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란 원래 그냥 묻어두는 법이었다. 애써 다시 만나 봐야 실망만 할 테니까. 그때는 은수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아마 민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깐 옛날 사진만 뒤져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보나마나 사진 속의 민소는 은수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촌스러운 머리에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순박한 웃음. 그 순간 은수는 그 순박한 웃음이 그리웠다.
“민소를 어떻게 아세요?”
은수가 물었다. 그러자 병수는 은수를 바라보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다고 해야 되나, 모른다고 해야 되나. 이야기가 길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얼마나요?”
“글쎄요. 5분? 10분?”
은수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일단은 병수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던 거 정리해 놓고 나올게요.”
은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민소를 잊을 수가 있었을까.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 아이를 잊고 살았을까.
5년 전 빈스토크 타워로 이사 오던 날이 떠올랐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빈스토크 599층에 인턴 자리를 얻어서 처음으로 빈스토크 국경을 넘던 날이었다. 민소가 가방을 끌고 은수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
“국경까지 바래다줄게.”
“그럴래?”
민소는 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는 그 눈을 마주볼 수가 없어서 말없이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민소가 말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끝일 것만 같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은수가 말했다. 차들이 멈춰 섰다. 횡단보도를 아직 절반도 못 건넜는데, 초록색 불이 깜빡깜빡 발걸음을 재촉했다. 민소는 느릿느릿 은수를 뒤따랐다.
“어서 와! 위험해!”
민소를 재촉했다.
“응.”
힘없이 길을 건너는 민소를 보면서 은수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여긴데 뭐. 니네 집에서 겨우 20분이잖아.”
“그렇다고 니가 자주 나올 것도 아니잖아.”
“이왕 들어갔는데 열심히 해야지.”
“연락도 못한다며.”
“보안 때문에 그런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무슨 놈의 보안이 인턴한테 핸드폰에 이메일도 금지시키냐.”
“민소야, 이쪽이 원래 그래. 다들 그렇게 일해. 보안이 까다로우니까 인턴한테도 일을 가르쳐주는 거야. 안 그러면 나한테 누가 일을 가르치겠냐. 나도 너하고 노는 게 더 좋지만 내 나이가 몇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 자리는 언제 잡아.”
“그래도 1년은 너무 길잖아.”
“너는 2년이나 군대 갔다 왔잖아.”
“가고 싶어서 갔냐.”
“나는 가고 싶어서 가는 것 같아?”
가고 싶었다. 사실은 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앤케이E&K는 세계 최고의 위성 디자인 회사였다. 은수 같은 햇병아리 디자이너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회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가지 마.”
민소가 말했다.
“민소야. 내가 말했잖아. 이 바닥에서는 이력서에 이앤케이라는 이름만 써 넣으면, 이름 적는 칸에 실수로 이름 쓰는 걸 빼 먹어도 취직이 된다고.”
“이앤케이에서 복사만 하는데도?”
“당연하지! 이앤케이 스타일로 커피만 타도 그래.”
은수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벌여 놓은 일들을 대충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휴게실로 갔다. 병수를 보자마자 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민소는 지금 어쩌고 있어요?”
병수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미리 준비한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실종됐습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8시간 전에.”
“네? 거긴 왜.”
“격추됐습니다. 군에서 지금 위치 추적중입니다.”
잠이 든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자꾸만 꿈이 현실에 섞였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사막일 뿐인데, 언뜻 눈을 떠 보니 커다란 그늘이 보였다. 그늘을 따라가자 빈스토크가 눈에 들어왔다. 빈스토크가 침식되면서 모래바람이 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현실이 아니구나.
민소가 보기에 빈스토크는 영락없는 바벨탑이었다. 그는 은수가 빈스토크에 취직하는 것이 싫었다. 정규직도 아니고 인턴일 뿐이었는데, 은수는 빈스토크에만 가면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은수처럼 어중간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빈스토크는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주변국 영토에 얹혀 있는 주제에 바로 그 주변국에조차 비자 면제 혜택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민소는 5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은수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지하철을 나와서 한 블록을 더 가자 빈스토크 사거리 앞 횡단보도가 나타났다. 차들이 멈춰서고 신호가 바뀌었다. 횡단보도를 아직 절반도 못 건넜는데, 초록색 불이 깜빡깜빡 발걸음을 재촉했다. 민소는 가슴이 답답했다. 재촉하지 않아도 은수는 곧 떠날 텐데. 망설임 없이 그 속도 그대로 국경을 넘고 말 텐데. 은수는 그런 아이였다. 마음먹으면 마음먹은 대로 해 버려야 하는 아이.
‘너만 그런가? 나도 그래.’
민소는 문득 화가 났다. 그는 은수의 최후통첩이 억울하기만 했다. 선택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결론은 어차피 이별이었다.
“반대하면 이만 헤어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반대하지 않아도 이별이었다. 웃으며 은수를 보내주는 것도, 민소에게는 어차피 이별이었다.
민소는 은수가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저런 악마의 소굴에 은수를 들여보내다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야 가득 빈스토크 타워가 들어왔다. 한 눈에 다 담을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탑이었다. 민소도 물론 빈스토크가 꼭 나쁜 곳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민소는 어쩐지 빈스토크가 싫었다. 영토라고 해 봐야 건물 한 채가 전부인 주제에 대외적으로 승인된 주권을 가진 곳, 그래서 민소네 집에서 버스로 겨우 20분 거리에 있는 주제에 그가 사는 곳과는 국경선으로 엄밀히 분리된 674층 건물. 그러면서도 바벨탑이라는 별명은 죽어도 싫다는 곳.
