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벌레

정영문

Illustration by GLOO / Yejin Lee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이 우리를 불러모았을 때 우리 일행은 모두 넷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 배추나 무를 뽑아 본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우리 중 두 명은 배추를, 나머지 두 명은 무를 뽑기를 원했고, 우리는 배추를 뽑을지 무를 뽑을지를 결정해야 했다. 배추도 뽑고 무도 뽑을 수는 없었다. 배추를 뽑는 일과 무를 뽑는 일은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었다. 나는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때 우리를 안내하는 사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무를 뽑는 일은 배추를 뽑는 일에 비해 훨씬 힘들다고. 그러니 기운이 부족한 사람은 배추를 뽑으라고, 그리고 기운이 남아도는 사람은 무를 뽑으라고. 그러면서 그는 키가 작은 사내와 나는 배추를, 나머지 두 사람은 무를 뽑는 일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내는 배추를 뽑는 일은 무를 뽑는 일에 비해 일당이 적을 거라고 했다. 그만큼 일이 덜 힘드니까. 배추도 보기보다 잘 뽑히지 않지만 무는 생각 이상으로 훨씬 안 뽑힌다고.
 
그런 다음 그는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일당과 함께 일을 한 양에 따라 주어지는 수당이 있을 거라고 했다. 일종의 성과급이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그만큼 일을 많이 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적게 벌고 싶으면 그만큼 일을 적게 하면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돈을 벌러 가는 마당에 이왕이면 돈을 적게 벌기 위해 일을 적게 하는 것은 생각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돈을 적게 벌고 싶지 않음에도 일을 많이 할 수 없어 돈을 적게 벌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무슨 근거에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우리를 속이려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우리를 속이려 들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속아넘어가주지, 하지만 속아넘어가주는 건 단 한 번뿐이야,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속일 의도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만큼은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지시 사항을 얘기했다. 그는 처음 얘기하는데도 다시금 얘기하는 것처럼 지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지시 사항을 얘기할 때면 곧잘 그러듯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그렇게 하자 그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차례로 한 사람씩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는 우리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본래 뭘하는 사람인지는 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뭘 하러 온 사람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 한 가지와 중요한 것 네 가지를 얘기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모두 여섯 가지를 얘기했다. 그 여섯 가지 모두가 우리에게 중요했다. 그 여섯 가지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 여섯 가지 모두 똑같이 중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네 사람 중 누구도 그것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에게 그것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사람에게나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 중요성은 스스로 실감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스스로 실감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말을 빙빙 돌려 요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얘기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그가 말한 중요한 것들을 숙지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작업이 며칠, 또는 길게는 일주일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나는 옷은 이틀 또는 사흘에 한 번은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주위는 아직도 어두웠다. 어둠이 어딘가에서 다 자라 있을 배추와 무를, 그리고 그것들을 뽑으러 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나머지, 아직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차에 올라탔고, 출발을 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이 운전을 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였다. 우리는 우리의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대략 어디쯤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서로를 소개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라곤 없는 것처럼. 무와 배추를 뽑으러 가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알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아직 새벽이었고, 그래서 졸음들이 가시지 않아 다들 졸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졸음이 느껴졌지만 막상 잠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창밖으로, 조금씩 환해지는 아침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곧 우리는 도시를 빠져나갔고, 국도로 들어섰다. 이제 완전히 환해져 있었다. 멀리 과수원 하나가 보였고, 문득 언젠가 어떤 과수원에서 일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일당을 받고 사과를 따는 일을 했었다. 그날의 일과 관련해서는 사과를 따는 일이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이, 특히 하루일을 끝낸 후에는 목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뻐근했던 일이, 그리고 사과를 실컷 먹었던, 하지만 사과를 실컷 먹은 것이 일의 고단함을 덜어주지는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내가 먹을 수 있었던 사과는 성한 것은 아니었다. 성한 사과는 손은 댈 수 있었지만 입을 대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가 먹거나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땅에 떨어진 사과뿐이었다. 과수원 주인과 관리인은 땅에 떨어진 사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았다. 일단 땅에 떨어진 사과는 그들의 소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무에 매달린 사과 몇 개를 일부러 슬쩍 땅에 떨어뜨린 후 그것을 주워먹기도 했다. 땅에 떨어진 사과는 약간 멍이 들어 있었지만 맛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가지에 붙어 있는 사과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리는 짓은 주인 몰래 해야 했다. 주인은 그의 인부들이 주워먹기 위해 사과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주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탄 차가 과수원을 지나 그 과수원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서 나는 곧 내가 일을 했던 과수원에 대한 생각은 그만두었다. 하지만 과수원 자체에 대한 생각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다른 과수원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과수원은 내가 과수원에 대한 생각을 할 때면 모든 과수원에 대한 생각의 끝에서, 또는 모든 과수원에 대한 생각을 제치고 떠오르는 과수원이었다. 그리고 그 과수원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의 과수원이었다. 그 과수원은 내가 살던 마을 앞 들판의 끝자락에 있었다.
 
