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장롱이 어찌나 무거웠던지 장롱 한짝에 달라붙은 인부들이 셋이나 되었는데도 그들은 제 힘을 쓰지 못하고 현관문 밖에서 한참 동안 진땀만 흘렸다. 나는 문가에서 조금 떨어져 선 채 행여 장롱의 모서리에 흠집이 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업, 다운, 라이트, 레프트가 전부인 서툰 영어로 방향을 지시해줄 수밖에 없었다. 무게중심이 무너져 장롱이 약간 기울어지거나 방향을 잘못 틀어 현관문에 살짝 비비기라도 할라치면 나도 모르게 우리말이 튀어나왔다. 조심하세욧!
그렇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장롱의 일부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각도를 조정해 나오기를 반복한 후에야 인천 부두에서 컨테이너에 실려 뉴질랜드의 웰링턴까지 긴 여정을 마친 나의 오동나무 열두 자짜리 장롱이 우리들의 침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집에서 실어보낸 크고작은 짐들이 생각보다 많아 인부 셋이 짐을 옮기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졸업앨범과 일기장 같은 잡동사니가 든 종이상자를 마지막으로 인부들이 돌아간 후에 나는 침대 한쪽 끝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한참 동안 장롱을 바라보았다.
고향의 새벽 냄새와 바람이 숲 사이를 지날 때 나던 비질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람 소리를 들을 때면 자동적으로 어릴 때 읽었던 시 구절의 한 토막이 떠오르고는 했다. 바람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지?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거기 있다는 증거.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내 고향집 뒷산에 있던 오동나무 한그루를 그대로 만리 이역땅의 우리 침실로 떠온 것이었다.
평생을 초등학교 선생으로 보낸 아버지는 첫딸이 태어나자 고향집 뒷산에 오동나무 묘목을 사다 심었다. 생장이 빠르고 얇은 판으로 떠도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아 악기나 가구재로 쓰이는 귀한 나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오동나무에 관한 상식이었고 아버지는 다 자란 오동나무로 결혼하는 딸에게 장롱을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뒷산은 밤나무 천지였으므로 아버지는 그 숲에서 그 나무를 잘 찾아낼 수 있도록 팻말까지 박아두었다. 내 이름과 묘목을 옮겨심은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 나무는 진작에 베일 뻔했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스물둘에 졸업도 하지 못한 채 때이른 결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이 임박하자 약혼자도 나도 돌연 마음이 바뀌었다. 귀염성있게 생각되던 그의 작은 키가 볼썽사납게 느껴지고 영원히 순수함을 간직할 남자로 평가되던 천문학이라는 그의 전공이 단지 직장을 얻기 힘든 비인기학과로만 생각되었다. 패물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선에서 우리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후에 일절 들은 바가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전화위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둘에 잘릴 운명이었던 오동나무는 내 나이 서른둘이 되어서야 베였다. 첫번째 약혼이 파경으로 끝난 후 10년 동안 오동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열 자짜리가 아닌 열두 자짜리 장롱을 내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어머니 말마따나 장롱은 역시 열두 자짜리가 제일이었다. 호박빛의 투명한 피막 속으로 시냇물처럼 조용히 흘러가는 나뭇결이 아름다웠다. 장롱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갓 칠한 바니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동나무가 베이던 순간을 기억한다. 전기톱날이 오동나무 밑동을 파고들어가자 오동나무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톱날이 제자리에서 헛돌면서 꺾일 듯 휘었다. 톱이 저 혼자 울었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전기톱의 엔진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온숲에 수액 냄새가 진동했다. 32년을 자란 13미터 남짓한 오동나무가 베여 넘어질 때 거기 모여선 사람들이 웃으면서 합창했다. 나무 넘어간닷!
장롱문을 열자 옷걸이 아래로 세 단짜리 서랍이 들어앉아 있었다. 새것인 서랍은 길이 들지 않아 당겨여는 데 여러번 주춤거렸다. 그곳에 어머니가 보관해왔을 앨범과 일기장들을 넣어두었다. 제이슨을 따라 웰링턴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솔직히 말하면 설렘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했다. 제이슨의 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재게 놀리면서 나는 촌뜨기처럼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제 곧 장롱의 서랍은 길들여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 낯선 땅도 내 아이들의 고향이 될 것이다.
저녁 늦게 귀가한 제이슨은 침실 한쪽 벽면을 틈 하나 없이 차지하고 있는 열두 자짜리 장롱에 기가 질린 듯했다.
“당신이 목 빼고 기다린 것치고는 글쎄……”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목조건물에 호박빛이 도는 묵직한 장롱이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침대에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주워들면서 오동나무에 대해 늘어놓았다.
“맨 처음 잘라낸 오동나무를 모동(母桐)이라고 해요.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자란 것을 자동(子桐)이라고 하죠. 그 다음은 손동(孫桐). 나무 질이 제일 좋은 건 손동이에요, 손동. 난 그 나무를 대대손손 지켜두었다가 자동으로는 우리 딸 장롱을, 손동으로는 우리 손녀 장롱을 만들어줄 거야.”
모동이니 자동이니 하는 말을 그가 한번에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제이슨은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생활해왔다. 찬찬히 다시 풀어 설명해주었더니 제이슨이 두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고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노 땡스,라고 정확하게 발음했다. 노 땡스의 대상이 아이들인지 장롱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 제이슨은 다소 어두운 빛깔의 이 장롱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식당으로 가는 제이슨을 뒤따라가면서 나는 흐트러짐없이 빗어넘겨진 그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익숙한 앞모습에 비해 나는 그의 뒷모습을 주의해서 본 적이 없었다. 혹시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나? 문득 난 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우리는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먼저 결혼을 한 선배들은 결혼 전에 긴 탐색기간이 필요하다고 충고를 하곤 했지만 그들 모두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렴풋이 그가 어떤 부류의 남자인지 알 수 있었다.
3천피트 상공에서 나는 제이슨을 처음 만났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는 승객 가운데 90퍼센트가 신혼여행객들이었다. 그들로 좌석이 채워지고 약간 남은 뒷좌석에 여행 목적이 다른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였는데도 터뷸런스가 잦았다. 음료 써비스가 지체될 정도였다. 한번씩 비행기가 부르르 흔들어댈 때면 앞좌석 여기저기에서 신부들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륙 직후 줄곧 창밖을 내려다보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야, 대단하네요. 전혀 겁이 없나봐요.”
저 아래로 납작 엎드린 집들의 지붕과 개미처럼 기어가는 자가용들과 별로 높아 보일 것도 없는 고봉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난 옆에 신랑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뭘 흘렸나봐요.”
그 말에 좌석 바닥을 훑어보았지만 내가 흘린 것으로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그제야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양쪽 귀에서 턱에 이르기까지 온통 무 밑동처럼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남자였다. 남자가 다시 웃었다.
“그 바닥이 아니구요, 저 땅 말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창밖만 보시길래……”
양가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결혼을 서둘렀다. 연애기간을 길게 두고 상대방을 탐색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나보다 세살 연하였다. 남자 나이 스물아홉이면 늦은 결혼도 아니었는데 서둘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양가 회동이 있고 호텔 양식당에서 가까운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반지를 주고받았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진행 속도가 빨라서였을까 이번에는 스물두살 때처럼 마음이 변할 시간마저 없었다.
길일이라며 밭은 날짜를 잡아온 어머니는 거실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버지 쪽을 힐끔거리면서 한평생 살을 비비고 살아도 모를 것이 남자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토를 달았다. 그래, 뉴질랜드의 그 방에는 열두 자짜리 장롱이 들어갈까?
세살 연하인 그것도 뉴질랜드 시민권을 가진 남자와의 결혼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음먹어도 가기 힘든 이민인데 이 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2년 꾹 참고 살라고 했다. 시민권을 손에 쥔 다음에 이혼을 해도 늦지 않다는 거였다. 우리는 맥주잔 가득 맥주를 따라 들고 건배를 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그는 내가 알아왔던 남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은근슬쩍 팔을 어깨에 얹고 칸막이가 된 어두운 까페로 여자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남자들에 비하면 그랬다. 어느날인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술에 취한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 혼자 살고 있는 방에 들어와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는 약속대로 차만 마시고 일어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 전까지 나를 지켜주려는 그의 배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찌감치 외국에서 산 것과는 다른 어쩌면 고루할 수도 있는 그의 행동에 나는 신뢰감을 얻었다.
