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서정학

이상하게도, 삶은 지속된다. 편집되지도 않고, 축약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 꽤 세월이 흘렀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할 따름이다. 이게 왜 이상한 일인지 가끔 생각해볼 때가 있다. 살면서 이 순간이 이 삶의 하이라이트이란 걸 다들, 어떻게 알아채는지. 여긴, 배경음악도 없고, 특수효과도 없고, 플롯도 없고, 하여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상하다. 

이 책의 가치는, 지금 현재, 인터넷 최저가 신라면 30개들이 반 박스와 같으나 제휴카드를 쓰면 신라면 쪽이 좀더 싸다.

꼼꼼히 비교해보고 사는 것은 삶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서정학, 2017년 5월



제일 앞자리엔 채리가 앉는다

역시, 시를 쓰는 건 꽤, 황당하게도 그리고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씨를 멀리 풋, 뱉는 것처럼 제법 몰
지각한, 개인적인 또, 그런 일이다. 그래서 앞자리에 누군가의 채리가 앉아야 한다. 당신은 그 이유를 귀찮게 알 필요가 없다. 그냥 그것만 기억하라.

앞자리엔 채리다

시를 휘휘, 써도 파리 같은 황당함은 어디 멀리 귀찮게 도망가지 않고 오랜 농담처럼 의자에 앉아 있
다. 종이는 너무 파리처럼 작고 이 씨를 사는 데 쓴 몇 장의 종이 지폐는 종이 바깥에서 포르말린처럼 앙상한 두 날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세상을 파리처럼 만끽하지만 시를 읽는 당신은 그냥 그것 하나만 읽게 된다. 익숙한 결론,

앞자리 채리

결론은 이미 제일 앞자리에, 개인적 이유로 앉아있지만 시를 쿨쿨, 읽어도 지겨운 파리를 귀찮게 쫓
아 보낼 수 없다. 일상은 편집되지도 않고 축약할 수도 없고 당연히, 간단히 무심히 설명할 수도 없다.
그냥 한 무더기 종이 뭉치가 될 뿐, 남은 일은 누군가에게 그걸 건네주는 것뿐이다. 작고, 한 번 더 쓰
겠지만 누추한

앞자리가 중요한가 묻지 마라

중요하지만 당신과는 별 관계 없다. 지금까지, 이 시의 가치는 종이 바깥에 있고 그건 내 것도, 또한, 그리고, 심지어 아니다. 씨파리, 날아갔으니까, 가장 앞자리 햇빛에 시달린 붉은 의자가 하나 있고 거기에 앉는 건 당신이 아니니까, 개인적인 건 개인에게 당신은 당신에 그리고 이 앞자리는! 누군가, 아니, 익숙한, 채리의 몫이다.

누군가의 채리가 자리에, 그것도 익숙한 앞에 앉아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응, 그러니 애초에 다 정해져 있는 거다. 씨니까



초현실적인 기계장치와 푸른 나무들

1.
숲 한가운데 떨어진 당신은 곧, 나무둥치에서 붉은색 버튼을 하나 발견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햇살도 잘 들어오지 않는 울창한 숲이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지만 신경 쓰지 말자. 저 단순한 형태의 붉고, 커다랗고, 누르고 싶어지는, 누를 수 밖에 없는 친근한, 둥근 버튼이 제일 눈에 띄니까. 풀벌레들이 뛰어다니고 숲의 냄새가 짙은 안개처럼 감싸고 있지만 당신의 두 눈은 그저 버튼만 바라보고 있다. 발밑의 푹신한 이끼와 축축한 흙들도 붉은색 버튼을 향한 당신의 관심을 돌리지 못한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본다. 숲 한가운데 당신은 서 있고 당신을 둘러싼 나무들, 가지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소리를 낸다. 손을 뻗어 눌러볼 텐가,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당신은 숲 한가운데 서 있다.