당시 아이들은 그 과수원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것은 그곳이 마을과는 동떨어져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곳 주인 때문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그곳 주인이 성격이 아주 사납고, 생긴 것도 사납게 생겼으며,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집에는 아주 사나운 개들이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중 그와 접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오고 있었다. 외지에서 온 인부 한두 명이 그의 일을 거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그래서 그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았으며,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무서운 상상이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그의 과수원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의 호기심은 커져갔고, 우리는 끝내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고, 어느 날 밤 사과 서리를 하러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과수원에 도착한 우리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수확기였음에도 사과는 거의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사과를 몇 개 딴 우리는 또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곳 사과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과일로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병에 걸린 듯 과실은 크기가 작았고, 썩은 곳이 많았다. 그리고 땅바닥에는 낙과가 수두룩했다. 우리는 몇 개를 땄고, 잠시 선 채로 그것을 맛보았다. 그때 한 아이가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배였다. 부서진 배 한 척이 과수원 안에 있었다. 그 배가 왜 과수원 안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전 그 과수원이 강이었다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곳은 강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가 그 배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과는 별맛도 없었다. 우리의 실망은 컸고, 곧 우리는 철수를 결정했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 앞에 희미한 커다란 형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먼저 그를 발견한 아이들은 도망을 쳤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내게서 몇 발자국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다행히도 그의 손에 개를 묶은 줄이 들려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발걸음이 제대로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곧 그에게 붙들리게 될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가 취한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있기만 할 뿐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문득 그에 관한 또다른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다리를 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상황은 내게 좀더 유리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그러한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고,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는 부축을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그러한 그의 모습은 불행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기운을 차렸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붙잡으러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선채로 누군가가, 내가 그에게로 와주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좀더 걸음을 빨리했고, 마침내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을 때에도 그는 유령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서있었다. 결국 나는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얼마 후 마을 앞 논에서 우연히 오래된 도자기들이 발견되었고, 그 일대는 대대적으로 파헤쳐졌다. 그리고 발굴 지역은 그의 과수원까지 넓혀졌다. 고고학자들이 학생과 인부들을 데리고 왔다. 땅에는 구획이 그어졌고, 줄이 쳐졌으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곧 도자기의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밤이면 그의 과수원은 사과를 몰래 따는 대신 몰래 깨진 도자기를 주우러 다니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사이에도 그의 과수원 한쪽 귀퉁이에 있는 그의 집만큼은 대문이 닫혀 있었고, 그에 더해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은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사이에도 그는 비록 죽어가고 있긴 했지만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얼마 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 과수원이 그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나는 그 마을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수원을 떠올릴 때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서리를 하던 그날 밤 갑자기 나타나 전혀 미동도 없이 서있던 그곳 주인의 모습과 함께 과수원에 있던 부서진 배가 그것이다.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았던 그 부서진 배는 그 과수원 주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지만 끝내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무런 단서가 되지 못하는 어떤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부서진 배와 과수원 주인에 대한 기억을 접었다. 그러자 어느 날 어느 안개 낀 강가에서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나타낸 어떤 부서진 배 한 척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과수원의 부서진 배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고, 그곳 주인의, 서리를 하던 밤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끝이 없는 생각이었고, 나는 창밖을 보며 그 기억들을 떨쳐버렸다.
 