그를 안 것은 3개월이었지만 연애기간은 한달 반밖에 되지 않았다. 결혼 날짜를 잡은 후에 그는 곧바로 뉴질랜드로 갔다. 데이트 대신 매일같이 한시간 넘게 전화 통화를 했다. 결혼 준비도 그를 빼놓고 시부모님과 의논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가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면 나는 차를 몰고 경기도에 있는 가구단지까지 찾아가고는 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래커 냄새가 지독했다. 가구회사의 공장장은 나를 작업장으로 데리고 가서 널빤지가 뒤틀리지 않도록 나무를 두 번 삶아 말리는 공정에 들어간 내 오동나무를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기한에 꼭 맞춰달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제이슨은 결혼식 전날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제이슨의 귀국일자가 늦어지자 제이슨의 부모님이 약국에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용건은 점심을 먹었냐거나 가게에 손님은 많냐는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결혼식은 무리없이 진행되고 있느냐는 말에 다름아니었다. 제이슨의 부모님은 좀 불안해 보였다.
시간 때문에 가봉 과정이 생략되어 제작된 제이슨의 예복은 허리께가 약간 컸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옷핀으로 집어 엉덩이에 약간 주름이 잡혔다. 결혼식에는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교직원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와주었다. 고향집의 동네 어른들도 그 버스를 타고 와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자꾸 떠들어대서 주례가 주례사를 멈추고 조용히 해달라는 말을 네 번이나 했다.
나는 물론이고 제이슨마저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주례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신랑의 약력과 지방 약대를 나와 종로의 대형 약국에서 월급 약사로 있는 내 약력을 좀 부풀려 이야기했다. 힐끔 부모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아버지는 주례의 말끝마다 긍정의 뜻으로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주례사는 좀 길었다. 주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부분에서 검은 머리 빠뿌리라고 발음해 지방에서 온 촌로들을 웃겼다.
그에게는 효경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었지만 제이슨이라는 이곳 이름에 더 익숙한 듯했다. 아침이 되면 그는 노란색 스포츠카를 몰고 학교로 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생계를 위해 따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학비와 풍족한 생활비가 그의 부모로부터 송금되었다.
제이슨이 학교에 간 사이 나는 청소를 하고 낮잠을 잤다. 한인회보를 뒤적여보았지만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와는 달리 아직까지 이민자가 많지 않았다. 교민과 체류자까지 모두 합해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내 또래의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비행기로 한 시간 가량 날아가야 했다.
시부모님께 이야기하면 언제라도 차 한대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운전석이 한국과는 반대여서 처음부터 다시 운전을 배워야 했다. 언젠가 한번 제이슨의 차를 운전했다가 집 울타리를 들이박을 뻔했다.
거실의 천장은 이층까지 곧바로 뚫려 있어 채광이 잘 되었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창밖으로 멀리 펼쳐진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종로의 약국 진열장 앞에 앉아 있으면 이렇게 따뜻한 햇살이 차창 가득 들어왔다. 그러면 여기저기 띄엄띄엄 떨어져 앉은 약사들은 손님을 기다리면서 졸았다.
제이슨의 방은 침실에서 뚝 떨어진 복도 맨 끝에 있었다. 귀가가 늘 늦는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저녁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그 방에 틀어박혔다. 침대와 장롱뿐인 침실에서 나는 혼자 잠을 잤다. 침대는 커다랗고 푹신했다. 새벽에 불현듯 눈이 떠지면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는 앞뒤가 기억나지 않는 그 시를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바람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지?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거기 있다는 증거.
아침식사 전에 제이슨은 꼭 면도를 했다. 터럭 하나 없는 깨끗한 턱을 보고 결혼 전에 내가 선물했던 전기면도기는 무용지물로 목욕탕 사물함 속에서 묵고 있었다. 그가 전기면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결혼 2개월 후에야 알게 되었다. 쓰지 않으면서도 전기면도기를 선물받을 때 그는 예의상이었는지 잘 쓰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조금은 구식처럼 보이는 면도칼을 사용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 갔다가 본 면도칼과 비슷했다. 면도용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후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칼날을 엇비스듬하게 세웠다. 면도칼이 사각 소리를 내면서 그의 턱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턱이 다른 남자들의 턱보다 파르스름한 것이 그 면도칼 때문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면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성가신 듯했다.
“무슨 일?”
“개 한마릴 키우고 싶은데……”
제이슨은 대답 대신 수도꼭지를 세게 비틀고 면도칼을 물로 헹궜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번에도 노 땡스라고 말할 것인가. 제이슨은 푸르스름한 턱을 세워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물거렸다.
“말 안했던가? 난 개라면 딱 질색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개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생략했다. 파자마를 벗어던지다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기다려.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 와카티푸 호로 놀러 가자.”
즐겨입는 검은 옷에 털이 달라붙는 걸 싫어해서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말해준 것은 제이슨의 학교 후배인 챙이었다.
챙은 중국계로 제이슨보다 네살 아래였다. 그는 몸집이 왜소했고 제이슨과는 달리 명랑했다. 거실을 걸을 때면 발꿈치를 들고 다녔다. 대가족 속에서 자랐는데 그때 얻은 습관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제이슨과 그는 공동으로 무슨 연구인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가끔 찻잔을 앞에 놓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제이슨과 둘만 지내는 날보다 챙과 셋이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챙은 음식을 도와주었고 설거지도 거들었다. 날 배려해 천천히 발음했다. 제이슨이 가르쳐준 모양인지 한국말도 떠듬떠듬 할 줄 알았다.
챙이 알려준 대로 음식에 조미료를 더 넣었더니 제이슨은 아주 맛있게 밥을 먹었다. 챙 덕분에 저녁식사 시간만큼은 화기애애했다. 챙이 오는 날을 나도 기다리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그들은 복도 끝 제이슨의 방으로 사라졌다.
“뭐, 차나 과일이라도 낼까?”
내가 물으면 제이슨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말했다.
“노 땡스.”
그리고 생각난 듯 그 사실을 확인시켰다.
“먼저 자도록 해. 우린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까. 괜히 방해는 말아줘.”
이 집에서 며칠이 지난 후 제이슨이 내게 주의를 주었다. 다 내 맘대로 해도 좋지만 단 하나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의 방에는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거나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발코니로 나갈 때도 나는 제이슨의 그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당부대로 그의 방을 피해다녔다. 복도 끝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빛 테두리가 보이고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조금씩 이곳 생활에 적응해갔다. 제이슨이 연구실에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고 산책을 나갔다. 사계절 내내 이파리를 떨구지 않는 아열대성 활엽수림 사이를 걸었다. 밤이 되면 이곳 기온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밤새 열이 나면서 앓았다. 제이슨에게 엄살을 부리지는 않았다. 약장에 약이 가득했다. 나는 약병들에서 이런저런 알약들을 꺼내 조제했다. 그후로 산책길에는 언제나 두꺼운 스웨터를 준비해 나갔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면 멀리서도 하얀 페인트칠이 된 목조건물이 보였다. 아치형의 창들과 내가 손수 매단 꽃무늬 면커튼들, 창틀에 내다건 종 하나. 모든 것이 내가 원하던 그대로였지만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던 마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나는 엽서를 썼다. 아직 가보지 못한 와카티푸 호에 유람선이 떠 있고 바다 가득 빽빽하게 돛배가 떠 있는 오클랜드의 전경이 엽서에 담겨 있었다. 나는 엽서에 하얀 페인트칠이 된 이층짜리 목조주택에 대해 썼다. 낙엽이 지지 않는 잎이 넓은 나무에 대해서도 썼다. 이곳은 겨울이 7월이라고도 썼다. 연간 2천시간 동안 햇볕을 볼 수 있다고도 썼다. 주저리주저리 관광용 카탈로그에서 베낀 내용을 썼다.