“진짜 재수 없지 않냐?”
민소의 말에 은수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소는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다.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목이 부러진 건가.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쉴 만한 그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재수 없는 나라의 전투 조종사였고, 폭격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대공 미사일에 요격됐다. 적에게 먼저 발견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빈스토크 방위대에 먼저 발견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가 추락한 지점은 아무래도 아군보다는 적에게 더 가까웠다. 빈스토크 방위대 주력 병력은 죄다 빈스토크 타워 24층에 주둔해 있기 때문이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구나.’
6개월만 있으면 전역이었다. 그 중 2개월은 휴가로 채울 예정이었다. 그렇게 반년만 버티면 빈스토크 시민권을 얻을 텐데. 4년을 버텼는데 겨우 6개월치 운이 모자라 이 꼴이라니.
“은수, 이앤케이에 취직했다던데. 그냥 빈스토크에 눌러 살기로 했대. 너한테 상의 안 해?”
누군가가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는 물론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연락이 끊어진지가 벌써 석 달째였다. 내막이야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그저 사소한 싸움일 뿐이었는데, 그 싸움을 끝으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예상대로 결국 은수가 닳아 없어졌다. 은수가 침식돼서 만들어진 모래가 건조한 바람에 섞여 그에게로 날아왔다.
뜨거운 모래 바람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자꾸 정신을 잃는 것을 보니 출혈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통증이 없다니 아무래도 척추나 목을 다친 듯했다.
적에게 먼저 발견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는 게 더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
“이야기가 깁니다.”
은수는 병수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병수가 말을 이었다.
“김민소 씨를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닙니다. 처음 김민소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4년 전입니다. 그때 저는…….”
4년 전이었다. 병수는 빈스토크 시 운영위원회 행정관으로, 서른다섯 살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는 빈스토크 토박이였다. 그리고 빈스토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빈스토크가 바벨탑에 비유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영토 내 모든 시공간이 빈틈없이 상품화된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곳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빈스토크가 꼭 악마의 소굴은 아니었다.
“안 살아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
주변국 사람들은 빈스토크를 암세포로 생각했다. 주변국 수도는 언어나 민족 구성이 빈스토크와 동일했기 때문에 빈스토크와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을 뿐 사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특히 비인간적이고 무분별하게 상업화된 부분이 바로 빈스토크 타워라는 것이 주변국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병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도시화가 백 퍼센트 진행된 나라라고 해서 그 안에 깃든 삶이 모두 인간미 없고 각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익명 사회에서는 익명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나름의 신뢰가 형성되기 마련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빈스토크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수준에 이른 도시였다.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빈스토크 토박이들은 종종 엘리베이터 승강장 근처에 놓여 있는 파란 우편함을 근거로 내세우곤 했다.
병수도 마찬가지였다. 병수는 빈스토크 시 홍보 담당관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국경을 지나 주변국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았고, 빈스토크가 암세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늘 파란 우편함 이야기를 꺼냈다.
“빈스토크에서는 우편물이 공짜로 배달되거든요. 엘리베이터 한 칸에도 이용 요금이 붙는 곳에서 그게 말이 되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우편물만큼은 공짜로 보낼 수가 있거든요. 정부에서 요금을 전부 부담해서가 아니고, 사실 시 우편체계가 따로 있기는 있는데요, 중요한 서류를 보내는 경우가 아니면 굳이 이용할 필요가 없어요. 유료니까요. 그저 수신지 주소를 잘 보이게 쓴 다음 근처 엘리베이터로 가서 파란 우편함에 넣으면 그만이거든요. 파란 우편함은, 동네마다 다르지만, 한 50칸 정도 칸이 나뉘어 있는 책장처럼 생겼는데요, 칸마다 몇 층에서 몇 층까지 층수가 적혀 있어요. 해당되는 층수에 우편물을 갖다 놓는 거죠. 그러면 우편물이 저절로 목적지를 찾아가요.”
“귀신 이야기인가요?”
“아니죠. 엘리베이터 이용자들이 알아서 갖다 놓는다는 의미죠.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파란 우편함을 먼저 확인해 보고 자기가 가려는 층에 해당하는 우편물이 있으면 그냥 들고 타는 거예요. 그러고는 목적지 엘리베이터 옆 수신함에 우편물을 꽂아 두고 가요. 그러면 그 층에 사는 사람들이 우편물이 있나 확인하러 왔다가 수신함에 있는 우편물들을 더 자세히 분류해 놓고 가요. 누군가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다시 배달할 수 있게요. 모두가 그러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누군가는 그 일을 하기 때문에, 저절로 편지가 가는 거예요.”
“그럼 배달사고가 많을 텐데.”
“그게, 의외로 배달사고가 안 나요. 빈스토크 미세권력 연구소에서 실험한 게 있는데, 구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평균 93.57퍼센트가 이틀 안에 정확하게 배달된다더군요. 심지어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편지도 94.74퍼센트가 정확하게 배달되고요.”
“하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은 그걸로는 못 전하겠는데요.”
“물론 아주 중요한 편지는 유료우편으로 보내야죠. 그렇다고 파란 우편함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에요. 보통은 업무용으로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니까요.”
“그럼 무슨 용도로 쓰는데요?”
