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을 당했건 베이스러닝을 잘못해 죽었건, ‘아웃’당한 자들은 자못 침통한 얼굴로 걸어나간다. 야구의 규칙은 음산하기 짝이없다. 골을 넣거나 공격에 성공하는 것을 단위로 전개되는 대개의 구기종목과 달리, 세 사람의 죽음이 게임의 한 단위를 이루기때문이다.
야구는 정교하게 디자인된, 체계적으로 반복되는 죽음의 연습이다. 야구는 죽음을 생산하고 죽음을 사실화한다. 야구처럼 노골적이고 흥미진진한 죽음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구의 모든 기록은 어떻게 세 명의 타자들이 죽어갔는가에 대한 기억이며, 죽어간 타자들에 대한 방대한 통계다.
야구에는 ‘집’의 개념도 있다. 홈런이 그렇고 홈플레이트가 그러하다. 야구는 집에서 시작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그런데 야구에서 집이라 부르는 것은 실체나 건물이 아니라 ‘타자-포수-투수’의 대치상황 그 자체다.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의 배트와포수의 미트 사이에서 선택되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는 관계성 그 자체다.
타자들은 숙명처럼 공포와 싸운다. 시속 14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로 뿌려진 공은 본능적 공포를 야기한다 (코페트, 1991: 23). 긴장한 채 배트를 쥐고 한 덩어리의 반사신경으로 변신하여 웅크린 타자들.
야구의 이성은 진보가 아닌 영겁회귀에 기초한다.
축구나 럭비처럼 일사불란한 대오를 이루어 적진으로 전진하는 병법적 상상력을 야구는 허용하지 않는다. 야구에서 땅의 의미는영토가 아니다. 공격하는 자에게 허용된 유일한 동선은 직선이다. 축구 선수들이 누리는 공간적 자유에 비하면, 야구 선수들은 거의 공간이라 할 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야구에서 공격자에게 주어진 공간은 3차원이 아니라2차원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세 개의 베이스壘 사이의 연결선뿐이다. 루와 루 사이에는 전력을 다해 질주해야 하는 필사의 도주로가 펼쳐진다. 이것은 물리적선이 아니라 논리적 절차에 더 가깝다. 공을 쥔 수비수와 접촉하면 아웃당하기 때문에, 진루에 성공한 타자들은 루에 최대한 근접한 곳에 붙어있다. 광활한 야구장의 공간 중에서 오직 공격자에게 허용된 것은 다이아몬드 모양 직선뿐이다.
이탈리아의 인류학자 지니Corrado Gini는 4세기경 게르만족 이주자가 북아프리카로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 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베르베르인들이 즐겨하는 ‘순례자 어머 니의 공 Ta Kurt om el mahag’ 이라는 게임을 연구했는데, 이 게임은홈, 베이스, 투수 등이 있는, 현재의 야구와 거의 흡사한 게임이었다. 지니의 주장에 의하면, 이 게임은 봄의 도래를 찬미하는 종족의 집합의례, 즉 봄의 제전 Frühlingsritual 에 기원을 두고있다 (Gini, 1939. 거트만, 2008: 172에서 재인용).
내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삶의 방식이 고정된 이후인 듯하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에 명확한경계선이 그어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지금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주어질 수 있었을 것들과 필연적으로 상호배제적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있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
삶의 바탕에 존재하는 것은 전진이나 확장이나 강화가 아니라, 포기다. 코나투스 혹은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비움이다.
자아의 일부를 잘라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을 아직도 나의것이라 고집하며 붙들고 있었다면 지금 주어진 삶은 존재할 수 없다. 힘의 제한, 힘의 자발적 파괴가 삶의 조건이다.
이 인식에는 비애가 스며 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금 주어진 삶의 ‘의미’를 즐길 수 있으려면, 가능과불가능을 가르는 선분線分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승복이 있어야 한다. 이 구별, 선택, 배제의 불가피성에 대한 승인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포기를 통해 자아를 축소시키는 것이 존재의 묘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삶의 문제들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깨달아진다.
아무리 치열하고 고상한 정신의 전투라 할지라도, 관념의 싸움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먹고살고, 만나고 싸우고, 사고팔고, 집 짓고 허무는 이 속세의 삶에 들이닥치는 문제들과의 대결이야말로 참다운 싸움, 한번 싸워봐야 하는 싸움, 싸워 이긴 것이 훈장이 되는 싸움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 잡다한 리얼리티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될 줄 아는 것이다. 매일매일 흘려보내는 일상의 무거움과 위중함, 그리고 반복되는 지루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소중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기억하게 되는 특별한 사연은 대부분 ‘축적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워지는’ 이야기다. 상실하는 이야기. 실패하는 이야기. 헤어지는 이야기. 놓치고, 버리고, 버려지는 이야기. 야구처럼, 일상의 삶은 하나씩 제거되어가는 이야기다. 타자들이 한 명씩 죽어 나가는 과정에서 야구게임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듯이, 우리 인생의 드라마도 ‘아웃’의 순간들을 어떻게 겪었느냐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야구를 좋아하는 자에게 세계는 낭만적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산문적이며, 고독한 세계다. 그것은 은둔지다.
