍부한 모든 번역인은 번역은 무엇인지 묻는 말에 자기의 삶과 장인적 실천에서 생성된 자기만의 고유한 메타포적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번역인의 일생에서 구체적인 번역 결과물들보다 더욱 보람차고 뿌듯한 성취는 이 메타포의 형성이다. 번역인마다 갖고 있을 번역의 메타포들을 한자리에 모아 조경하고도 싶다.
나는 번역에 온전히 투신하지 않았지만, 타자의 언어들이 내 글쓰기에 불가결한 기반인 까닭에 나만의 번역 메타포가 몇 가지 생겨났다. 움직이는 말이라는 시의 정의가 불완전한 상태이듯, 번역의 메타포들도 아직 설익은 단계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지만.
내게 번역은 우선 악보를 해석하고 연주하는 음악적 수행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악기 연주에 전혀 재능이 없고 음악 감상자로서의 감각과 소양도 한참 부족하다. 악기를 배운 경험이라면 피아노로 시작해서, 청소년 시절에는 방과 후 활동으로 바이올린 단체 교습, 그리고 나이 들어서 잠시 첼로. 열의는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소질을 결핍했기에 연습곡이나마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음악은 공기나 물처럼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여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음악을 켜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야 비로소 그것과 헤어진다. 내일 또 만나. 한 글자도 읽거나 쓰지 않고 보내는 나날은 많아도 한 소절도 듣지 않고 지나는 하루는 거의 없다. 음악에 대한 내 특수한 사랑의 방식이란 마치 배내옷에 감싸인 갓난아기나 고치 속의 애벌레처럼 부드럽고 푹신한 소리 껍질에 나를 전적으로 내맡기며 의존하고 애착하기다. 말에서 드물지 않게 겪는 황량과 피폐를 음악 안에서 회복한다.
악보를 읽으며 곡을 파악하고, 활에 송진을 칠하고, 적절한 강도로 페그를 돌리며 조율한 다음, 운지판 위 정확한 위치에 손가락을 짚는 동시에, 현 위로 활을 놀려 깨끗하고 풍부한 소리를 켜내기. 서투른 손과 둔감한 귀 탓에 능숙하게 해낼 수 없었던 이 과제들. 내게 없는 음악의 감각은 번역으로 전이되었다. 몸에 침전된 교습 시간의 인상은, 신기하게도, 번역의 순간 다시 피어올라, 번역해야 하는 텍스트는 악보처럼, 기존의 번역본들은 다른 연주자들의 음반처럼, 번역에 착수하기 전, 나는 원본이자 악보를 분석하고 그것을 이미 실연한 다른 번역본 녹음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청취한다. 실제 음악을 연주하고 들을 때는 전혀 발휘되지 않는 청각을 사용하여 세심하고도 치밀하게. 상상의 귀로 텍스트가 발산하는 부연 소음들을 헤치며 번역의 톤을 조정하고, 불연속의 스케일에서 단 한 지점의 정확한 음정을 짚어내듯 무수한 오역의 위험 속에 가장 알맞은 표현을 골라내, 한 프레이즈, 다음 프레이즈, 틀리면 다시, 그러나 유연함을 잊지 말고, 배음의 공명은 어떻게 살릴지, 꾸준히 훈련을 진척하여 마침내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에튀드 한 편을 완수하는 것이다. 낯선 타인에게 들려주어도 부끄럽지 않도록.
시간, 주의력, 신실한 책임감을 들여. 켜놓은 음악 한가운데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작업의 일환으로 번역할 때마다 나는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을 견지할 것이다. 지루하고 힘들지만, 나로서는 그저 상상할 수만 있는, 긴 흑단 목과 크고 어두운 울림통의 악기가 그것을 오래 품어온 연주자에게 선사할 법한 뿌듯한 미감을 즐기며.
필요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동경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내가 좋아하는 너도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름 없는 그 빵집의 빵을 같이 먹듯. 그러니 부디 우리가 그 시를 함께 읽는다면. 문제는, 너는 내가 조금이나마 아는 말들을 모르니까, 태어나 처음 배운 말로 쓴 시만 읽는 너에게 오션 브엉의 첫 시집을 알려주고 싶은데, 브엉이 릴케를 어떻게 다시 썼는지 여기 좀 보아, 내게 블레이크를 들려준 너는 휠덜린과 노발리스 때문에 내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는 영영 모르고, 마찬가지로 내가 모르는 말을 아는 너는 그 말로 쓴 아름다운 시들을 모르는 내가 얼마나 안타까울지. 그러니 너는 내게 사포를 읽어주기를. 그리고 너는 내게 세이 쇼나곤을 읽어주기를, 옛날의 날씨를 기억하고 이야기하자. 아, 그리고 너는 우리 모두에게 앤 카슨을 더 많이 읽어주기를. 듣고 싶다. 번역의 의욕은 이렇게 생겨난다.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시를 나누고 싶다.