“대화하는 용도로.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써요. 돈이나 소송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죠. 그게 매일 수만 통씩 빈스토크를 돌아다녀요. 그러니까 빈스토크는 바벨탑이 될 수 없죠. 언어가 갈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적인 이야기를 그런 걸로 어떻게 보내요?”
“서로 신뢰하니까요. 도시화율 백 퍼센트인 나라에서만 가능한 절대적인 믿음이죠. 빈스토크는 개인을 신뢰하거든요.”
그러자 상대는 말문이 막혔다. 병수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599층에 있는 집으로 퇴근한 병수는 주변국 출장 중에 사용한 회의비 영수증을 찾기 위해 평소에는 잘 안 쓰던 출장용 서류가방을 뒤지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편지였다. 파란 우편함에서 가져온 편지뭉치가 분명했다.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고 그대로 집으로 가져온 모양이었다.
아차 싶었다. 배달사고였다. 마지막 출장이 언제였더라. 따져보니 벌써 4개월이 넘었다. 물론 중요한 편지는 들어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는 편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엽서가 있었다. 김민소라는 주변국 남자가 이앤케이 디자인실 조은수에게 보낸 엽서였다.
미안해. 사과할게. 니 말 듣고 열흘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조급했던 것 같아. 그래. 니 말대로 다시 한 번 잘 해 보자. 사랑해.
큰일이었다. 병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파란 우편함에 실어 보내다니! 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전화로라도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 책임이 아니야.’
그러나 명백히 그의 책임이었다. 물론 보낸 사람의 책임이기도 했다. 파란 우편함이 비치된 곳에는 활용 방법과 주의사항이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평균 6퍼센트 혹은 그 이상의 분실 가능성이 있으며 법적인 책임은 모두 발신자의 몫이므로 각종 서류나 재생산이 불가능한 원본 문서는 물론 사적인 내용이 담긴 중요한 편지를 보낼 때도 반드시 유료우편체계를 활용’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배달사고 가능성이 무려 6퍼센트나 되는데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중요한 걸 낯선 사람들 손에다 맡겨 놓은 거야?’
엽서를 도로 가방에 집어넣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별 일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무슨 영화제 시상식이었는데, 특별상을 받은 개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상 소감 발표하시려고요?”
사회자의 농담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병수는 멍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눈으로는 열심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방으로 가서 서류가방을 뒤졌다.
이앤케이 디자인실 조은수 귀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그러고는 이앤케이 사무실이 있는 동쪽 구역으로 갔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엽서를 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만나서 뭐라고 이야기하지? 그냥 우편함에 넣고 도망칠까? 그러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를 테니.’
5분쯤 걷다 생각해 보니 괜한 짓인 것 같았다. 4개월이나 지났으니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꼭 파란 우편함이 아니더라도 연락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편지를 보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연락을 시도했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든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그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집 앞에 다다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보였으면 어쩌지?’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했다. 별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퇴근시간이 다 돼서 다시 그 생각이 났다.
병수는 6시가 되자마자 가방을 챙겼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파란 우편함을 뒤졌다. 수신함에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주소별로 하나씩 편지를 분류하는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병수는 웃지 않았다. 김민소에게서 온 편지는 하나도 없었다. 국경을 넘어온 편지들이 눈에 띄는 걸 보면 그쪽 우편함에 있던 편지가 아직 수거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병수는 퇴근하자마자 599층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우편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우편함은 아직 정리가 안 돼 있었다. 병수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편지를 분류해서 세부 주소별 수신함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은수에게 가는 편지는 하나도 없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편지가 없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은수가 직장을 옮겼거나 출장중일 수도 있고, 오전에 이미 편지가 배달되었을 수도 있었다. 편지가 오지 않았더라도 단순히 이틀쯤 편지를 거른 것만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록 김민소가 보낸 편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양현미 씨. 그 파란 우편함 말이야. 젊은 사람들은 어때? 연애한다고 다 그걸로 편지 같은 거 보내는 건 아니지?”
“다 그걸로 편지 보내요.”
“왜?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시 홍보 담당관께서. 그거 안 쓰면 요새는 완전 왕따 되는데. 애인한테 안 보내면 누구한테 보내요?”
“아니, 내 말은, 그래도 예외는 있다는 거지. 열 명에 한 명쯤.”
“서른 명에 한 명쯤 될 걸요.”
“그래?”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그날 저녁에 병수는 이경환을 찾아갔다. 이경환은 예전에 병수가 아내의 뒤를 캐기 위해 고용한 적이 있는 사립탐정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또 사모님이 무슨…….”
“아니, 그건 아니고, 이 두 사람.”
병수는 김민소의 엽서를 내밀었다. 탐정은 말없이 엽서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도 참 속이 타시겠습니다. 큰 사모님도 그러시더니 이제는 작은 사모님까지…….”
“작은 사모님이라니, 그건 또 뭔 소리요?”
다시 2주가 흘렀다. 비자금을 탈탈 털어 중도금을 지불하면서, 병수는 문득 회의가 들었다. 남녀란 원래 헤어지는 법이다. 특히 젊은 애들은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순수한 사랑이 완전히 멸종됐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확률이었다. 하필 민소와 은수가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운명적인 커플이었을 확률은 30분의 1도 채 안 돼 보였다.
그 생각을 하면 병수는 속이 쓰렸다. 뭐하려고 그 돈을 쓰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액 자체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돈이 세탁된 자금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돈 다시 만들려면 적어도 5년은 걸릴 텐데. 이 짓을 꼭 해야 하나. 오해가 풀린다고 백년해로할 것도 아닌데.’