그때 창밖으로 댐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발전용 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댐은 내가 생각하는 발전용 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홍수를 막는 등의 일을 하는, 수위 조절용 댐 같았다. 댐은 그 자체로는 그렇게 거대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까이서 보자 충분히 거대하게 보였다. 하지만 댐에서 방류되고 있는 물줄기는 빈약해 보였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댐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곧잘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다른 인부들과 함께 배추뽑는 일을 하러 차를 타고 가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가 댐에서 떨어지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당연히 거꾸로 떨어지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나는 그의 자세를 거꾸로 바꿔놓았다. 그는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떨어졌고, 나는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표정까지 볼 수는 없었다. 그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거센 물줄기 소리에 파묻힌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완전히 떨어져 하얗게 거품이 이는 수면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나의 상상은 그쳤다.
 
조금 후 차가 멈췄고, 우리는 어느 휴게소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고,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키가 작은 남자가 얼마 전 자신이 일당을 벌기 위해 한 일을 얘기했다. 그는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뽑았다고 했다. 그 미나리꽝에는 거머리가 장난이 아니게 많았소, 그가 말했다. 그는 바지를 걷어올려 거머리에게 물린 자국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상처 자국이 거머리에게 물려 생긴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는 거머리가 다리에 파고드는 느낌이 좋았다고, 싫지 않았다고, 그래서 거머리는 상관하지 않았다고 했다.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는 느낌이 어땠는지 아시오, 그가 말했다. 마치 헌혈을 하는 느낌이었소. 우리는 놀랍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때 덩치가 아주 큰 사람이 자신은 한때 참치를 잡기도 했다는 말을 했다. 그는 힘깨나 써 보였다. 그는 무를 뽑기로 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무를 뽑는 일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길이가 이 미터도 넘으며 무게가 이백 킬로그램도 더 나가는 참치의 꼬리에 잘못 맞게 되면 다칠 수도 있다고, 실제로 자신도 여러 번 다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참치를 잡는 사람 중 참치 꼬리에 다쳐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참치 꼬리에 다쳐봐야 비로소 참치잡이 어부가 된다고 했다. 나는 어선을 타본 적이 없었기에 한 번도 참치를 잡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정어리를 포함해 어떤 생선도 내 손으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차가운 물과, 밤이 되면 더 차갑게 느껴지는 물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내가 상상한, 거친 파도와 사나운 바람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고기잡이는 파도와 바람과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는 살면서 무를 뽑는 일과 같은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식으로, 그리고 무를 뽑는 일은 일로도 칠 수 없다는 듯 무를 뽑는 일에 대해 얘기했다. 그사이에도 모자를 눌러쓴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언젠가 내가 한 적이 있는, 밤을 딴 일을 얘기할까 하다가 말았다. 밤을 따다가 잘못해 밤송이가 머리에 박혀 고생을 한 얘기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우스운 일이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머리와 참치에 관한 얘기가 더 나왔다. 조금 후에 키가 작은 사내가 뭐라고 하자 덩치가 큰 사내가 뭐라고 했고, 그러자 키가 작은 사내가 다시 뭐라고 했다. 하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벙어리는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무거워 보이는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가방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가 궁금했다. 가방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는 뭔가가, 들어 있기에 적당한 어떤 것이, 또는 그렇지 않은 어떤 것이 들어 있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주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도 아주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는 누구도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는 오직 귀찮다는 표정만 지었다.
 
그는 게으른 사람들이 파리를 쫓거나 양말을 벗을 때, 또는 짐을 싸거나 식사를 할 때 짓기도 하는 귀찮은 표정을 파리를 쫓거나 양말을 벗거나 짐을 싸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귀찮은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그처럼 잘 지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지금껏 본 사람 가운데 귀찮은 표정을 가장 잘 짓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를 쳐다보고 있자 어떤 권투 시합에서 승리한 선수의 손을 번쩍 들어줄 때처럼 세상에서 귀찮아하는 표정을 가장 잘 지을 줄 아는 사람을 뽑는 대회에서 승리한 그의 손을 번쩍 들어주는 장면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는 우승 소감을 간단하게 말할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 스스로 기울인 노력에 대해 얘기할 것이었다. 그는 노력은 필요 없었다고, 본래 자신은 그렇게 태어났다고 말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갈채를 보낼 것이다.
 