내가 말을 익히고 옮기는 까닭. 아름다운, 네가 모르는 말, 내가 알려주어도 될까. 이때 나는 악기 연주자라기보다는 베네치아의 종이 제작자가 된다. 되도록 안정적인 음색과 최선의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뜻밖에 생성되는 마음과 말의 즉흥적인 효과들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대리석지는 베네치아의 특산품으로서, 표면에 유성 안료의 결과 얼룩이 말 그대로 대리석처럼 현란하게 찍혔는데, 장정본의 겉표지나 속지에 주로 사용된다. 대리석지를 제작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넓고 얕은 사각형 수조에 물을 채우고 그 위에 색색의 유성 안료를 점점이 뿌린다. 안료는 물보다 비중이 낮고 표면장력이 약하므로 수면에 둥실 떠 연잎처럼 엷게 퍼진다. 겹겹이 포진한 기름 얼룩을 막대 빗으로 긋고 휘저어 대강의 무늬를 만든다. 때로 수조 벽을 건드려 힘을 가하면 물결이 일렁이고, 수면에 도포된 유막의 무늬도 물결에 따라 흔들린다. 힘과 운동의 결과로, 물과 안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은 각자의 층위에서 끊임없이 헤쳐 모이면서 지속적으로 미세하게 배열을 바꾸고, 이러한 운동의 가시적인 효과로서 안료는 물과의 접면에서 찰나마다 조금씩 다른 무늬 판의 연속체를 생성해낸다. 물결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느릿하게 부유하는 무늬가 가장 아름답게 이지러지는 찰나를 포착하여, 수조 위에 종이를 덮었다 걷어내면, 마술처럼 안료는 그 무늬 그대로 종이에 찍혀 올라오고, 수조에는 다시 투명한 물만 남아.
시와 번역은 물과 안료 또는 수조와 종이의 관계와 같다. 시가 움직이는 말이라면, 최선의 경우, 시의 번역도 그것일 수밖에 없다. 안료가 물결의 변모에 맞춰 제 무늬를 만들 듯, 번역 역시 시적 언어의 운동성을 옮겨 닮는다. 물 분자의 배열과 물결 표면의 형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되 유막에 닿은 종이는 그 변화의 한 단면만 전사하듯, 시적 언어에는 무궁한 해석 가능성이 잠재할지라도 번역은 그중 하나의 가능태만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을 떠내 본래의 투명성을 회복한 물에 다시 찬란한 색점들을 뿌려서, 다시 얼룩, 주름, 소용돌이, 흐름, 흔들림, 떨림, 결 가득한 무늬를 퍼뜨리고, 다시 새 종이를 덮어 찍을 수 있듯, 이전 종이의 무늬 판과 다른 그것 역시 동일한 물의 형상의 자취이듯, 이미 번역한 시일지라도 못다 한 해석들을 펼쳐내려 언제든 다시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무색에서 다채가 발생하는 경이. 물그릇 하나에서 겹겹의 꽃송이들이 태어나 쌓인다. 종이 제작실을 나와 해변으로 간다.
훨씬 광막한 스케일에서, 바닷물과 그 표면에서 그것의 파동에 맞춰 부서지고 퍼져 나가는 태양광이나 월광의 파장을 마주하면. 끝없이 펼쳐진 잔물결과 산란하는 빛점 무리. 파도와 포말의 그물 무늬와 그 위에 쏟아져 내리며 부딪혀 꺾이는 빛다발의 격자무늬. 두 진동체의 접면에서 영원히 다르게 닮은 두 물상의 영원히 다르게 닮은 두 겹의 운동이 영원히 지속된다. 아찔하도록. 눈 멀도록. 숨 막히도록. 한 편의 시를 넘어 한 언어 전체와 그것의 번역은. 시적인 존재와 다른 시적인 존재의 만남과 사랑은. 모든 고요한 황홀의 체험은.
시는 움직이는 말. 그렇다면 시적인 존재는 무엇일까. 움직이는 마음. 조형으로 이끄는 영혼.
움직이는 물을 따라 움직이는 빛에는 악기 연주와 달리 의도와 훈련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개입한다. 마음이 움직이는데 어찌 막을 것인가. 오역에 취약해짐과 동시에 또한 오역이라 불리는 불가피한 언어 현상의 지위와 가치를 달리 평가할 필요가 생겨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번역자의 어학 실력과 무관하게, 시적인 것에 마음을 모조리 맡길 때, 그것의 번역에 오역은 없다. 어떤 번역이든 시에 닿아 움직이는 영혼을 포착해냈을 뿐. 시를 읽는 순간, 시의 물결에 맞추어 진동하는 마음의 색채를 종이에 떠냈을 뿐. 시에 부딪히는 순간, 감정의 분광을 인화지에 찍어냈을 뿐. 모든 것이 시에서 비롯되었을 뿐.
만약 오역이라 할 만한 것이 그래도 분명히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물과 조금 다르게 작용하는 안료 자체의 속성, 번역자에 잠재하다가 시의 매개 덕분에 비로소 생성력이 일깨워진 미지의 언어 때문일 것이다.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옮겨야 하는 말이 아니라 미증유의 다른 말이 모습을 드러내는 오역의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번역자는 시인이 된다. 시인이 말하지 않은 것을 시로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시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오역은 더더욱 없다. 그것마저 시가 되는 다른 말이 있을 뿐이다.
주의 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멀리서 우편이 도착한다.
선물이야. 시. 원본이 아니어서 미안해.
왜 미안할까. 그저 고맙고 기쁘기만 한데.
우리가 아는 외국어로 번역한 시를 읽는다. 이런 시라니. 이런 선물이라니. 우리가 아는 모국어로 번역해서 다시 선물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아는 다른 외국어 원본을 찾아본다. 읽는다. 주의 깊게 다시 읽는다. 선물을 다시 읽는다. 읽는다. 다시금 읽어본다. 온 주의를 기울여. 원본에 없는 네 개의 문자를. 읽는다. 잘못 읽었나. 또 읽는다. 달리 해석할 수 없다. 심장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려, 오로지 나만이 수신인인 아름다운 시어, 메타포 아닌 그 말을 두 음절의 같은 말로 옮겨 쓴다.
. . . liebend . . .
발터 벤야민, 「번역인의 과제」 (1921)
그 곁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시는 완전히 잊지 않을, 어떤 것을 배웠다. 당시 세 살이 채 안 된 나로서는 제대로 알 리가 없었던, 그러나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이해한 말, Liebe.
발터 벤야민, 『베를린 연대기』(19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