그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별로였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배달사고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한 주가 지났다. 사무실로 이경환을 찾아갔더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그가 말했다.
“작은 사모님은 과연 미인이시더군요.”
서류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직업상 화목한 가정이 필요했지만, 아내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늘 집을 비웠다. 그러다가도 꼭 필요한 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현모양처 역할을 했다. 대충대충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했다. 그는 놀랍고 당황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뭐야?”
하지만 아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집을 비울 뿐.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서 빈스토크가 바벨탑인가 싶었다.
서류 봉투를 열었다. 삶에 찌든 은수를 찍은 사진이 맨 위에 놓여 있었다. 곧 세상을 등질 것만 같은 민소의 사진도 함께였다.
깨끗합니다. 전혀 접촉이 없습니다.
이경환의 결론이었다. 병수는 김민소의 최근 동향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최근에 빈스토크 해군 용역 업체에 지원했습니다. 4년 연장복무에 해외 파병 지원을 했는데, 이미 주변국에서 병역을 마친 상태여서 가산점이 붙을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4년간 해외에서 근무를 마칠 경우 빈스토크 시민권 획득 심사에서 27퍼센트 가산점이 붙는데, 김민소도 역시 이 케이스로 보입니다.
완전 바보짓이었다. 해군이라니. 더구나 군대도 한 번 갔다 온 사람이.
그는 어떻게든 빈스토크에 들어올 생각이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4년 뒤에도 그 마음 그대로 어리석을 수 있을까. 조은수는 4년 뒤에도 빈스토크에 남아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똑같을 리가 없었다. 스물다섯 그대로 스물아홉이 될 수는 없었다. 미처 4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스물다섯은 완전히 닳아 없어질 것이다. 그래야 빈스토크가 시민권을 줄 테니. 그래서 빈스토크가 바벨탑이 아닌가.
서류를 내려놓고 아내의 방으로 갔다. 인기척 대신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내가 풍화된 흔적이었다. 아내의 빈 방에 혼자 앉아서 한참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든 중간에 오해가 생기지 않고 서로의 마음을 그때그때 전달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아내의 방이 비어 있었을까.
‘에이, 바보 같은 놈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야.’
그는 해군에 있는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용역 직원 선발에 관해 ‘조언’ 몇 마디를 건넸다.
“김민소? 뽑는 건 어렵지 않은데, 웬일이야? 이런 부탁을 다 하고.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은 무슨. 그냥 그렇게 해 줘.”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잘 한 짓이었을까. 병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종사 선발 때는 그냥 안 도와줄 걸 그랬군. 비행기를 타는 편이 훨씬 안전하댔는데. 재수도 지지리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혼자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은수가 끼어들었다.
“타클라마칸 어디서 실종됐는데요?”
“정확한 지점은 아직 파악 중입니다.”
“아직 모르는 거군요. 그런데 격추됐다는 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인가요?”
병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구조작업이 빨라지면 그만큼 생존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문제는 구조작업이 시작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는 겁니다.”
“왜요? 비행기가 격추됐는데.”
“빈스토크 방위대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요. 방위대가 움직이면 빈스토크가 그곳 미사일 기지에 선제공격을 가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 군인이 사막 한가운데 떨어졌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있어요?”
“그게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김민소 씨는 빈스토크군이 아니거든요. 빈스토크 해군에서 고용한 방위업체 직원이지 해군 소속 조종사는 아니기 때문에…….”
은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가만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제가 지금 뭘 해 드리면 될까요?”
은수가 물었다.
“이걸 전해 드리려고요.”
병수는 은수에게 4년 전에 민소가 쓴 엽서를 내밀었다.
“이게 그겁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왔나 봅니다.”
병수는 민소를 해군 조종사로 만든 게 사실은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만큼은 차마 하지 못했다.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은수를 만나러 왔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은수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은수는 엽서를 들여다보았다. 민소의 필체가 분명했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은수야. 나는 니가 닳아 없어질 것 같아.”
“또 그 소리다. 그런 말은 자꾸 왜 해? 내가 언제 너한테 헤어지자고 그랬니?”
“아니, 그냥 너 거기 가면 왠지 그렇게 될 것 같다고.”
그때는 그 말을 듣는 게 너무나 짜증스러웠다. 그 말을 하는 민소의 표정도, 짐짓 힘없게 들리던 목소리도. 미안하다는 말이 왜 미안하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때는 그 말이 다 거짓말로 들렸다.
“민소야. 그만 좀 해! 나 부담스러우라고 일부러 괴로운 척 하는 거잖아.”
은수는 자기가 민소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지금도 민소는 엽서 속에 갇혀서 미안하다는 말만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은수가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 엽서가 제대로 전달 됐어도 보나마나 우리는 또 싸웠을 거예요. 그때는 싸울 이유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헤어진 건 아니었어요. 그냥 서서히 멀어진 줄로만 알았지, 그런 계기가 있었다는 건 지금 하시는 말씀 듣고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은 결혼할 사람도 있고, 그때 일을 뼈저리게 아쉬워할 만큼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으니까요.”
진심이었다. 은수는 이제 이앤케이의 정식 위성 디자이너였다. 꿈에 그리던 직장을 얻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빈스토크는 은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엽서 한 장 잘못 배달됐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민소 일은, 도울 게 없어서 아쉽네요.”
“네.”
은수와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병수는 씁쓸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지 말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뭐 하러 온 거였지? 뭔가 전하러 온 건데, 그게 뭐였지? 엽서 때문에 온 건 분명히 아닌데. 시신이 발견되기 전에 뭔가 전해 주려고 했는데.’