거기 신은 없다. 일상다반사가 모여 언젠가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산문적 성실함에 대한 외경. 기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처럼 보이는 일들의 배후에도 냉정하고 확고한 철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야구의 참된 매력은 형이상학적 위안으로 다가온다.
“야구는 모든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계량화되고 기록과 관련 있는 종목이다. 팀 내에서의 명료한 역할 전문화와 수비수와 공격수 간의 명확한 구분은, 처음부터 이 경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통계 수치들의 집적을 가능하게 한다. ( . . . ) 공격수의 성공여부는 그의 숙련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쉽게 계량화될 수 있다. 성공률(평균 타율)은 소수점 세 자리까 지 계산되며 경기의 가장 중요한 수치들 가운데 하나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도로 전문화된 수비수들의 성공과 실패 여부 역시 분명하게 측정 가능하다. 예를 들면 투수의 역할 역시 소수점 세 자리까지 계산될 정도로 중요한 성공률(평균 방어율)로 계량화된다. 숫자는 경기의 모든 순간을 규정한다 (거트만, 2008: 159-60).
이런 점에서 야구는 축구와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축구는 가까스로 근대화되었지만, 여전히 합리성으로 감쌀 수 없는 열정이넘실거리는 스포츠다. 그것은 축구가 야만적이라거나, 폭력적이라거나, 남성적이라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축구는 추상抽象, 그리고 추상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사실적인 것의 매혹을 알지 못한다. 참된 축구의 체험은 직접 몸을 움직여경기장에서 공을 차거나, 적어도 TV를 통해 선수들의 모습을 실제로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축구 중계를 틀어놓고 동시에 책을 읽을 수 없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축구선수는 1980년대 네덜란드의 간판스타였던 루드 굴리트다. 굴리트 축구의 매력은, 그가 한 시즌에 몇 골을 넣었다거나, 패스 성공률이 몇 퍼센트라거나, 아니면 100미터를 몇 초에 주파한다거나 하는 건조한 사실들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축구경기에는 ‘신기록’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기록으로 표상되는 사실적인 것 the factual 이 중요하지 않다. 굴리트 축구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열광은 그의 신체의 우아함, 그 신체를 품고 있는 공간의 구조적 짜임과 분할에 대한 시각적 체험과 분리할 수 없다(남미와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의 개인기는, 인간의 몸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움직여나갈 때 그것이 얼마나 보는 이의 가슴을 깊이 울렁이게 하는 강한 미학적 체험을 안겨주는 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가 큰 신장으로 휘청거리며 공을 받아, 레게머리를 치렁거리며, 경주마를 연상시키는 근육의 순간적 힘을 발휘하여 수비진을 제쳐가며 호방하게 문전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장면이 주는 쾌감은 순수한 시각적 운동성의 영역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굴리트의 왼발이 시속 몇 킬로미터로 공을 차는지 그 공이 몇 초 후에 골문까지 도달했는지, 등에 대해 관심이 없다. 굴리트의 발과 공과 공간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면은, 게임의 승패를 떠나서, 그 장면 하나만으로 구성된 순수한 모나드다. 그것은 모방될 수는있지만 재연될 수는 없다.
축구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것은, 황금빛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결정적 순간의 아름다운 영상이다. 축구는 미적이다. 이것은 야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진화론적 아름다움이다. 축구선수들의 몸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먹이를 쫓아 끝없이 걷고 달리던 원시인류의 강인하고 상처 많은 신체를 연상시킨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한 투쟁 속에서, 자연이 안겨주는 시련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채 고통과 환희를 체화하고 있는, 이야기가 많은 몸. 이런 점에서 축구의 육체성, 동작의 표현성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분명코원시적인 무언가를 갖고 있다.
이와 비교하면 야구선수들의 몸은 미적이라기보다는 만화적이다. 축구선수의 신체가 야성에 근접한다면, 야구적 신체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계성, 주어진 역할에 의해 만들어진 기능성으로 특징지어진다. 4번 타자의 비대함과 1번 타자의 왜소함, 그리고투수의 고독하고 사교성 없어 보이는 인상. 이런 정형성이 야구선수의 육체를 지배한다. 야구에서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선수의머리칼이나 다리의 근육, 심지어 표정 등을 통해 표현되는 미적 충만함이라기보다는, 투수가 던진 공의 속도나 타자가 때린 공의비거리 등의 객관적 사실들이다.