엽서의 끝은 늘 이렇게 끝났다. 꼭 놀러 와. 이곳은 지상의 낙원이야. 참 썬글라스와 썬탠 크림은 꼭 가져와야 해. 할말을 다 쓰고도 나는 필기구를 쥐고 있었다. 하얀색 목조건물은 크고 넓고 햇살이 늘 넘쳐나지만 미미의 이층짜리 집 같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렇게 써보냈다면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배부른 소리 하네. 여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야. 남편의 월급은 쥐꼬리만큼이고 아이들은 매일 징징대. 일하지 않고 편히 궁전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건 복이야, 복. 힘들더라도 참고 살아.
집 주위의 길들을 다 익히고 나자 나는 지도를 샀다. 오클랜드는 비행기로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편도 미리 알아두었다. 제이슨의 노란 스포츠카가 길에서 사라지자 나는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오클랜드 지도를 펼쳐들고 퀸 엘리자베스 2세 광장을 가로질렀다.
화산활동 때문에 평탄한 길보다는 경사가 많은 길이 특색 있었다. 낮 동안은 반팔 차림이 선뜩하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다. 자연림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허공에서 넓은 이파리를 가진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해가 들지 않았다. 내 고향집의 뒷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한눈에도 수령이 백년은 족히 됨직한 나무들투성이였다.
부띠끄와 레스또랑이 줄지어 선 파넬 빌리지 쪽으로 걸어내려온 것은 오후 두시쯤이었다. 빅토리아풍의 레스또랑을 지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고 다음 예정지인 앨버트 공원의 위치를 찾아 지도를 펼치던 참이었다. 누군가 내 팔을 치고 달려나갔다. 그 바람에 지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챙이었다. 챙은 나를 보지 못한 채 건너편 길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며 챙을 부르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챙이 뛰어간 그 골목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제이슨이었다.
제이슨은 다음날 아침 늦게 귀가했다. 무척 피로한 모습이었다. 면도를 하지 못했는지 지저분하게 털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오클랜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챙과 제이슨이 왜 그 시간 그곳에 가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직까지 제이슨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턱으로 손을 뻗어 수염을 쓱 더듬었다. 제이슨이 내 손을 휙 뿌리쳤다.
“아, 당신이 왜 매일같이 수염을 미는지 이제 알겠어. 기르기엔 수염 숱이 많지 않구나.”
제이슨은 목욕탕으로 들어가더니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여름방학이 되었지만 나는 제이슨이 약속했던 와카티푸 호의 여행건에 대해 떼쓰지 않았다. 오클랜드에서 그와 챙을 본 후로 나는 더이상 밤늦게까지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여행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이슨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야 단둘만의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또 챙이 있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몫의 짐을 챙에게 맡겼다.
우리는 마치 동네 친구처럼 퀸스타운 몰을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의외로 챙과 나의 취향이 비슷했다. 챙은 내가 열 벌이 넘는 옷을 입어보는 동안 찬찬히 지켜본 후 옷을 골라주었다. 우리는 폴로 가게에서 챙이 달린 똑같은 모자를 사서 썼다.
내가 엽서로만 보았던 와카티푸 호는 뉴질랜드에서 세번째로 큰 빙하호라고 챙이 내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호수의 귀부인’이라고 불리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돌았다. 과연 마오리족이 ‘비취 호수’라 부를 만했다. 나와 챙은 갑판으로 나가 쇠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지만 제이슨은 유람선을 탄 후 객실에만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로 제이슨을 불렀다.
“제이슨! 이리 나와요. 이 물빛 좀 봐.”
챙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가 천천히 천천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제이슨은 물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다섯살 때 해수욕장에서 파도에 휩쓸린 후로 물가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배를 탄 것만으로도 큰 용기라고 했다. 칭찬해줄 만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챙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야, 챙, 너 제이슨 본명이 뭔 줄이나 알어? 효경이야, 효경. 최효경.”
챙이 내 말꼬리를 물었다.
“희경?”
“아니.”
“혜경?”
혀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챙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른 치열이 활짝 드러났다. 나는 챙의 얼굴에 내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히죽거렸다.
“효경이라는 말 하나 발음 못하는 주제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챙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왓? 왓? 했다.
호수의 귀부인은 우리를 양 목장에 내려놓았다. 목동이 양털 깎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목동에게 목이 잡힌 양은 털이 다 깎일 때까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혼자 잠을 잤다. 챙과 제이슨은 술집에서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이 넘도록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일로 바빴다. 제이슨과 챙, 그리고 나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일일 패스를 사서 트롤리버스를 타고 웰링턴 시내를 돌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레스또랑에 들러 점심을 먹고 꽃가게에 들러 양팔이 끊어질 만큼 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안등이 켜질 때까지 울타리 안쪽에 빙 둘러 꽃들을 심었다.
언쟁 소리에 잠이 깼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가벼운 물건이 바닥에서 튕겨오르는 소리가 났다. 제이슨의 낮은 음성 위에 챙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동안 그들이 그렇게 다투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복도를 뛰어가 제이슨의 방문을 밀쳤다. 제이슨은 방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제이슨의 한쪽 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술병이 보였다.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챙의 한손에 과도가 들려 있었다. 제이슨이 나를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꺼져!”
그제야 나를 본 챙이 손에 들고 있던 과도를 떨어뜨리고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제이슨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소리질렀다. 꺼져!
침실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퍽퍽, 살집끼리 맞닿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챙인지 제이슨인지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다음날 일어나 부엌으로 갔을 때, 챙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토스트를 굽고 주스를 만들고 있었다. 제이슨은 면도를 하는 중이었다. 챙이 날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떠듬떠듬 국어책을 읽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우리 셋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빵 쪼가리를 씹어댔다. 빵을 씹을 때마다 제이슨의 뺨에 난 상처가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왜 싸웠냐고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2박 3일 코스로 오클랜드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제이슨이 관광투어를 이용하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귀에 담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도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네 시간 코스와 하루 코스 중에서 네 시간 코스를 골랐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앨버트 공원, 오클랜드 미술관, 오클랜드 도메인, 챙과 제이슨을 만났던 파넬 거리를 쏘다녔다. 가끔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고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결과 세시간 이십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와이테마타 항구에서 동쪽 길을 따라 하우라키 만을 걸었다. 만 가득 범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바람을 잔뜩 안은 돛이 생선의 배 같았다. 밤이 깊어 퉁퉁 부은 발을 끌고 호텔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잠을 잤다. 오랜만에 맞는 숙면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심은 꽃은 시들어 있었다. 나는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켜 한참 동안 마당에 물을 뿌렸다. 집안에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제이슨도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신혼여행 때 썼던 트렁크를 창고에서 찾아오고 장롱을 열었다. 아직도 새것 냄새가 장롱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서랍 몇개는 아직도 빈 채였다. 나는 아직도 오동나무가 베여 넘어지던 그때를 기억한다. 잠깐 실망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기척이 나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야광바늘이 새벽 두시 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제이슨의 방으로 간 건 내일이나 모레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제이슨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불규칙한 호흡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챙을 보았고 그 위에 바싹 붙어 서 있는 제이슨을 보았다. 제이슨의 바지가 허벅지에 걸쳐 있었다. 제이슨이 나를 보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당황한 순간에는 역시 그도 한국사람이었는지 한국말로 욕을 했다.
놀랄 일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침실로 돌아와 제이슨을 기다렸다. 제이슨은 곧바로 날 따라왔다. 이렇게 행동이 빠른 적도 있었나,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이슨의 얼굴에는 채 홍조가 가시지 않았고 낮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방엔 오지 말랬잖아.”
그 순간 나는 고향집 뒷산에서 우수수 일어나던 바람 소리를 떠올렸다. 그 소리가 들릴 때면 어머니는 말했다. 풍파(風波) 소리구나.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어.”
제이슨이 침실 구석에 놓인 트렁크를 발견했다. 그가 쩝, 입술을 빨았다. 성큼성큼 장롱 앞으로 다가간 그는 장롱문을 열고 내 핸드백을 꺼내들었다. 침대 위에 핸드백을 거꾸로 털자 내 여권과 통장, 한동안 바르지 않았던 루주와 분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그 속에 오클랜드행 비행기표가 여러 장 섞여 있었다. 날짜를 확인하던 제이슨이 눈을 찌푸렸다.