병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민소가 격추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군 추적 장비가 장착되지 않은 비행기를 타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당장 대규모 수색대를 파견한다 해도 늦기 전에 조종사를 발견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가 않았다.
해군은 민소를 버릴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위대는 병력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대신 빈스토크군 표시가 없는 민간 구조 헬기를 인근 지역에 수소문해서 구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장비가 겨우 여섯 대였다. 하루나 이틀 안에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를 탐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적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코스모마피아가 이미 해당 지역 접근로를 확보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코스모마피아는 위성 요격 미사일 기술을 보유한 러시아 계통의 무장세력이었는데, 최근에는 군사위성뿐만 아니라 민간 위성에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빈스토크의 주력 산업인 위성 서비스 산업의 가장 큰 위협으로 떠오른 조직이었다.
코스모마피아에 대한 빈스토크 방위군의 공식 입장은 무조건 선제공격이었다. 그러나 코스모마피아의 위성 요격 미사일 기지가 선제공격을 지지하지 않는 국가의 영토에서 발견된 경우에는, 빈스토크 해군 소속 전투기를 보내 직접 폭격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그 경우에 해군은 민간 방위업체를 고용하는 형식으로 병력을 충당했다. 빈스토크를 위해 일하지만 절대로 빈스토크군이 될 수 없는 용병 조종사들을 파견근로 형식으로 고용했다. 문제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해군은 처음부터 민소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민소를 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7년 전에 세워 놓은 원칙에 따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잖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시민도 아닌데 뭘.”
빈스토크 헌법은 방위대의 임무를 빈스토크 시민권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빈스토크는 원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빈스토크는 그저 건물일 뿐이었다. 방위대의 원래 임무는 국적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입주자와 방문자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빈스토크식이었다. 그래서 빈스토크는 바벨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아는 빈스토크는 그저 홍보를 위한 수사에 불과했다.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수완 좋은 공무원이라 해도, 외국에서 격추된 조종사를 구출할 만큼 어마어마한 장비를 갑자기 마련할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산불 진화용 헬리콥터 두 대를 이틀간 추가로 임대한 것이 다였다.
‘위성으로라도 찾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해군에서 군사용 위성사진을 내 놓을 리 만무했다. 이 사태에 대한 해군의 공식 입장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사진을 입수한다 한들, 전문 분석 요원의 지원을 받지 않고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를 찍은 사진을 샅샅이 검토한다는 것은 시도해볼 필요조차 없을 만큼 무모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군을 움직여야겠군.”
“무슨 수로?”
“몰라.”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고, 언론사에서 일하는 지인이나 평소 안면이 있던 민간기구 활동가들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들도 역시 별 수가 없었다.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1차대전 때 말이야, 독일 함대는 북해로 한 번 나가 보지도 못했거든. 그런데도 상대방인 영국 해군 내부 문서를 보면 정말로 진지하게 패전 이야기가 오갔어요. 본토는 공격을 안 당했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문에 무역로가 끊길 뻔 했거든. 그런데 말이 무제한이지 대서양에 나가 있는 독일 잠수함은 겨우 서른 몇 대밖에 안 됐어. 빈스토크도 똑같아. 배가 비싸냐, 인공위성이 비싸냐? 그러니까 빈스토크는 현재 입장을 고수할 거고, 절대 구조대를 안 보낼 거야.”
의원 보좌관을 하는 대학 동기가 그렇게 말했다. 병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가만히 테이블 위를 노려보았다.
“조은수. 안 먹어? 샐러드가 너한테 뭐라 그래?”
“응? 아, 미안. 잠깐 딴 생각하느라.”
“오늘이 바로 그날이냐? 분기에 한 번 찾아온다는, 조은수 생각하는 날.”
“웃겨.”
그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약혼자인 진수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민소는 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살아 있을까? 사막 한가운데 떨어졌으니 살아 있는 편이 더 괴로운 건 아닐까.
좋아하지도 않는 군대는 왜 또 간 거야. 의무복무 할 때도 거의 탈영할 뻔 했으면서. 비행기는 또 언제 배우고. 그거 배워서 기껏 한다는 짓이 그짓이라니. 이상해. 전혀 민소다운 행보가 아니야. 왜지? 진짜로 그 엽서 때문인가? 그럼 나 때문인데. 에이 설마, 걔가 바보도 아니고. 아니다. 걔 바보 맞는데.
“진수 씨.”
“응?”
“위성 하나만 임대해 줘 봐.”
“위성?”
“왜? 얼마나?”
“얼마나? 글쎄. 한 20초?”
“뭐하게?”
“사진 찍게. 타클라마칸 사막이 다 나와야 돼. 해상도 좋은 걸로.”
“그래. 내일 알아봐 줄게.”
“지금 해 줘.”
“지금?”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지금, 20초라. 개인적으로 쓸 거야? 회사일 아니지?”
“응. 비싸?”
“비싼 것도 있고. 음. 시간표가 어떻게 되나. 관광 사진용 위성 정도 해상도면 되냐? 얼굴까지는 자세히 안 나올 텐데. 그건 임대할 만 할 거야. 어차피 그쪽 지나가는 건 그 시간에 예약도 안 차 있을 거고.”
“좋아. 그럼 진수 씨 직원 할인가로 임대할 수 있어?”
“이그. 인간아.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거 보니까 또 뭔가 음모를 꾸미는 모양이구나. 타클라마칸이라. 도대체 뭐지? 도망간 애인 스토킹이라도 하는 건가?”
