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

안톤 허

“저 사람 당신 작가 아니야?” 남편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한다. 나는 몸을 돌려 북적이는 식당 안을 둘러본다. 때는 2월이고 서울은 아직 팬데믹에 그다지 심하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남편에게 묻는다. “작가라니 누구? 신 작가? 박 작가? 강 작가? 으, 설마 황 작가는 아니겠지?”

“강작가는 죽었어, 자기야. 1943년에 사망했다고. 내 생각엔 보라작가인 거 같아.”

“확실해?”

“아니, 안 확실해. 나 보라 작가 서퀴 때 딱 한 번 봤으니까.”

“그치만 자기는 얼굴 절대로 안 잊어버리잖아.”

나는 돌아서서 사람들을 훑어본다. 단조로운 겨울 옷을 입은 서울 사람들. 옷만 잿빛과 밤색인 게 아니라 얼굴빛과 머리색도 바깥의 풍광처럼 창백하고 윤기가 없다. 한국에서 겨울은 죽은 계절이다. 내 눈에는 보라 작가가 안 보이지만 그조차 확실하지는 않다.

음식이 나오고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그 다음으로 일어난 일은 PDF 파일의 글자가 변한 것이다.

나는 책이 아니라 PDF 파일을 번역한다. 계약도 PDF 파일로 한다. PDF는 법이며 불가침이다. 원본 작품도 불가침이므로 이것은 적절하다.

이 PDF는 그렇지 않다. 화면의 글자들이 갑자기 깜빡거리더니 페이지의 단어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문장 끝의 보어가 문장 앞의 주어와 자리를 바꾸더니 도로 끝으로 돌아간다.

나는 눈을 깜빡인다. 세게 깜빡인다.

나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다. 우리집의 작업실에는 밝은 자연광이 비춘다 – 어쩌면 너무 밝은 건지도 모른다. 문학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방에 대한 구체적인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내 판타지는 큰 책상과 쏟아지는 자연광을 포함한다. 나는 반투명한 블라인드를 내리고 나의 커다란 책상과 커다란 곡면 모니터 앞에 앉는다. 나의 자기만의 방 판타지에 최근 새로 도입한 장비들이다.

문장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정말?) 어찌 됐든 단어들은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텍스트는 불가침이 된다.

조금 안심하며 나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간다.

번역가는 자기 작가를 스스로 발견한다고들 말한다. 가끔 내가 그냥 책을 펼쳤는데 문장이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너는 이 책을 번역해야만 해.” 보라 작가가 그랬다. 나는 보라 작가의 책을 도서전에서 처음 보았다 – 런던이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이름만 요란한 행사가 아니라 서울의 홍대앞 동네에서 하는 거 말이다. 진짜 독자들이 좁은 골목에 두 줄로 늘어선 부스, 책 오 영광스러운 책으로 가득한 부스들 사이로 지나 다니는 그런 도서전. 보라 작가를 찾아낸 장소인, 서울의 작은 사변문학 전문 출판사가 운영하는 부스에서 내가 진짜 독자에서 이름요란한출판계 업자 모드로 변신하여 나의 비유적인 발을 출판사의 비유적인 문에 들이밀고 예의바르지만 확고하게 나는 이 책을 번역하고 싶으니 사장님을 뵐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아마 그래서 출판사측이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책이 우리를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책은 언제나 자기 독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역가, 원작자의 생각을 쫓아다니는 그림자인 번역가보다 더 열성 독자가 대체 누가 있겠는가.  

커피숍은 문학 번역가들의 자연 서식지이다. 우리는 커피숍에서 작업하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커피숍에서 일을 미루고 노닥거리고 커피숍에서 죽는다. 그리고 우리는 커피숍에 모이기도 한다.   

나는 동료 번역가이자 친구인 이씨와 함께 있다.

너 달라 보인다, 이씨가 나에게 말한다.

나이 들어 보여? 나는 마스크를 만진다. (커피숍 방침으로 실내에 있을 때에도 마스크를 써야만 한다. 음료를 마실 때만 마스크를 내리라고 한다.) 마스크 쓰면 어려 보이는 줄 알았는데.

나이들어 보인다고 안 했어, 네가 그랬지. 그리고 늙어 보인다는 게 아니고 달라 보인다고. 보라 작가 원고는 얼마나 했어?

거의 끝났어. 한창 절정 부분이야.

아, 이씨가 말한다. 마치 뭔가 알겠다는 듯이.

나는 화제를 바꾼다. 있잖아, 나 얼마 전에 진짜 이상한 일 겪었어. 화면에서 단어가 자꾸 바뀌더라고.