“아, 이제 알겠다. 그때부터 알고 있었군. 그런데도 난 까맣게 몰랐지? 생각보다 오래 참았네.”
여권을 집으려던 나보다 제이슨의 동작이 빨랐다. 제이슨은 내 여권을 반으로 찢었다. 통장은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넣었다.
“누구 맘대로 가? 올 때는 니 마음이었겠지만 갈 땐 내 마음이야. 이게 지금 와서 누굴 물 먹이려구?”
“그래도 갈 거야. 집에 가고 싶어.”
어지럼증 때문에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제이슨이 날 떠다밀었다.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천장이 하얗게 멀어졌다. 나는 우수수 풍파 소리를 들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오동나무 장롱 속에 갇혀 있었다. 밖에서 제이슨과 챙의 발소리가 났다. 힘껏 밀쳐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열린 침실문 너머로 부산히 움직이는 챙의 모습이 보였다. 챙은 불안해 보였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를 어떻게 할 거야? 설마.”
“입 닥치고 있어.”
챙이 새어나오는 비명을 제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어쩔 거야? 이젠 어떻게 할 거야?”
“그렇다고 그녀를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야.”
챙이 울먹이듯 말했다.
“난 널 사랑해.”
공포보다는 배가 고팠다. 나는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후 두 팔로 감쌌다. 오클랜드에 다녀온 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벌떡 일어서서 온몸으로 장롱문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오동나무 장이었다. 오동나무 장롱이 내게 오동나무 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쇳소리만 났다. 백미터 남짓 떨어진 옆집에 그 소리가 전달될 리 없었다. 손톱으로 문을 긁었다. 손톱이 금세 들떠 일어났다. 이번에는 내 머리 위에 걸려 있던 옷들을 뒤적여 허리띠를 찾아냈다. 허리띠의 버클로 열쇠 구멍을 후벼보았지만 허사였다.
제이슨이 장롱에 나이프를 던졌다. 파르르 소리를 내며 나이프가 장롱에 꽂혔다. 제이슨이 장롱 앞을 어슬렁댔다.
“방문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우린 아무 일 없었을 거야. 안 그래? 이게 다 네가 자초한 거야. 알아? 이건 어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가자. 약속해. 그럼 문을 열어줄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갈증과 피곤함 때문에 다시 실신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실신을 하면서 배변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갈증 때문에 입술이 타들어가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제이슨을 부르려 했지만 혀가 돌돌 말린 듯 발음이 되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 감각이 없어졌다. 며칠을 그렇게 장롱 안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후 장롱문이 열렸다. 악취 때문인지 제이슨이 욕설을 내뱉었다. 챙이 머리를 제이슨이 두 다리를 잡고 나를 장롱에서 들어냈다. 나는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챙이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정말 죽었나봐.”
일어설 기운도 없었지만 나는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제이슨이 내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내 코에 제이슨이 귀를 가까이 들이댔다.
“아직 살아 있어. 우선 차로 옮겨야겠어. 넌 가서 트렁크 좀 열어.”
챙이 후닥닥 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제이슨이 날 넣을 주머니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가 창고로 간 후에 나는 네 발로 기어 목욕탕까지 갔다. 선반 위에 날이 잘 선 제이슨의 면도칼이 보였다. 나는 그 칼을 바지 주머니에 숨겼다.
밖에서 챙이 다급하게 제이슨을 불렀다.
“빨리 나와. 시동도 걸어놨어.”
사람 하나를 넣을 만한 주머니는 흔치 않았다. 창고에서 한동안 부스럭대던 제이슨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장롱에서 내 코트를 꺼내 내 전신을 덮었다. 날 어깨에 짊어지려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끙 소리를 내며 도로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내 두 다리를 잡았다. 그는 내 발목을 잡고 거실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문지방에 등이 쓸리면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꽉 물었다.
제이슨이 숨을 몰아쉬면서 잠시 방심한 사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키면서 면도칼을 휘둘렀다. 제이슨이 턱을 움켜쥐면서 물러났다. 무작정 일어나 현관 밖으로 뛰었다. 두 다리가 썰어놓은 낙지처럼 제각각 다르게 움직였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칼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챙을 위협했다. 소심한 챙은 쉽게 물러났다. 운전석에 앉아 차문을 걸어잠갔다. 핸들을 쥐고 힘껏 악쎌을 밟았다. 제이슨의 노란 스포츠카가 힘찬 발진음을 내며 울타리 쪽으로 튀어나갔다. 내가 정성껏 가꾼 꽃들이 자동차 바퀴에 짓밟히는 것이 속상했다.
울타리를 들이박고 거리로 뛰쳐나간 차는 지그재그로 10여분 달렸다. 오른쪽에 달린 운전석에서 하는 운전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았다. 차들이 클랙슨을 눌러대며 멀찌감치 피해 달아났다.
차는 보도 위로 덥석 올라가 소방펌프를 들이박고 멈췄다. 펌프에서 분수처럼 물길이 솟아올랐다. 싸이렌 소리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탈수 증세 때문에 병원에서 퇴원한 것은 3일 후였다. 제이슨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제이슨의 턱에 커다란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제이슨은 모든 것이 오해라고 널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경찰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제이슨은 그것이 내가 쥔 마지막 패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얼마 후 제이슨의 부모가 날 찾아왔다. 제이슨의 부모는 진작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제이슨의 어머니가 울었다.
“걔가 아직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니……”
제이슨의 아버지는 시종일관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여자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조달되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끊길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계를 위해 일해본 적이 없었다.
그후 일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아침 일곱시 반이면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서른이 훨씬 넘은 여자를 새로 받아줄 약국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곳은 선배가 하는 작은 약국으로 선배가 출산을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만 봐주기로 했다.
만원 전철 속에서 몸이 사정없이 휘둘릴 때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그때 그의 방을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지속될 수 있었을까.
친정 부모님께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5개월만 더 참지. 우리의 결혼생활은 19개월간 지속되었다. 처녁적처럼 한달에 한번 고향집에 들렀다. 뒷산의 오동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동안 이혼 절차는 마무리되었고 제이슨과는 딱 한번 통화를 했다. 그는 침실을 차지하고 있는 장롱을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턱에 난 상처가 보기 좋지 않아 상처를 가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염을 기르는 중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난 생각했다. 제이슨은 부모의 도움을 받기 위해 또다시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다. 그의 부모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정확히 한달 보름 후에 장롱이 도착했다. 비좁은 현관과 가파른 계단 때문에 인부 다섯이 매달리고도 끙끙댔다. 그들은 웃돈을 요구했다.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오동나무라면 이렇게 무거울 리 없어요. 장롱을 맞췄다는 공장이 어딘지 모르지만 아마 공장에서 나무를 바꿔치기 했을 겁니다.”
늙수그레한 인부가 알은체를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러 경기도의 가구공장까지 갈 기운이 내게는 없었다.
이번에는 조심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이미 장롱 곳곳에는 심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 열쇠 구멍 위에 난 나이프 자국은 한눈에 띄었다. 장롱 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손톱으로 긁었던 자국과 허리띠 버클에 파인 흠이 선명했다.