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은수는 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위성사진 이야기를 꺼냈다. 병수는 한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중간에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관광 사진 구하는 건 이쪽에서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컴퓨터로 돌리려면 훨씬 해상도가 높은 사진이 필요하거든요. 그냥 온전한 비행기도 바닥에 놓여 있는 상태에 따라 형태 구분이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는데, 박살난 파편만 갖고 찾으려면 더 그렇지 않겠어요? 모자이크 화면 수준의 해상도로는, 더 어렵죠.”
“기계로 판독하는 건 불가능한 건가요? 그럼 방법이 없나요? 사람이 찾으면?”
“되죠. 되는데, 백 명이 달라붙어서 한 5년쯤 찾아야 찾을 수 있겠죠. 정확한 숫자는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언젠가 찾기는 찾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럼 해상도 높은 사진을 구하면 되죠.”
“안 그래도 그걸 구하려고 하는데, 안 주더군요. 해군에서.”
은수는 전화를 끊고, 진수에게 병수의 설명이 사실인지 물었다.
“그럼. 맞는 말이야. 고해상도 사진이 있어도 분석 프로그램이 없으면 소용없지. 군사 기술이라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근데 너 진짜, 뭔가 일을 꾸미고 있구나.”
“응.”
은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떤 바보 때문에.”
“그렇군. 바보 때문이군. 분위기 보니 어떤 바보인지는 물어보면 안 되겠군. 아무튼 관광 사진용 위성은 임대 안 해도 되겠지?”
은수가 대답했다.
“아니. 해줘.”
“왜?”
“그냥.”
“바보.”
이른 저녁이었다. 은수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는 위성사진 뷰어로 타클라마칸 사막이 찍힌 사진을 열었다. 일부분을 확대하자 더 자세한 영상이 보였다. 자세히, 더 자세히. 최대 한계까지 사진을 확대했다. 파일 전체에서 화면에 보이는 부분이 차지하는 면적이 점점 조그맣게 줄어들더니 결국 조그만 점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모래사막이었다. 어딘가에는 유서 깊은 오아시스 도시가 있고 어딘가에는 실크로드가 펼쳐져 있겠지만, 그 어딘가가 도대체 어딘지는 사진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모래언덕뿐이었다.
은수는 사막 전체가 화면에 들어올 때까지 사진을 축소했다. 민소를 찍은 사진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어딘가에 민소가 들어 있는 사진이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거기서 뭐하니 바보야.’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나쁜 예감이 들었다.
“나야 나.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친구였다. 어쩐지 맥이 풀리는 듯했다.
“뭘 그렇게 놀라? 나쁜 짓 하고 있었어?”
“나쁜 짓은 아니고, 옛날 애인 사진 보고 있었어.”
“어쭈. 결혼 전이라고.”
“그러게.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잘 생겼어? 옛날 애인 아닌 척 하고 어디 인터넷에 한 번 올려 봐. 나도 좀 보게.”
“그럴래? 근데 알아볼 수 있을까?”
전화를 끊었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은수는 병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라도 찾아볼게요. 추락 지점은 몰라도 대충 예상 지점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거라도 어떻게 알아봐 주실 수 없을까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구조 헬기들이 수색을 나갔으니까 기다려 봅시다.”
“이대로 있기가 영 불안해서요. 구조 헬기가 어느 쪽으로 날아갔는지 대강 위치라도 알려주세요. 그럼 해군에서 예측 지점을 어디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해군에서도 영 감을 못 잡는 모양이니까.”
“그럼 구조 헬기가 안 찾아본 데라도 찾아볼게요.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다면서요. 그렇게라도 하면 적어도 헬기 한 대 몫은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이거라도 해 봐야죠. 못 찾으면 어쩔 수 없고.”
헬기 한 대 몫이라.
“그렇군요. 알았어요. 잠시만요.”
일단 전화를 끊은 다음, 병수는 빈스토크 대외 홍보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주변국 민간 환경 감시 기구에 전화를 걸었다.
“아, 지시가 아니고 부탁이라니까. 웹사이트 하나만 만들어 줘. 이쪽 사정이 좀 그래. 우리도 서버 있지, 있는데. 지금 사정이 좀 그래요. 여기다 만들 사정이 안 돼. 우리 정부 쪽에서 손을 쓰면 안 될 사정이 있어서. 한 이틀정도만 쓰고 없앨 거니까. 응. 그래. 응. 당연하지. 당신들한테 불이익 갈 거면 내가 이렇게 부탁하겠어? 나 알잖아. 응. 아, 내가 위성사진 한 장 보내 줄 테니까, 그것만 올라가면 돼.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병수는 은수에게서 사진을 넘겨받았다. 해상도가 더 높은 사진을 구해 보려고 했지만 그 위치를 지나는 적당한 위성이 없었다. 사진을 받자마자 기술 지원팀으로 달려가 사진에 분할선을 그어 달라고 부탁했다.
일반인이 비행기 잔해만 보고 사고 현장을 식별할 수 있으려면 구획 하나의 크기가 꽤 작아야 했다. 구획이 작을수록 화면에는 더 높은 배율의 사진을 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몇 칸이나 나와?”
“대략, 20만 개요.”
한 명이 한 칸을 30분쯤 들여다본다고 가정하면 백 명이 천 시간동안 작업해야 하는 양이었다.
‘홍보국 직원을 열댓 명쯤 동원하고 헬기 숫자까지 합하면…….’