2.
울창한 숲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은 당신이 보고 있는 그 붉은색 버튼 하나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호기심은 눈을 멀게 하고 숲에 어둠을 뿌린다. 눈을 감아도 그 붉은색은 선명하게, 더 실감나고 생생하게 당신의 눈에 각인되어 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떨어졌던 당신은 이제, 버튼을 누르고 싶다. 숲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버튼 앞에 뿌리내린 당신. 느슨한 집착을 즐기는 당신. 신비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당신. 쓸쓸한 당신. 지루한 당신. 누르, 고싶다누, 르고싶다, 누르고 싶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가지들이 소리를 낸다. 당신은 그렇게, 나무가 된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서 있다. 

3.
O
 
누르지 마시오.



종이상자

그들은 공연을 위해 왔다고 했다. 종이상자 몇 개를 엎어놓은 듯한 그들의 비행선은 너무도 낡아서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금방, 수거해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도 사실을 알고 있는지 누군가 한 명은 꼭 남아서 비행선을 지킨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글자가 박힌 몇몇 부품은 이미 재활용된 듯 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돌아갈 곳도 없었으니까. 초전자행성전문파괴강력무시더듬광선에 의해 파괴된 자칭 ‘아름다웠던’ 그들의 행성. 그들의 음악은, 우주를무한대의육감으로마구더듬는스페이스락,이라는 그들의 전우주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그저, 춤추기에 적당한, 그러나 박자가 좀 어리숙한 댄스음악 같았다.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더 노력하라는 쇼프로 프로듀서의 말을 들었다며, 그들 중 하나가 눈물을 흘렸다. 몰락한 왕조의 구슬픈 삶처럼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나, 그들이 뜨겁게 사랑받을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을 원료로 하는 종이상자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들은 연습을 위해 밤늦게까지 웅얼거리며 시체처럼 힘없이 걸어 다닌다. 빨리 비행선이 날 만큼 사람을 모아 집 마당이나 비워줬으면 좋겠다.



종이상자 공장

사장의 모토는 언제나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이었다. 사장은 뿌듯한 눈빛으로 헛기침을 하며 생산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가지 필요한 재료들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아, 만세! 대량생산!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법이지. 사장은 거들먹거리며 공장을 순시한다. 돈! 돈이 최고야!라고는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오해야! 침을 뱉는 고객들과 젓가락을 집어 든 공원들, 그리고 사장, 인쇄기가 큰 소리를 내며 문구!들을 인쇄하고 있었다. 취급주의! 반품불가! 점입가경! 유색인종! 종이를 접는 접지기는 큰 소리를 내며 상자들을 접고 있었다. 아름다운 시! 주마간산! 상장기업! 상담간조! 상자들은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곧,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보낼 것이다. 공장에서는 계속해서 종이상자가 생산되고 있었다.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옛날을 회상한다. 풀칠을 하고 종이를 접고 쌓아 올리고 그리고 돈!을 받았지. 몇 가지 필요한 재료들이 있었어. 뭐든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던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별다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알겠지? 별 뜻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구!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공장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풀칠이었으나 끝은 테크놀로지리라. 사장의 눈빛이 교활하게 빛난다.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스무 개가 겨우 천 원이라는 상상 초월 대박 가격에 모든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재료값도 안 나오는 착한 가격! 안 사는 것이 손해! 붉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불어 현수막은 들이닥친 사람들의 발밑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필사적으로 에펠탑을 향해 소리치며 누군가는 큰 소리로 라데팡스를 향해 울었다. 붉은 나비같은 유로가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디자인을 뽐내며 날고 있었다. 종이상자를 양손에 들고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며 경고한다. 프랑스에서 만든 것은 프랑스로! 점장은 고객들의 품 가득 사은품을 챙겨 주느라 분주했다. 본전이나 뽑을 수 있을지 모두들 걱정하는 가운데 그 많던, 프랑스가. 결국 매진되었다. 눈가가 붉게 물든 점장은 전단지를 둥글게 말아 격양된 악센트의 불어로 모든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매장 바깥에서 누군가 주차된 차들 사이로 화염병을 던져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게 다 아름다우면서도 저렴한 프랑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