장롱 안 내가 갇혔던 곳에는 다른 곳보다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곳이 있었다. 아마도 나의 배설물이 스며든 자국 같았다. 제이슨은 한번도 서랍을 열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서랍은 길이 들지 않아 잘 열리지 않았다. 첫번째 서랍에 앨범과 일기장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나의 방은 너무 비좁아 장롱을 들여놓고 나니 씽글 싸이즈의 침대 하나를 놓기에도 버거웠다. 할 수 없이 열두 자짜리 장롱을 두 개의 방에 나눠 넣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애시당초 여덟 자짜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정오가 되면 약국 유리창으로 햇살이 밀고 들어온다. 나는 항생제 연고와 구강청정제, 피임약 등이 진열된 유리판 위에 두 팔을 괴고 까무룩 졸곤 한다. 그러면 햇살이 꽉 들어차던 하얀 페인트칠이 된 그 목조주택의 거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트롤리버스와 부띠끄와 레스또랑이 늘어선 파넬 빌리지의 빅토리아풍 건물들과 오클랜드의 울퉁불퉁한 구릉들, 와이테마타 항구와 하우라키 만을 가득 메운 범선들의 행렬이 약국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다. 그러면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렇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장롱의 일부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각도를 조정해 나오기를 반복한 후에야 인천 부두에서 컨테이너에 실려 뉴질랜드의 웰링턴까지 긴 여정을 마친 나의 오동나무 열두 자짜리 장롱이 우리들의 침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집에서 실어보낸 크고작은 짐들이 생각보다 많아 인부 셋이 짐을 옮기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졸업앨범과 일기장 같은 잡동사니가 든 종이상자를 마지막으로 인부들이 돌아간 후에 나는 침대 한쪽 끝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한참 동안 장롱을 바라보았다.
고향의 새벽 냄새와 바람이 숲 사이를 지날 때 나던 비질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람 소리를 들을 때면 자동적으로 어릴 때 읽었던 시 구절의 한 토막이 떠오르고는 했다. 바람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지?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거기 있다는 증거.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내 고향집 뒷산에 있던 오동나무 한그루를 그대로 만리 이역땅의 우리 침실로 떠온 것이었다.
평생을 초등학교 선생으로 보낸 아버지는 첫딸이 태어나자 고향집 뒷산에 오동나무 묘목을 사다 심었다. 생장이 빠르고 얇은 판으로 떠도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아 악기나 가구재로 쓰이는 귀한 나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오동나무에 관한 상식이었고 아버지는 다 자란 오동나무로 결혼하는 딸에게 장롱을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뒷산은 밤나무 천지였으므로 아버지는 그 숲에서 그 나무를 잘 찾아낼 수 있도록 팻말까지 박아두었다. 내 이름과 묘목을 옮겨심은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 나무는 진작에 베일 뻔했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스물둘에 졸업도 하지 못한 채 때이른 결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이 임박하자 약혼자도 나도 돌연 마음이 바뀌었다. 귀염성있게 생각되던 그의 작은 키가 볼썽사납게 느껴지고 영원히 순수함을 간직할 남자로 평가되던 천문학이라는 그의 전공이 단지 직장을 얻기 힘든 비인기학과로만 생각되었다. 패물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선에서 우리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후에 일절 들은 바가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전화위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둘에 잘릴 운명이었던 오동나무는 내 나이 서른둘이 되어서야 베였다. 첫번째 약혼이 파경으로 끝난 후 10년 동안 오동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열 자짜리가 아닌 열두 자짜리 장롱을 내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어머니 말마따나 장롱은 역시 열두 자짜리가 제일이었다. 호박빛의 투명한 피막 속으로 시냇물처럼 조용히 흘러가는 나뭇결이 아름다웠다. 장롱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갓 칠한 바니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동나무가 베이던 순간을 기억한다. 전기톱날이 오동나무 밑동을 파고들어가자 오동나무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톱날이 제자리에서 헛돌면서 꺾일 듯 휘었다. 톱이 저 혼자 울었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전기톱의 엔진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온숲에 수액 냄새가 진동했다. 32년을 자란 13미터 남짓한 오동나무가 베여 넘어질 때 거기 모여선 사람들이 웃으면서 합창했다. 나무 넘어간닷!
장롱문을 열자 옷걸이 아래로 세 단짜리 서랍이 들어앉아 있었다. 새것인 서랍은 길이 들지 않아 당겨여는 데 여러번 주춤거렸다. 그곳에 어머니가 보관해왔을 앨범과 일기장들을 넣어두었다. 제이슨을 따라 웰링턴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솔직히 말하면 설렘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했다. 제이슨의 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재게 놀리면서 나는 촌뜨기처럼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제 곧 장롱의 서랍은 길들여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 낯선 땅도 내 아이들의 고향이 될 것이다.
저녁 늦게 귀가한 제이슨은 침실 한쪽 벽면을 틈 하나 없이 차지하고 있는 열두 자짜리 장롱에 기가 질린 듯했다.
“당신이 목 빼고 기다린 것치고는 글쎄……”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목조건물에 호박빛이 도는 묵직한 장롱이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침대에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주워들면서 오동나무에 대해 늘어놓았다.
“맨 처음 잘라낸 오동나무를 모동(母桐)이라고 해요.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자란 것을 자동(子桐)이라고 하죠. 그 다음은 손동(孫桐). 나무 질이 제일 좋은 건 손동이에요, 손동. 난 그 나무를 대대손손 지켜두었다가 자동으로는 우리 딸 장롱을, 손동으로는 우리 손녀 장롱을 만들어줄 거야.”
모동이니 자동이니 하는 말을 그가 한번에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제이슨은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생활해왔다. 찬찬히 다시 풀어 설명해주었더니 제이슨이 두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고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노 땡스,라고 정확하게 발음했다. 노 땡스의 대상이 아이들인지 장롱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 제이슨은 다소 어두운 빛깔의 이 장롱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식당으로 가는 제이슨을 뒤따라가면서 나는 흐트러짐없이 빗어넘겨진 그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익숙한 앞모습에 비해 나는 그의 뒷모습을 주의해서 본 적이 없었다. 혹시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나? 문득 난 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우리는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먼저 결혼을 한 선배들은 결혼 전에 긴 탐색기간이 필요하다고 충고를 하곤 했지만 그들 모두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렴풋이 그가 어떤 부류의 남자인지 알 수 있었다.
3천피트 상공에서 나는 제이슨을 처음 만났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는 승객 가운데 90퍼센트가 신혼여행객들이었다. 그들로 좌석이 채워지고 약간 남은 뒷좌석에 여행 목적이 다른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였는데도 터뷸런스가 잦았다. 음료 써비스가 지체될 정도였다. 한번씩 비행기가 부르르 흔들어댈 때면 앞좌석 여기저기에서 신부들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륙 직후 줄곧 창밖을 내려다보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야, 대단하네요. 전혀 겁이 없나봐요.”
저 아래로 납작 엎드린 집들의 지붕과 개미처럼 기어가는 자가용들과 별로 높아 보일 것도 없는 고봉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난 옆에 신랑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뭘 흘렸나봐요.”
그 말에 좌석 바닥을 훑어보았지만 내가 흘린 것으로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그제야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양쪽 귀에서 턱에 이르기까지 온통 무 밑동처럼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남자였다. 남자가 다시 웃었다.
“그 바닥이 아니구요, 저 땅 말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창밖만 보시길래……”
양가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결혼을 서둘렀다. 연애기간을 길게 두고 상대방을 탐색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나보다 세살 연하였다. 남자 나이 스물아홉이면 늦은 결혼도 아니었는데 서둘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양가 회동이 있고 호텔 양식당에서 가까운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반지를 주고받았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진행 속도가 빨라서였을까 이번에는 스물두살 때처럼 마음이 변할 시간마저 없었다.
길일이라며 밭은 날짜를 잡아온 어머니는 거실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버지 쪽을 힐끔거리면서 한평생 살을 비비고 살아도 모를 것이 남자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토를 달았다. 그래, 뉴질랜드의 그 방에는 열두 자짜리 장롱이 들어갈까?
세살 연하인 그것도 뉴질랜드 시민권을 가진 남자와의 결혼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음먹어도 가기 힘든 이민인데 이 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2년 꾹 참고 살라고 했다. 시민권을 손에 쥔 다음에 이혼을 해도 늦지 않다는 거였다. 우리는 맥주잔 가득 맥주를 따라 들고 건배를 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그는 내가 알아왔던 남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은근슬쩍 팔을 어깨에 얹고 칸막이가 된 어두운 까페로 여자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하는 남자들에 비하면 그랬다. 어느날인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술에 취한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 혼자 살고 있는 방에 들어와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는 약속대로 차만 마시고 일어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 전까지 나를 지켜주려는 그의 배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찌감치 외국에서 산 것과는 다른 어쩌면 고루할 수도 있는 그의 행동에 나는 신뢰감을 얻었다.