마침내 일행 중 한 명이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묻자 그는 그것이 아주 귀찮은 질문이라도 된다는 듯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소방수였다고 대답했다. 소방수가 매사를 귀찮아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방수가 매사를 귀찮아하면서도 할 수는 없는 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탄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운전을 하던 사람이 뭐라고 했다. 그는 수박이 어쩌고저쩌고했다. 나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길 한가운데에 트럭 한 대가 전복되어 있었고, 그것에 실려 있던 수박들이 길에 나뒹굴어 있었다. 성한 수박들도 있었지만 깨진 수박들이 더 많았다. 깨진 수박들은 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박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 채로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그것은 언젠가 꾼, 어떤 언덕에서 수많은 배구공들이 굴러내려오는 꿈만큼이나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깨져 빨간 속살이 드러난 수박들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환하게 웃고 있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수박을 실은 트럭을 운전하던 사람은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 보였지만 그 사고로 약간 넋이 나간 듯,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가 만든 상황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가 그에게 괜찮은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쪽 길을 막고 있는 수박들을 치웠다. 우리는 수박 치우는 일을 마저 해주고 싶었지만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다른 할일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우리 차에 탔다. 우리가 트럭 운전사에게 다시 한번 괜찮은지 묻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괜찮은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 누군가가 수박 한 통을 갖고 탔다. 우리가 한 일에 비하면 그 대가로 수박 한 통이 과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차에 탄 후에도 트럭 운전사는 아직 정신이 차려지지 않은 듯 널브러져 있는 수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출발했고, 나는 내가 보게 될, 배추에 기생하는 배추벌레에 대해 생각했다. 꿈틀거리는 파란 배추벌레를 좋아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내 기준에 따르면 배추벌레를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행실이 아무리 안 좋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배추벌레는 잠시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 그야말로 온통 머릿속을 채워도 좋은 것이었다. 나는 배추벌레로 시작해 자유자재로 번져나가는 생각들을 자유자재로 번져나가게 했다. 하지만 생각들은 끝내 배추벌레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만사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고있으면서도 그의 귀찮아하는 표정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자고있는 모습만으로는 그가 모든 것이 귀찮아져 자고 있는지, 아니면 자는 것 또한 귀찮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후 산길로 들어선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며 나아갔다. 좁고 험한 산길은 쉽게 끝이 날 것 같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끝이 나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배추와 무 밭이 있었다. 배추와 무 밭은 아주 넓었다. 실제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니,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우리를 배추와 무를 뽑는 일을 감독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데려갔다. 감독은 배추와 무를 뽑는 데 있어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열심히 일을 하라고 했다. 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곧 우리의 일터에 투입되었다. 나는 키가 작은 사내와 함께 배추밭으로 갔다. 우리는 몇 개의 이랑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었다. 할당받은 이랑을 모두 끝낸 후에는 다음 밭으로 가야 했다. 배추밭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배추를 뽑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곳으로 일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배추는 사람들의 손에 뽑힐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배추는 싱싱했고, 속은 알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랭지 배추였다. 지대가 높은 곳의, 서늘한 기후 속에서 배추는 튼튼하게 자랐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배추를 뽑았다. 하지만 배추는 생각처럼 쉽게 뽑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시도를 했다. 뿌리가 조금 움직이긴 했지만 배추는 여전히 뽑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믿기 어렵게 배추가 불쑥 뽑혀 나왔다. 나는 내가 뽑은 배추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일사천리로 배추를 뽑았다. 어쨌든 기분상으로는 그렇게 했다. 배추를 뽑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배추를 뽑는 일이 아주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배추를 뽑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또는 쉬울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이게 뭐냐고 소리쳤다. 그는 내가 뽑은 배추를 가리켰다. 나는 그것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이게 뭐냐고 소리치며, 내가 뽑은 배추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나 또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배추 포기에서 떨어져나간 배춧잎을 집어들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배추를 뽑으면서 내가 너무 많은 힘을 줬고, 그래서 배춧잎이 떨어져나갔던 것이다. 나는 나의 잘못을 깨달았고, 그 점을 인정했다. 그는 내게 배추를 뽑는 요령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해보았다. 내 생각과는 달리 성공적이었다. 모든 일에는 요령이 있었다. 그 요령만 제대로 익히면 모든 일은 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추를 뽑는 일은 즐거웠다. 즐거운 편에 속했다. 내가 무슨 일이든 할 때면 그 일을 노예처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를 감독하는 사람은 팔짱을 낀 채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팔짱을 낀 모습은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그는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면 된다는 식의, 그것으로 모두가 할 바를 다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 후 그를 보았을 때에는 그는 딴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지켜보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이었던 것이다. 그 시각에 해가 다른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해가 그렇게 중천에 떠 있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잠시 일손을 놓고 해를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우리를 감독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지 않고 있는 듯 하면서도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이렇게 빈둥거리면 일당은 없다고. 나는 그를 쳐다보았고,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말을 고쳐 말했다. 이러면 일당이 줄 수밖에 없다고. 그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게끔 되어 있는지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다시 열심히 일을 하는 척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열심히 일을 했다. 허리가 조금씩 아파왔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기까지는 좀더 있어야 할 것 같군, 하고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햇빛은 한번 체에 거른 듯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줄기차게 쏟아졌다. 배추밭에는 햇빛으로부터 몸을 가려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배추 포기에 몸을 가릴 수는없었다. 더웠고, 무엇보다도 너무도 환했다. 환한 빛 속의 배추는 더욱 파래 보였다. 바람은,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 어렵게 불었다. 되는대로 불었다. 불다가 멈췄다. 바람이 부는가 싶으면 불지 않았고, 불지 않는가 싶으면 다시 불었다. 아무래도 바람은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일하고 나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가 나왔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아낙들이 식사를 가져왔다. 펑퍼짐한 얼굴을 한 나이든 여자들이었고, 그래서 남자들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남자들의 시선을 끈 것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이었다. 음식은 배추로 담근 김치와 배춧국과 무로 만든 반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배추와 무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없었다. 대신 모든 음식에 배추와 무가 듬뿍 들어 있긴 했다. 어쨌든 밭에서 먹는 음식은 맛이 있었다. 사람들은 배추밭에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었다.
 
