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의 지옥>에서

김혜순

행진

낡고 큰 책장이 한 장 한 장 
찢어지듯
한 그루 뽕나무가 후두둑후두둑 
뽕잎을 떨구듯 
세월에 묻힌 벽화가 조금씩 
먼지를 털듯 
전생이 걸어간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전생의 여인이 뽕나무 그늘에서 죽을 때 
술 한 모금 마시고
이승의 내가 한 겹 땅 밑에서 오늘 이 시간
 
낡고 큰 책장이 찢어지고 
한 점 벽화가 모두 드러나 
술 취한 내가 그림 속의 나를 
무심히 바라보듯

전생의 그 여인이 두 손에
어린 딸 같은 복숭아 하나 품고
죽을 때
나는 빈 자루 하나 짊어지고
전쟁이야 전쟁이야
한 겹 낡고 큰 책장 아래
또 숨으러 간다

 

먹고 있는 반 고흐를 먹고 있는 태양부인

끊고 있는 들판 범벅
보리밭 길을 몇 동강 썰어 넣고
해바라기씨를 끼얹으며
주걱으로 휘휘 저어놓은
주황빛 스튜
반 고흐의 식사 준비

가마솥처럼 펄펄 끊고 있는 그의
뇌수(xx), 시간이 흐를수록
맹렬히 끊는 소용돌이
들판 범벅을 쑤는 주걱을 든
손을 미친 듯 떨게 하는
두개골의 한없는 용솟음
반 고흐의 머리 뚜껑을 열어놓고
국수를 삶고 있는 시대
태양부인의 식사 준비



동구 밖의 민주주의

멀어질수록 커지는 사람
소실점 밖에 서서
애드벌룬처럼 가득히 부푸는 사람
그는 실체가 없으면서
그러나 큰 덩어리이면서
보고 싶음과
서글픔과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송두리째 먹어버리고
날마다 커지는 사람
너무 커져버린 모습
나를 내리누르며
눈물 보따리와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사람

없지만 있다는 그를 안고
뒹굴다 보면

새벽 태양 떠오를 때
산봉우리처럼 부풀어오는 사람

 

엄마의 식사 준비

아버지의 폭탄이 터진 뒤라고 한다
 
구워지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에서처럼
지방이 튀어 오르고
불똥이 튀고
살갗이 타들어갔다
한쪽에선 뼈대에 살갗을 걸레처럼 걸고
불 속에 서 있었다
토마토처럼 으깨지고도 있었다
거대한 돌에 눌려서
두부가 되어가는 것도 있었다
배가 뻥뻥 터지며
구린내를 풍기는 것도 있었다
온 들판 전체가
누가 먹으러 오는지 알지도 못한 채
전신에 눈물을 칠하고
튀겨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삼키며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어느 별의 지옥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켜고 있는 곳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올리고 끌어당기는              .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세상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뱀과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뒈지는 곳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새들이 모두 가버린 다음

그래도 질긴
우리는 남아서
모이기만 하면 서로 사랑스레
무덤도 지어주면서
등도 두드려주면서

그러나 저마다 돌아서면
양팔을 힘껏! 벌려
품에 품고는
제 무덤인 줄도 모르고
더 힘껏 더 힘껏 부둥켜안고는
요 깔고 이불 깔고 사지를 좌악 벌려
사랑한다 사랑한다 잠꼬대까지 하면서
울던 새들이 사라진 이 세상에
나만 남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