그를 안 것은 3개월이었지만 연애기간은 한달 반밖에 되지 않았다. 결혼 날짜를 잡은 후에 그는 곧바로 뉴질랜드로 갔다. 데이트 대신 매일같이 한시간 넘게 전화 통화를 했다. 결혼 준비도 그를 빼놓고 시부모님과 의논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가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면 나는 차를 몰고 경기도에 있는 가구단지까지 찾아가고는 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래커 냄새가 지독했다. 가구회사의 공장장은 나를 작업장으로 데리고 가서 널빤지가 뒤틀리지 않도록 나무를 두 번 삶아 말리는 공정에 들어간 내 오동나무를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기한에 꼭 맞춰달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제이슨은 결혼식 전날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제이슨의 귀국일자가 늦어지자 제이슨의 부모님이 약국에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용건은 점심을 먹었냐거나 가게에 손님은 많냐는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결혼식은 무리없이 진행되고 있느냐는 말에 다름아니었다. 제이슨의 부모님은 좀 불안해 보였다.
시간 때문에 가봉 과정이 생략되어 제작된 제이슨의 예복은 허리께가 약간 컸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옷핀으로 집어 엉덩이에 약간 주름이 잡혔다. 결혼식에는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교직원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와주었다. 고향집의 동네 어른들도 그 버스를 타고 와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자꾸 떠들어대서 주례가 주례사를 멈추고 조용히 해달라는 말을 네 번이나 했다.
나는 물론이고 제이슨마저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주례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신랑의 약력과 지방 약대를 나와 종로의 대형 약국에서 월급 약사로 있는 내 약력을 좀 부풀려 이야기했다. 힐끔 부모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아버지는 주례의 말끝마다 긍정의 뜻으로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주례사는 좀 길었다. 주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부분에서 검은 머리 빠뿌리라고 발음해 지방에서 온 촌로들을 웃겼다.
그에게는 효경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었지만 제이슨이라는 이곳 이름에 더 익숙한 듯했다. 아침이 되면 그는 노란색 스포츠카를 몰고 학교로 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생계를 위해 따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학비와 풍족한 생활비가 그의 부모로부터 송금되었다.
제이슨이 학교에 간 사이 나는 청소를 하고 낮잠을 잤다. 한인회보를 뒤적여보았지만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와는 달리 아직까지 이민자가 많지 않았다. 교민과 체류자까지 모두 합해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내 또래의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비행기로 한 시간 가량 날아가야 했다.
시부모님께 이야기하면 언제라도 차 한대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운전석이 한국과는 반대여서 처음부터 다시 운전을 배워야 했다. 언젠가 한번 제이슨의 차를 운전했다가 집 울타리를 들이박을 뻔했다.
거실의 천장은 이층까지 곧바로 뚫려 있어 채광이 잘 되었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창밖으로 멀리 펼쳐진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종로의 약국 진열장 앞에 앉아 있으면 이렇게 따뜻한 햇살이 차창 가득 들어왔다. 그러면 여기저기 띄엄띄엄 떨어져 앉은 약사들은 손님을 기다리면서 졸았다.
제이슨의 방은 침실에서 뚝 떨어진 복도 맨 끝에 있었다. 귀가가 늘 늦는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저녁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그 방에 틀어박혔다. 침대와 장롱뿐인 침실에서 나는 혼자 잠을 잤다. 침대는 커다랗고 푹신했다. 새벽에 불현듯 눈이 떠지면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는 앞뒤가 기억나지 않는 그 시를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바람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지?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거기 있다는 증거.
아침식사 전에 제이슨은 꼭 면도를 했다. 터럭 하나 없는 깨끗한 턱을 보고 결혼 전에 내가 선물했던 전기면도기는 무용지물로 목욕탕 사물함 속에서 묵고 있었다. 그가 전기면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결혼 2개월 후에야 알게 되었다. 쓰지 않으면서도 전기면도기를 선물받을 때 그는 예의상이었는지 잘 쓰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조금은 구식처럼 보이는 면도칼을 사용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 갔다가 본 면도칼과 비슷했다. 면도용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후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칼날을 엇비스듬하게 세웠다. 면도칼이 사각 소리를 내면서 그의 턱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턱이 다른 남자들의 턱보다 파르스름한 것이 그 면도칼 때문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면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성가신 듯했다.
“무슨 일?”
“개 한마릴 키우고 싶은데……”
제이슨은 대답 대신 수도꼭지를 세게 비틀고 면도칼을 물로 헹궜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번에도 노 땡스라고 말할 것인가. 제이슨은 푸르스름한 턱을 세워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물거렸다.
“말 안했던가? 난 개라면 딱 질색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개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생략했다. 파자마를 벗어던지다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기다려.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 와카티푸 호로 놀러 가자.”
즐겨입는 검은 옷에 털이 달라붙는 걸 싫어해서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말해준 것은 제이슨의 학교 후배인 챙이었다.
챙은 중국계로 제이슨보다 네살 아래였다. 그는 몸집이 왜소했고 제이슨과는 달리 명랑했다. 거실을 걸을 때면 발꿈치를 들고 다녔다. 대가족 속에서 자랐는데 그때 얻은 습관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제이슨과 그는 공동으로 무슨 연구인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가끔 찻잔을 앞에 놓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제이슨과 둘만 지내는 날보다 챙과 셋이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챙은 음식을 도와주었고 설거지도 거들었다. 날 배려해 천천히 발음했다. 제이슨이 가르쳐준 모양인지 한국말도 떠듬떠듬 할 줄 알았다.
챙이 알려준 대로 음식에 조미료를 더 넣었더니 제이슨은 아주 맛있게 밥을 먹었다. 챙 덕분에 저녁식사 시간만큼은 화기애애했다. 챙이 오는 날을 나도 기다리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그들은 복도 끝 제이슨의 방으로 사라졌다.
“뭐, 차나 과일이라도 낼까?”
내가 물으면 제이슨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말했다.
“노 땡스.”
그리고 생각난 듯 그 사실을 확인시켰다.
“먼저 자도록 해. 우린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까. 괜히 방해는 말아줘.”
이 집에서 며칠이 지난 후 제이슨이 내게 주의를 주었다. 다 내 맘대로 해도 좋지만 단 하나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의 방에는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거나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발코니로 나갈 때도 나는 제이슨의 그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당부대로 그의 방을 피해다녔다. 복도 끝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빛 테두리가 보이고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조금씩 이곳 생활에 적응해갔다. 제이슨이 연구실에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고 산책을 나갔다. 사계절 내내 이파리를 떨구지 않는 아열대성 활엽수림 사이를 걸었다. 밤이 되면 이곳 기온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밤새 열이 나면서 앓았다. 제이슨에게 엄살을 부리지는 않았다. 약장에 약이 가득했다. 나는 약병들에서 이런저런 알약들을 꺼내 조제했다. 그후로 산책길에는 언제나 두꺼운 스웨터를 준비해 나갔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면 멀리서도 하얀 페인트칠이 된 목조건물이 보였다. 아치형의 창들과 내가 손수 매단 꽃무늬 면커튼들, 창틀에 내다건 종 하나. 모든 것이 내가 원하던 그대로였지만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던 마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나는 엽서를 썼다. 아직 가보지 못한 와카티푸 호에 유람선이 떠 있고 바다 가득 빽빽하게 돛배가 떠 있는 오클랜드의 전경이 엽서에 담겨 있었다. 나는 엽서에 하얀 페인트칠이 된 이층짜리 목조주택에 대해 썼다. 낙엽이 지지 않는 잎이 넓은 나무에 대해서도 썼다. 이곳은 겨울이 7월이라고도 썼다. 연간 2천시간 동안 햇볕을 볼 수 있다고도 썼다. 주저리주저리 관광용 카탈로그에서 베낀 내용을 썼다.
엽서의 끝은 늘 이렇게 끝났다. 꼭 놀러 와. 이곳은 지상의 낙원이야. 참 썬글라스와 썬탠 크림은 꼭 가져와야 해. 할말을 다 쓰고도 나는 필기구를 쥐고 있었다. 하얀색 목조건물은 크고 넓고 햇살이 늘 넘쳐나지만 미미의 이층짜리 집 같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렇게 써보냈다면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배부른 소리 하네. 여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야. 남편의 월급은 쥐꼬리만큼이고 아이들은 매일 징징대. 일하지 않고 편히 궁전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건 복이야, 복. 힘들더라도 참고 살아.