우리가 식사를 끝내고 잠시 쉬는 동안 어떤 사내 하나가 무슨 은밀한 거래를 하고자 하는 사람처럼 다가와 내게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는 우리 일행은 아니었다. 그는 가까이 있는 산 하나를 가리켰다.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오,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싶소,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너머에 양귀비가 있소, 그가 말했다. 양귀비밭이 있단 말이오. 나는 못 믿겠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내 말이 믿기지 않소, 그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있다가 나랑 같이 한번 가보겠소,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용없소, 그가 말했다. 이제 양귀비는 다 졌으니까. 어쩌면 떨어지지 않은 꽃봉오리는 몇 개 딸 수는 있겠지. 꽃봉오리를 흔들면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아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닫힌 꽃봉오리를 흔들면 찰, 찰, 찰, 하는 소리가 나지, 그가 말했다. 그는 손을 둥글게 말아 귀 가까이 가져가 흔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을 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정말 하려고 했던 말을 꺼내기에 앞서 잠시 정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그 추측은 맞았다. 혹시 아편이 필요하오, 그가 말했다. 나는 잠시 그가 한 말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편쟁이로 보인 것일까? 그렇게 보인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겠소, 내가 말했다. 필요하면 얘기하시오, 그가 말했다. 생각해보겠소, 내가 말했다. 그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됐소, 그가 말했다. 아편 같은 건 찾지 말도록 하시오. 나한테는 없으니까. 그는 내가 아편 같은 것을 거래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사람으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아니, 조금 전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시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소, 알았소, 어떤 은밀한 거래를 끝낸 사람처럼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담배 있으면 한대만 주시오, 그가 말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아편을 한 사람처럼 희멀건 웃음을 지으며 담뱃불을 붙인 후 딴 곳으로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