새 컴퓨터 살 때가 된 거 아냐?

아냐, 글자가 말하자면 저절로 막 움직이더라니까. PDF 파일이 혼자서 변했어. 나도 몰라. 일을 너무 많이 했나 봐. 아니면 너무 적게 했든지. 

잠깐만, 내 시인을 저기서 본 거 같아.

이씨는 다른 테이블로 인사를 하러 간다. 나는 어느 시인인지 보려고 굳이 몸을 돌리지 않는다. 여기는 합정이고 아무 커피숍에 가도 아마 시인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금방 돌아오고, 어쩐지 당황한 듯 보인다.

이야, 창피 당할 뻔했다. 진짜로 그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남편은 지난 주에 음식점에서 보라 작가를 봤다고 했어. 사실 난 남편이 진짜로 보라 작가를 본 건지 잘 모르겠어. 네가 작가하고 마주친 제일 이상한 장소가 어디야?

이씨는 잠시 침묵한다. 내가 시선을 들어 이씨가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긴 순간이다.

제일 이상한 장소는, 여기서 멀지 않았어. 홍대에 있는 클럽이야. 너도 알지, ‘우리’ 클럽 말이야. 그리고 그 시인이었어, 내가 방금 본 줄 알았던 그 사람. 내가 클럽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시인이 거기 있더라고. 그래서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우리, 그러니까 편집자하고 내가 그 시인 책을 끝내는 중이었거든. 내 생각보다 교정본 보는 데 오래 걸렸어. 작업하는 내내 그 시인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있었어. 보통 때는 번역 끝나면 목소리도 없어지는데 이 시인은 편집하는 동안에도 계속 내 곁에 남아 있었던 거야. 교정 보느라고 정말 집중했는데 그 동안 내내 그 시인이 나를 안내해줬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날 격려해줬어. 위험을 무릅쓰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필요하면 자기 주장을 하라고. 마치 그 시인하고 아주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것 같았어, 주  5일, 하루에 여덟 시간씩 넉 달 동안 말이야.  가끔 보면 번역가는 파트너나 여자친구보다도 자기가 번역하는 작가하고 더 깊고 친밀한 사이가 되는 거 같아. 어쨌든 그래서 화장실에서 시인하고 마주쳤는데 마치 내 머릿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아서 충격을 받았어. 그리고 난 그 시인이 여행갔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이야! 인도에 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이렇게 소리쳤어. 시인도 나한테 똑 같은 말을 외쳤어. 우리는 똑바로 서로를 향해 걸어갔어. 내가 손을 뻗고 시인도 나한테 손을 뻗었는데 우리 손가락 끝이 부딪쳤어, 너무 비현실적이지만 마치 아주 깨끗한 유리창이 우리 사이에 있는 것 같았어. 근데 그건 창문이 아니라 거울이었어. 

이씨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고 나는 이씨가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씨는 말을 잇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 보더니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가야겠다, 만나서 수다 떠니까 좋다, 라고 말했다.

한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내 뒤에 있는 커피숍의 벽면이 거울 타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라 작가가 오하이오에서 학술대회를 마치고 밤에 인디애나로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고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 입구와 창문들이 전부 판자로 막힌 폐촌을 지나왔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보라 작가는 그 마을이 폐촌이라는 사실보다도 나무판으로 막아놓은 상점과 건물 앞면에 낙서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 더 무서웠다고 했다. 한밤중이었고 폐촌에는 가로등이 없었지만 거리에 쓰레기도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쥐도 없고 동물도 한 마리도 없었다. 때는 대략 자정 쯤이었는데,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텅 빈 고속도로에서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며 달리던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보라 작가는 아직까지도 그 날의 자정과 동틀 무렵 사이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전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작가님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거 아닐까요, 내가 농담을 했다. 그래서 작가님은 가짜이고 진짜 보라는 어디 다른 데 가 있는 거예요.

그럴 지도 몰라요. 지금은 내가 진짜 보라겠죠.

한국 문학 진흥원은 보라 작가의 영어 이름을 계속 잘못 쓴다. 보-라(Bo-ra), 보-라(Bo-Ra), 보 라(Bo Ra).

요즘에는 한국 이름을 이렇게 쓴다고, 새로운 표기법을 들고 나올 때마다 진흥원 측은 주장한다. “우리는 한국 관습과 정체성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고요. 예를 들면 성을 먼저 써야 해요. 한강 작가를 보세요, 영어 번역서에도 성부터 쓰잖아요.”