집 주위의 길들을 다 익히고 나자 나는 지도를 샀다. 오클랜드는 비행기로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편도 미리 알아두었다. 제이슨의 노란 스포츠카가 길에서 사라지자 나는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오클랜드 지도를 펼쳐들고 퀸 엘리자베스 2세 광장을 가로질렀다.
화산활동 때문에 평탄한 길보다는 경사가 많은 길이 특색 있었다. 낮 동안은 반팔 차림이 선뜩하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다. 자연림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허공에서 넓은 이파리를 가진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해가 들지 않았다. 내 고향집의 뒷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한눈에도 수령이 백년은 족히 됨직한 나무들투성이였다.
부띠끄와 레스또랑이 줄지어 선 파넬 빌리지 쪽으로 걸어내려온 것은 오후 두시쯤이었다. 빅토리아풍의 레스또랑을 지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고 다음 예정지인 앨버트 공원의 위치를 찾아 지도를 펼치던 참이었다. 누군가 내 팔을 치고 달려나갔다. 그 바람에 지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챙이었다. 챙은 나를 보지 못한 채 건너편 길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며 챙을 부르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챙이 뛰어간 그 골목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제이슨이었다.
제이슨은 다음날 아침 늦게 귀가했다. 무척 피로한 모습이었다. 면도를 하지 못했는지 지저분하게 털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오클랜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챙과 제이슨이 왜 그 시간 그곳에 가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직까지 제이슨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턱으로 손을 뻗어 수염을 쓱 더듬었다. 제이슨이 내 손을 휙 뿌리쳤다.
“아, 당신이 왜 매일같이 수염을 미는지 이제 알겠어. 기르기엔 수염 숱이 많지 않구나.”
제이슨은 목욕탕으로 들어가더니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여름방학이 되었지만 나는 제이슨이 약속했던 와카티푸 호의 여행건에 대해 떼쓰지 않았다. 오클랜드에서 그와 챙을 본 후로 나는 더이상 밤늦게까지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여행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이슨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야 단둘만의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또 챙이 있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몫의 짐을 챙에게 맡겼다.
우리는 마치 동네 친구처럼 퀸스타운 몰을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의외로 챙과 나의 취향이 비슷했다. 챙은 내가 열 벌이 넘는 옷을 입어보는 동안 찬찬히 지켜본 후 옷을 골라주었다. 우리는 폴로 가게에서 챙이 달린 똑같은 모자를 사서 썼다.
내가 엽서로만 보았던 와카티푸 호는 뉴질랜드에서 세번째로 큰 빙하호라고 챙이 내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호수의 귀부인’이라고 불리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돌았다. 과연 마오리족이 ‘비취 호수’라 부를 만했다. 나와 챙은 갑판으로 나가 쇠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지만 제이슨은 유람선을 탄 후 객실에만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로 제이슨을 불렀다.
“제이슨! 이리 나와요. 이 물빛 좀 봐.”
챙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가 천천히 천천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제이슨은 물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다섯살 때 해수욕장에서 파도에 휩쓸린 후로 물가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배를 탄 것만으로도 큰 용기라고 했다. 칭찬해줄 만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챙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야, 챙, 너 제이슨 본명이 뭔 줄이나 알어? 효경이야, 효경. 최효경.”
챙이 내 말꼬리를 물었다.
“희경?”
“아니.”
“혜경?”
혀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챙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른 치열이 활짝 드러났다. 나는 챙의 얼굴에 내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히죽거렸다.
“효경이라는 말 하나 발음 못하는 주제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챙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왓? 왓? 했다.
호수의 귀부인은 우리를 양 목장에 내려놓았다. 목동이 양털 깎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목동에게 목이 잡힌 양은 털이 다 깎일 때까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혼자 잠을 잤다. 챙과 제이슨은 술집에서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이 넘도록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일로 바빴다. 제이슨과 챙, 그리고 나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일일 패스를 사서 트롤리버스를 타고 웰링턴 시내를 돌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레스또랑에 들러 점심을 먹고 꽃가게에 들러 양팔이 끊어질 만큼 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안등이 켜질 때까지 울타리 안쪽에 빙 둘러 꽃들을 심었다.
언쟁 소리에 잠이 깼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가벼운 물건이 바닥에서 튕겨오르는 소리가 났다. 제이슨의 낮은 음성 위에 챙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동안 그들이 그렇게 다투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복도를 뛰어가 제이슨의 방문을 밀쳤다. 제이슨은 방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제이슨의 한쪽 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술병이 보였다.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챙의 한손에 과도가 들려 있었다. 제이슨이 나를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꺼져!”
그제야 나를 본 챙이 손에 들고 있던 과도를 떨어뜨리고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제이슨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소리질렀다. 꺼져!
침실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퍽퍽, 살집끼리 맞닿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챙인지 제이슨인지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다음날 일어나 부엌으로 갔을 때, 챙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토스트를 굽고 주스를 만들고 있었다. 제이슨은 면도를 하는 중이었다. 챙이 날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떠듬떠듬 국어책을 읽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우리 셋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빵 쪼가리를 씹어댔다. 빵을 씹을 때마다 제이슨의 뺨에 난 상처가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왜 싸웠냐고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2박 3일 코스로 오클랜드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제이슨이 관광투어를 이용하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귀에 담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도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네 시간 코스와 하루 코스 중에서 네 시간 코스를 골랐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앨버트 공원, 오클랜드 미술관, 오클랜드 도메인, 챙과 제이슨을 만났던 파넬 거리를 쏘다녔다. 가끔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고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결과 세시간 이십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와이테마타 항구에서 동쪽 길을 따라 하우라키 만을 걸었다. 만 가득 범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바람을 잔뜩 안은 돛이 생선의 배 같았다. 밤이 깊어 퉁퉁 부은 발을 끌고 호텔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잠을 잤다. 오랜만에 맞는 숙면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심은 꽃은 시들어 있었다. 나는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켜 한참 동안 마당에 물을 뿌렸다. 집안에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제이슨도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신혼여행 때 썼던 트렁크를 창고에서 찾아오고 장롱을 열었다. 아직도 새것 냄새가 장롱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서랍 몇개는 아직도 빈 채였다. 나는 아직도 오동나무가 베여 넘어지던 그때를 기억한다. 잠깐 실망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기척이 나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야광바늘이 새벽 두시 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제이슨의 방으로 간 건 내일이나 모레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제이슨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불규칙한 호흡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챙을 보았고 그 위에 바싹 붙어 서 있는 제이슨을 보았다. 제이슨의 바지가 허벅지에 걸쳐 있었다. 제이슨이 나를 보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당황한 순간에는 역시 그도 한국사람이었는지 한국말로 욕을 했다.
놀랄 일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침실로 돌아와 제이슨을 기다렸다. 제이슨은 곧바로 날 따라왔다. 이렇게 행동이 빠른 적도 있었나,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이슨의 얼굴에는 채 홍조가 가시지 않았고 낮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방엔 오지 말랬잖아.”
그 순간 나는 고향집 뒷산에서 우수수 일어나던 바람 소리를 떠올렸다. 그 소리가 들릴 때면 어머니는 말했다. 풍파(風波) 소리구나.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어.”
제이슨이 침실 구석에 놓인 트렁크를 발견했다. 그가 쩝, 입술을 빨았다. 성큼성큼 장롱 앞으로 다가간 그는 장롱문을 열고 내 핸드백을 꺼내들었다. 침대 위에 핸드백을 거꾸로 털자 내 여권과 통장, 한동안 바르지 않았던 루주와 분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그 속에 오클랜드행 비행기표가 여러 장 섞여 있었다. 날짜를 확인하던 제이슨이 눈을 찌푸렸다.
“아, 이제 알겠다. 그때부터 알고 있었군. 그런데도 난 까맣게 몰랐지? 생각보다 오래 참았네.”
