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김소연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손아귀
탁상시계를 던져본 적이 있다
손아귀에 적당했고 소중할 것도 없었던 것을
방바닥에 내던져
부서뜨려본 적이 있다
부서지는 것은 부서지면서 소리를 냈다
부서뜨리는 내 귀에 들려주겠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고백이 적힌 편지를
맹세가 적힌 종이를
두 손으로 맞잡고
천천히 찢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가벼운 것이잖아 하며
손목의 각도를 천천히 틀면서 종이를 찢은 적이 있다
찢어지는 것도 찢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찢고 있는 내 귀에 기어이 각인되겠다는 듯 날카롭게
높은 소리를 냈다
무너지는 것들도
무너지는 소리를 시끄럽게 낸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을 항변하는
함성처럼 웅장하게 큰 소리를 냈다
이 소리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소리들을 내가
기억하는 것이 나의 무고를 증명한다는 듯
기억을 한다 하지만
망가지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조용히 오래오래 망가져 간다
다 망가지고나서야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는 것이다
기억에만 귀를 기울이며 지나간 소리들을 명심하느라
조용히 오래오래 내 귀는 멀어버렸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내가 키우는 식물이
자객처럼 칼을 뽑아 나를 겨누고 있다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매일매일 무화과처럼 나를 말린다
시원하게 두 동강이 나서
벌레가 바글대는 내부를 활짝 전개할 날을 손꼽는다
오늘 아침 나의 식물은
기어이 화분을 두 동강 냈다
징그럽고 억척스럽고 비대해진 뿌리들이
그 안에 갇혀 있었다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 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 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 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그는 더 웅크렸고 웅크림으로 통째로 집을 만들고있었어. 그 속에 들어가 세세년년 살고 싶다면서.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는 하루에 축복을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 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쉬운 고백들을 참으려고 여전히 꿈속에서조차 이를 갈고 있니. 너는 여기가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만난 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이거나 외치는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면서 노래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가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는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