그래도 대략 1년은 걸릴만한 작업량이었다. 탐색 우선 지역을 반으로 좁힌다 해도 최소한 반년. 하나 마나 한 작업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헬기 한 대 몫이라는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병수는 구획이 나뉜 사진을 주변국 환경 감시 기구에 전달한 다음 은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은수 씨. 지금 그거 하지 말고 다른 거 해 주세요. 사진은 다른 서버에 올렸어요. 주소 불러드릴 테니까 한 시간 뒤에 들어가 보세요. 그보다 먼저 해 줄 일이 있어요. 제가 행정력을 동원할 형편이 못 돼서 그러는데요…….”
국가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동안 개인들이 부지런히 빈스토크를 뛰어다녔다. 은수는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
사랑하는 동료 경희 씨. 저는 4년 전에 빈스토크로 이사를 왔어요. 빈스토크에 와서 꿈을 이루었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 올 때 국경 너머에 두고 온 게 있어요. 그 사람은, 똑똑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요. 어떻게 그동안 그 사람을 잊고 지냈는지. 하지만 오늘 그 사람을 다시 찾았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 사막에 혼자 있어요. 빈스토크 해군에 고용된 용병 조종사래요. 시민권 얻으려고 연장 복무에 해외 파견까지 지원했대요.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 사람 워낙 바보여서, 확신은 없어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미사일에 맞았는데, 빈스토크 해군은 손을 놓고 있어요.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면서요.
사랑하는 동료 경희 씨. 사랑하는 빈스토크 시민 여러분. 여러분의 국가가 손을 뗐어요. 그 사람은 빈스토크 시민이 아니라면서요. 하지만 여러분은 그러지 않을 거라 믿어요. 빈스토크 22층에는 네모난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직육면체 상자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요.
위성사진을 구해서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비행기가 격추당한 잔해를요. 그 사람은 사막에 혼자 버려져 있고, 저는 그 사람을 찾아 사막을 혼자 헤매요. 그 사람은 대단히 위독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미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요. 오늘이 지나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진대요. 모래사막에 바람이 불면 잔해가 묻혀버릴 수도 있대요.
이 주소로 들어가셔서 저를 도와주세요. 사진에 구역을 나눠 놨어요. 제가 이미 확인한 칸은 푸른색으로 표시가 돼요. 확인 중인 칸은 녹색일 거예요. 아무 표시도 없는 칸을 골라서 비행기 잔해를 찾아 주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한두 칸만이라도, 딱 한 칸만이라도.
(이하 생략)
*
한 장 한 장 일일이 새로 쓰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했다. 은수는 그 편지들을 프린트해서 파란 우편함에 넣었다. 그 중 일부는 홍보국 직원들에게로 가는 편지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위성사진을 펼쳤다.
병수는 홍보국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켰다.
“지금 비상대기 중인데요.”
“무조건 가. 599층 엘리베이터 옆 파란 우편함에 가서 발송함에 있는 것들 다 배달하고 가. 그 중에 당신들한테 가는 편지도 있을 거야. 그거 보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 복사해서 열 장씩 아는 사람한테 보내. 그리고 당신들은 야근이다 생각하고 2시까지 해. 아니, 4시까지 하고 오전에 출근하지 마. 알았어?”
그러고는 자리로 돌아가 위성사진을 펼쳤다. 벌써 세 칸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은수의 지인들부터 직원 가족, 친구들까지 백오십 명 정도를 동원하는 게 목표였다. 피라미드 방식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말고.
그는 한 칸을 골라 배율을 높였다. 모래사막은 아니었다. 푸른색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건조하고 막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를 들여다본 것도 아니고 지표면의 작은 조각을 들여다봤을 뿐인데, 자연은 너무나 크고 막막해서 그 위에 놓인 것들 대부분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꼼꼼히 살펴야 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제대로 봤을까. 자기 눈을 의심하게 되는 작업이었다. 순간적으로 지겨운 마음에 대충 지나간 곳은 없을까. 본 곳을 다시 봐 가며 한 칸을 마무리했다. 40분이 걸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지도에 확인을 끝냈다는 표시를 했다.
전체 화면을 보니 확인된 칸이 일곱 개, 확인 중인 칸이 다섯 개였다. 그를 빼고도 다섯 명이 작업 중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사막으로 돌아갔다.
*
파란 우편함의 원형은 원래 위성 임대업체 새트리스SATlease의 내부 문서 전달망이었다. 설립 당시 새트리스사는 빈스토크 남쪽 구역 394층부터 472층까지 좁고 긴 공간을 자치하고 있었다. 그만큼 수직 방향 문서 유통이 어려웠고, 비용 절감을 위해 실험적으로 파란 우편함을 꼭 닮은 문서 수발함을 설치했다. 실험은 실패였다. 당일 문서 전달 성공률이 겨우 90퍼센트였다. 그러나 사내 연애는 다섯 배로 늘었다. 새트리스는 내부 문서 수발함을 폐지했고, 빈스토크는 파란 우편함을 만들었다. 실용성 때문이 아니라, 정 때문이었다.