여권을 집으려던 나보다 제이슨의 동작이 빨랐다. 제이슨은 내 여권을 반으로 찢었다. 통장은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넣었다.
“누구 맘대로 가? 올 때는 니 마음이었겠지만 갈 땐 내 마음이야. 이게 지금 와서 누굴 물 먹이려구?”
“그래도 갈 거야. 집에 가고 싶어.”
어지럼증 때문에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제이슨이 날 떠다밀었다.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천장이 하얗게 멀어졌다. 나는 우수수 풍파 소리를 들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오동나무 장롱 속에 갇혀 있었다. 밖에서 제이슨과 챙의 발소리가 났다. 힘껏 밀쳐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열린 침실문 너머로 부산히 움직이는 챙의 모습이 보였다. 챙은 불안해 보였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를 어떻게 할 거야? 설마.”
“입 닥치고 있어.”
챙이 새어나오는 비명을 제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어쩔 거야? 이젠 어떻게 할 거야?”
“그렇다고 그녀를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야.”
챙이 울먹이듯 말했다.
“난 널 사랑해.”
공포보다는 배가 고팠다. 나는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후 두 팔로 감쌌다. 오클랜드에 다녀온 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벌떡 일어서서 온몸으로 장롱문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오동나무 장이었다. 오동나무 장롱이 내게 오동나무 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쇳소리만 났다. 백미터 남짓 떨어진 옆집에 그 소리가 전달될 리 없었다. 손톱으로 문을 긁었다. 손톱이 금세 들떠 일어났다. 이번에는 내 머리 위에 걸려 있던 옷들을 뒤적여 허리띠를 찾아냈다. 허리띠의 버클로 열쇠 구멍을 후벼보았지만 허사였다.
제이슨이 장롱에 나이프를 던졌다. 파르르 소리를 내며 나이프가 장롱에 꽂혔다. 제이슨이 장롱 앞을 어슬렁댔다.
“방문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우린 아무 일 없었을 거야. 안 그래? 이게 다 네가 자초한 거야. 알아? 이건 어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가자. 약속해. 그럼 문을 열어줄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갈증과 피곤함 때문에 다시 실신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실신을 하면서 배변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갈증 때문에 입술이 타들어가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제이슨을 부르려 했지만 혀가 돌돌 말린 듯 발음이 되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 감각이 없어졌다. 며칠을 그렇게 장롱 안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후 장롱문이 열렸다. 악취 때문인지 제이슨이 욕설을 내뱉었다. 챙이 머리를 제이슨이 두 다리를 잡고 나를 장롱에서 들어냈다. 나는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챙이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정말 죽었나봐.”
일어설 기운도 없었지만 나는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제이슨이 내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내 코에 제이슨이 귀를 가까이 들이댔다.
“아직 살아 있어. 우선 차로 옮겨야겠어. 넌 가서 트렁크 좀 열어.”
챙이 후닥닥 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제이슨이 날 넣을 주머니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가 창고로 간 후에 나는 네 발로 기어 목욕탕까지 갔다. 선반 위에 날이 잘 선 제이슨의 면도칼이 보였다. 나는 그 칼을 바지 주머니에 숨겼다.
밖에서 챙이 다급하게 제이슨을 불렀다.
“빨리 나와. 시동도 걸어놨어.”
사람 하나를 넣을 만한 주머니는 흔치 않았다. 창고에서 한동안 부스럭대던 제이슨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장롱에서 내 코트를 꺼내 내 전신을 덮었다. 날 어깨에 짊어지려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끙 소리를 내며 도로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내 두 다리를 잡았다. 그는 내 발목을 잡고 거실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문지방에 등이 쓸리면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꽉 물었다.
제이슨이 숨을 몰아쉬면서 잠시 방심한 사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키면서 면도칼을 휘둘렀다. 제이슨이 턱을 움켜쥐면서 물러났다. 무작정 일어나 현관 밖으로 뛰었다. 두 다리가 썰어놓은 낙지처럼 제각각 다르게 움직였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칼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챙을 위협했다. 소심한 챙은 쉽게 물러났다. 운전석에 앉아 차문을 걸어잠갔다. 핸들을 쥐고 힘껏 악쎌을 밟았다. 제이슨의 노란 스포츠카가 힘찬 발진음을 내며 울타리 쪽으로 튀어나갔다. 내가 정성껏 가꾼 꽃들이 자동차 바퀴에 짓밟히는 것이 속상했다.
울타리를 들이박고 거리로 뛰쳐나간 차는 지그재그로 10여분 달렸다. 오른쪽에 달린 운전석에서 하는 운전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았다. 차들이 클랙슨을 눌러대며 멀찌감치 피해 달아났다.
차는 보도 위로 덥석 올라가 소방펌프를 들이박고 멈췄다. 펌프에서 분수처럼 물길이 솟아올랐다. 싸이렌 소리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탈수 증세 때문에 병원에서 퇴원한 것은 3일 후였다. 제이슨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제이슨의 턱에 커다란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제이슨은 모든 것이 오해라고 널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경찰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제이슨은 그것이 내가 쥔 마지막 패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얼마 후 제이슨의 부모가 날 찾아왔다. 제이슨의 부모는 진작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제이슨의 어머니가 울었다.
“걔가 아직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니……”
제이슨의 아버지는 시종일관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여자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조달되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끊길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계를 위해 일해본 적이 없었다.
그후 일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아침 일곱시 반이면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서른이 훨씬 넘은 여자를 새로 받아줄 약국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곳은 선배가 하는 작은 약국으로 선배가 출산을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만 봐주기로 했다.
만원 전철 속에서 몸이 사정없이 휘둘릴 때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그때 그의 방을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지속될 수 있었을까.
친정 부모님께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5개월만 더 참지. 우리의 결혼생활은 19개월간 지속되었다. 처녁적처럼 한달에 한번 고향집에 들렀다. 뒷산의 오동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동안 이혼 절차는 마무리되었고 제이슨과는 딱 한번 통화를 했다. 그는 침실을 차지하고 있는 장롱을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턱에 난 상처가 보기 좋지 않아 상처를 가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염을 기르는 중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난 생각했다. 제이슨은 부모의 도움을 받기 위해 또다시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다. 그의 부모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정확히 한달 보름 후에 장롱이 도착했다. 비좁은 현관과 가파른 계단 때문에 인부 다섯이 매달리고도 끙끙댔다. 그들은 웃돈을 요구했다.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오동나무라면 이렇게 무거울 리 없어요. 장롱을 맞췄다는 공장이 어딘지 모르지만 아마 공장에서 나무를 바꿔치기 했을 겁니다.”
늙수그레한 인부가 알은체를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러 경기도의 가구공장까지 갈 기운이 내게는 없었다.
이번에는 조심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이미 장롱 곳곳에는 심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 열쇠 구멍 위에 난 나이프 자국은 한눈에 띄었다. 장롱 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손톱으로 긁었던 자국과 허리띠 버클에 파인 흠이 선명했다.
장롱 안 내가 갇혔던 곳에는 다른 곳보다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곳이 있었다. 아마도 나의 배설물이 스며든 자국 같았다. 제이슨은 한번도 서랍을 열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서랍은 길이 들지 않아 잘 열리지 않았다. 첫번째 서랍에 앨범과 일기장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나의 방은 너무 비좁아 장롱을 들여놓고 나니 씽글 싸이즈의 침대 하나를 놓기에도 버거웠다. 할 수 없이 열두 자짜리 장롱을 두 개의 방에 나눠 넣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애시당초 여덟 자짜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정오가 되면 약국 유리창으로 햇살이 밀고 들어온다. 나는 항생제 연고와 구강청정제, 피임약 등이 진열된 유리판 위에 두 팔을 괴고 까무룩 졸곤 한다. 그러면 햇살이 꽉 들어차던 하얀 페인트칠이 된 그 목조주택의 거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트롤리버스와 부띠끄와 레스또랑이 늘어선 파넬 빌리지의 빅토리아풍 건물들과 오클랜드의 울퉁불퉁한 구릉들, 와이테마타 항구와 하우라키 만을 가득 메운 범선들의 행렬이 약국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다. 그러면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