“민족주의적인 유행 때문에 사람들 이름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어요.” 내가 반박한다. “그러면 마케팅이 망한다고요. 이름을 바꿔 쓰면 독자들이 헷갈리는데 독자들은 헷갈리는 걸 정말, 정말 싫어한단 말이에요. 게다가 한강 작가는 워터스톤(영국의 서점. “물 바위”라는 뜻. 역주) 서점에서 “강” 서가에 분류돼 있는데 이건 워터스톤 사가 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 유명하신 부커상을 타도 그렇게 된단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하던 중에 다른 번역가가 나에게 살짝 알려준다. 진흥원은 번역가가 하는 말은 무시해도 작가가 하는 말은 감히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에게 연락해서 중재를 요청한다.

보라 작가는 “아, 저 그 이름들 전부 불려 봤어요, 보라, 보-라, 보 라, 다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혹시 지난 토요일에 망원동에 가셨던 적 있나요?”

“아뇨, 집에 있었어요. 다들 요즘에는 집에 있잖아요, 팬데믹이니까. 왜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보라 작가는 로봇이다 . . . )

“그런데요, 다른 권역 번역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보라 작가가 말한다.

“신나네요! 제 메일 주소 주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라고 해 주세요.”

“고마워요, 보라.”

나는 이것이 “그럼 이만”에 해당하는 작별의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라 작가가 덧붙인다.

“아니 잠깐, 제가 보라고 선생님은 안톤이잖아요. 고마워요, 안톤.”

“천만에요. 안톤.”

화장실 거울을 볼 때면 이제 나는 절반쯤은 거울에 보라 작가의 모습이 비칠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 닦으면서 가끔 나는 생각한다. 거울에 비친 사람이 보라 작가가 아니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지? 지금 나를 바라보는 거울 속의 사람은 보라 작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보라 작가를 번역한다면 나의 남편조차 눈치 채지 못하게 될까? 남편이 매일 저녁을 함께 먹는 사람은 나일까 내가 번역하는 작가일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남편이 나와 보라를 구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남편이 음식점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보라 작가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입 안의 치약을 뱉는다. 입을 물로 헹군다. 입을 닦는다.

이런 일을 하는 건 대체 누구인가?

팬데믹의 1년 동안 나는 여러 행사에 참여한다. 기고문을 쓸 때마다, 행사에서 발표를 할 때마다 나는 보라 작가에서 회복되어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보라 작가의 번역 원고는 이제 조판 단계에 접어들어 더 이상 내 작업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즉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뜻이다. 진흥원은 내가 너무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백인 번역가로서 나는 어느 백인 전도사나 아마추어 문학애호가의 조수 노릇을 하는 공동번역자 정도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언어 조합에서 나 정도 능력을 가진 성공적인 백인 번역자는 아주 희귀하고 그러므로 진흥원은 나라는 현실을 참아줘야만 한다. 다시 말해 맨날 똑같은 지긋지긋한 일들이 또 계속되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나선다. 나의 커리어는 비록 보잘 것 없더라도 어떻게든 굴러간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건이 더 일어난다. 나는 보라 작가의 다른 번역가에게서 메시지를 받고, 우리는 보라 작가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한다.

다른 번역가는 나에게, 슬라브 어문학으로 진짜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라니 정말 편해, 작가가 자기 이름을 그냥 키릴 문자(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등을 표기할 때 쓰는 문자. 역주)로 표기하면 되니까. 그리고 내 번역을 읽을 수 있고. 전에는 한국인 작가가 내가 번역한 자기 작품을 읽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난 그 반대야, 라고 나는 대답한다. 난 항상 겪는 일이야. 영어 번역은 모든 사람이 다 비평하려고 하거든. 보라 작가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까 원한다면 자기 작품을 그냥 자기가 직접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보라 작가는 나한테 마음대로 작업하라고 완전한 자유를 줬고 나한테 한 번도 자기 작품 번역을 보여달라고 한 적이 없어. 동종업계 종사자에 대한 예의라는 거야.

맞아, 다른 번역가가 말한다. 보라 작가는 물론 러시아어하고 폴란드어를 번역도 하니까. 우리를 이해하지. 우리와 같아. 그리고 보라 작가의 번역가로서 우리는 그녀와 같아.

나는 다른 번역가에게 보라, 보-라, 보 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번역가가 이모티콘으로 깔깔 웃는다.

그럼 우리가 그건가 봐, 다른 번역가가 말한다. 보라 작가는 보라. 나는 보-라, 너는 보 라야.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한다.

하여간 즐거운 주말 보내, 다른 번역가가 말한다.

그래, 내가 대답한다.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