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시편

Ko Un

그대 순례


좀 느린 걸음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이니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





히말라야


회상은 짧고 공상은 길구나
내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는 곳
내가 한 번도 태어나지 않아야 할 곳
히말라야

누구 대신
그곳으로 갔단 말이냐
열 손가락 떨며 나는 갔다

수많은 어리석음들은 이쪽에 있고
저쪽에서
고도 8천 미터 정상 몇 개
황금빛 칼들을 쌓아올려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어쩔 수 없이 나는 고아였다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었다
가능한 한 히말라야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것
모든 성가신 질문들의 세상 그것이었다





이야기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 속의 숨결이
방안 가득하다

이것이면 다다

영하 40도 겨울 8개월
그 동안 젖 뗀 아이가 얼어죽었다

그 아이가 죽은 뒤
슬픔은 길지 않았다

곧 이야기가 있다
기도와 기도 사이
끼니때와
끼니때 사이
이야기가 있다
이런 나라가 온전한 나라이다





하룻밤


시가체 라체 사이에
저녁 천막을 쳤다
치자마자
비바람쳤다
천막이 날아갈 듯 요동쳤다

강기슭
물이 불어나
물소리가 커졌다

아까 물은 100도 이하
80도에서 끓었다
내 불안과 체념도 함께 끓고 있었다

벌써 기억할 수 없는 절경들이 떠내려갔다
물소리가 더 커졌다
이제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아내의 얼굴을 기억했다
딸의 얼굴을 기억했다
진리 따위는 무척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