편지가 돌기 시작했다. 은수가 보낸 편지는 599층을 출발해서 주로 450층에서 600층 사이 구간으로 재빨리 흩어져 갔다. 대외홍보국 직원들이 직접 배달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뒤에는 홍보국 직원들이 은수의 편지를 복사해서 빈스토크 전 구역으로 보냈다. 300통이 조금 넘는 편지였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확산 속도는 느렸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 당황스러워하는 것처럼 빈스토크에는 밤낮을 바꿔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달 속도가 완전히 0이 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 새 편지가 발송되었다. 은수가 보낸 것도, 홍보국 직원이 보낸 것도 아니었다. 병수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새 편지 몇 통이 발송되었다. 비슷한 시간에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편지가 편지를 낳고, 그 편지는 또 다른 편지를 낳았다.
은수는 몇 시간이나 사막을 헤매다가 인공위성 궤도까지 빠져나왔다. 그보다 한 칸 더 눈높이를 높이자 비로소 모니터 밖 현실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아팠다. 계속 사막을 들여다봤더니 괜히 안구가 건조해진 느낌이었다. 안약 몇 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다시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은수는 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웹 사이트가, 뭔가 오류가 생긴 것 같은데요.”
병수는 사막에서 빠져나와 전체 지도를 펼쳤다. 지도 북동쪽이 온통 파란색이었다.
“그러네요. 지금 몇 시죠? 전화하면 받으려나.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웹 사이트를 만든 환경 감시 기구에 전화를 걸었다. 바로 연결이 됐다.
“이 시간에 뭐해?”
“네? 이거 하고 있는데요. 아까 행정관님이 준 거.”
“뭐? 웹 사이트 만드는 거? 아까 다 했잖아.”
“네. 했죠. 저도 지금 다섯 칸째 뒤지고 있어요.”
“당신이 왜?”
“사람 찾으려고.”
“사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지금 난린데. 다들 이거 하느라 밤잠 설치고 장난이 아닌데 시작한 사람이 딴소리하면 안 되죠.”
“무슨 소리야?”
“접속자가 지금 27,470명이라구요.”
“무슨 접속자?”
“뭐긴요? 아까 제가 만들어 드린 거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추락한 비행기 찾는 거.”
병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만 칠천 명이 어딨어? 한밤중에.”
“아, 어디 보자. 빈스토크에서 육천 명 조금 넘고, 우리나라에서 오천 명쯤 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했어요.”
“왜?”
“왜는 무슨 왜요? 그냥 찾는 거지.”
“그러니까 걔들이 왜? 뭔가 오류 생긴 거 아니야?”
“오류 같은 거 없어요. 뭐가 있어야 오류가 나죠. 사진 하나 달랑인데. 은수 씨가 빈스토크에 돌린 편지가 번역이 돼서 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그냥 찾는 거예요. 그냥. 이유가 필요한가? 원래 인터넷에서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그냥 해요, 그냥.”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자 접속자 숫자가 40,000명을 넘어섰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는 75,000명을 돌파했다. 파란색 칸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 주위로 녹색 선이 불길처럼 번져갔다. 병수는 손을 놓고 전체 화면을 지켜보았다. 병수는 그 광경이 이해가 안 갔다.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오류가 아니라는 말에 은수는 깜짝 놀랐다.
“그럼 뭔데요, 이게?”
“글쎄요.”
동틀 무렵이 되자 2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미 파란색으로 표시된 구역을 다시 한 번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지도 전체가 파란 색으로 변했는데도 아직까지 민소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 보고도 놓친 게 분명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새 웹 사이트가 생겨났다. 병수가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독일에서 만든 웹 사이트였는데, 이미 확인한 구역인지 아닌지만 표시하는 게 아니라, 확인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구역의 색깔이 점점 짙어지는 방식이었다.
다시 34만 명이 작업을 시작했다. 30분 뒤에는 접속자가 거의 50만 명에 이르렀다. 지도 색깔이 순식간에 짙은 색으로 변했다. 등고선 이 높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은수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색깔이 짙어지는 모습이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가 서서히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실종된 용병 조종사를 통째로 하늘에 바칠 기세였다.
그리고 빈스토크 시간으로 아침 7시 5분에, 빨간색 점 하나가 지도 위에 나타났다. 전화가 걸려왔다. 병수였다.
“찾았답니다.”
그 순간, 접속자 숫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2,774,867.
빨간색으로 점멸하는 지점을 확대하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민소가 보였다. 눈물이 났다.
“탈출을 하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모양입니다.”
“구조대는 언제쯤?”
“위치를 알렸습니다.”
*
민소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 자기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정신이 들 때마다 그는 죽음의 문턱이 참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살아 있네. 원래 이렇게 죽기가 힘든 건가?’
세상이 너무나 고요했다.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게 아니었다고 해도 그의 몸이 스스로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차단해 버린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어디가 됐든 사막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원래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팔다리가 멀쩡하고 감각이 제대로 작동했을 때에도 세상은 원래 그렇게 무의미한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나 슬픔, 후회 같은 것도 사실은 무의미한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을 뿐.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이러다 깨닫고 부처 되는 거 아냐?’
이상하게 열반涅槃이 하고 싶었다. 20년간이나 유일신을 믿어 왔는데, 막상 극한의 상황에 다다르자 구원에 이르는 길보다 해탈이 더 가까워 보였다.
‘이 상황에서 이런 황당한 생각이 들다니.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보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또 한 번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느낌이어서 그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분명했다. 영혼을 가득 채우는 이 뜨거운 시선. 하늘 문이 열린 게 틀림없었다.
멀리서 하느님의 사자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의 사자가 내는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귀에는 어쩐지 HH-60G의 엔진소리처럼 들렸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신이 보낸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맴돌았다. 헷갈렸다. 장르가 이상했다. 궁금해서 도저히 열반에 들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