축구는 양화量化를 비웃는 질적 가치들이 지배하는 이미지의 스포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전하는 몸짓들’의 스포츠다. 몸짓이야말로 참된 축구의 주인공이다. 축구가 제공하는 최상의 장면은 2대2로 비기고 있는 상황에서 터져나온 결승골이 아니다. 즉승리의 순간이 아니다. 승리의 순간에 포괄되지 않는 빛나는 몸짓들이 열어내는 시적 순간들이야말로 축구를 축구로 만들어주는은밀한 차원이다. 가령, 내가 잊을 수 없는 축구의 장면은, 골을 넣고 잠시 정신을 잃은 채 달려가는 (주로 이탈리아) 공격수들의눈동자, 일렁거리며 풀어진 채, 주변의 모든 시간을 휘감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의문의 눈동자, 평범한 언어와 표현의 권능을와해시키며 한 덩어리의 정동적affective 속도가 되어 불타버리듯 확산되는, 오르가슴의 표정 속에 우발적으로 열린 우주적 허공을연상시키는 그 눈동자의 역동적 깊이다.
사실이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인식의 형식이다. 가령, 불어로 사실을 의미하는 단어인 ‘fait’는 ‘만들다’를 의미하는 동사 ‘faire’의 과거분사이다. 즉 불어로(라틴어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실이란 ‘사실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들어서, 푸코의 계보학은 이런 사실의 ‘생산’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사실의 사실성을 상대화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푸코보다 더 급진적으로 사실의 생산을 탐구한 것이 브뤼노 라투르이다. 라투르에게 사실은 언제나 생성 속에 있는 무언가이다. 사실은사태와 명제의 대응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 만드는 특정 연결망 속에서만 사실로 형성되는 것이다. 사실과거짓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사실적인 사실들과, 덜 사실적인 사실들이 있다. 우리는 이를 종종 망각한다. 사실은 불변의 실체가아니다. 사실이야말로, 사실을 사실로 성립시키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과정에 묶여 있다. 사실은 가소적可塑的이다.
그런데, 나는 이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의 최후성最後性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실은 인간적 지각/감각/인식의 최후의 거점이다.
가령, 애연가에게 담배의 무엇이 그토록 담배를 중독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담배의 연기일 수도 있고, 맛일 수도 있고, 냄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감각적 쾌락을 넘어서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가장 오랫동안 지속하는,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항상 숨겨지는 담배의 매혹은 바로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그 자체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즐긴다.
그런 사실은 특정 장소와 특정 시간, 요컨대 특정 풍경의 함수다. 가령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문득 쓸쓸해질 때, 낮잠에서 깨어나 걸어나온 베란다에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볼 때, 옛날 유행가에 감전되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를 휘감아버리는 흡연에의 광폭한 욕망은, 결국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생산함으로써 눈앞의 풍경을 완성하고자하는 욕망, 이른바 ‘사실에의 욕망’에 다름아닌 것이다. 강렬한 욕망은 감각이 아닌 사실을 향한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연인의 육체를 향유할 뿐아니라 그 육체를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향유한다. 감각적 쾌락은 그쾌락을 지금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감싸질 때 질적으로 증폭된다. 에두아르트 푹스가 에로틱한 나체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에대해 쓴 글을 논평하면서, 벤야민은 이렇게 쓴다. “여기서 무엇인가가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체의모습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체가 된 몸이 카메라 앞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유의 나체 사진들 대부분이 노리고있는 것도 결국 그러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벤야민, 2008: 311).
심장이 멎고, 뇌가 죽고, 부패하여 형체를 잃어도, 최후로 죽는 것, 최후까지 죽음 앞에서 강건하게 버티는 것도 ‘사실’이다. 죽은자의 생년과 사망일. 그가 남긴 일화와 기억들. 그가 즐겨 사용한 농담들. 죽음과 부패와 싸우는 덧없는 사실들이 있다. 요컨대‘그가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죽기 전에, 그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혹시 사실을 통해 현실을 추상하여 현실과의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현실을 조작하기 시작한 호모사피엔스의 성취인 동시에 질병이 아닐까?
사실을 생산하고, 사실에 지배되고, 사실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리는 인간이라는 동물.
벽처럼 완고하게 존재하는 한계 타율을 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야구선수의 욕망과 기쁨과 투쟁 모두는, 한 줌 숫자 속에 응축된다. 숫자는 야구선수의 생명의 드라마 전체를 물화物化시킨다. 역설적으로 그런 물화의 폭력 속에서 그는 망각으로부터 구제된다. ‘지상의 마지막 날의 그다음 날’에 온다는 카프카의 메시아는 천년왕국을 끌고 오는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것의 최후에, 최후성의 남루한 외투를 두르고 올,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 그 자체다.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 하나가 이 헐벗은 지상에서 끝끝내 버텨준다면, 메시아 따위는 오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