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치약 거울크림>에서

김혜순

어미곰이 불개미 떼 드시는 방법

주체할 수 없이 몸이 커진다는 거
상처가 생길 때마다 작은 천 조각 하나 오려 덮고
또 오려 덮고 다시 덮고 그러다 보니
이제 내가 조각이불을 덮어쓰고 말았다는 거
우리 엄마는 조각이불은 절대 덮지 말라고 하고
퀼트 같은 건 절대 배우지 말라고 했는데
기우고 기우다 보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그랬는데
내가 지금 쓰레기뭉치 조각이불처럼 걸어간다는 거
한때는 당신이 먹거나 물어뜯거나 조종하거나
부리던 거였다는데 그러나 이제 조용한
쓰레기뭉치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는 거
끌차와 한몸이 된 노숙자처럼 냄새가 난다는 거
앞발로 툭 치면 사슴 같은 거 노루 같은 거
다 죽어버릴 만큼 덩치만 크다는 거
이 햇볕 작열하는 대로상엔 나밖에 없다는 거
나를 만나면 도망가는 것들밖에 없다는 거
걸어가면서 잠자는 거대한 회색곰처럼
눈꺼풀 위에 너덜거리는 거대한 검은 레이스 구름처럼
기름 질질 싸고 가는 사막 한가운데 덤프트럭처럼
계단은 썩고 다락은 먼지가 한 길이나 쌓인 집채처럼
덩그러니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거
거리에서 쫓겨나고 쫓겨나면서
점점 커진다는 거
내가 세상의 비명으로 꽉 차 있다는 거
그것밖엔 아무것도 없다는 거





구름의 노스탤지어

흰 벽이 웃더니 토끼 귀 한 쪽이 들어왔다
나는 그 냄새나는 것을 당겼다
토끼구름 뭉게뭉게 피어났다

천장에서 엉덩이 구름이 내려왔다
저 엉덩이는 우리동네 체육관 레슬러의 것인데요

목을 맬 밧줄이 내려왔다 목을 걸면 금방 흩어졌다
벽이 공중에 떠올라 짖어댔다
천사들이 고문받고 울던 방이 활짝 열렸다
내 비명이 똥처럼 쏟아져 우산으로 받았다

젖꼭지 천 개가 내 몸에서 돋아났다
젖꼭지마다 흰 젖이 마려웠다
젖이 가득 출렁이는 몸은 항아리처럼 볼록했다
항아리에서 흰 토끼 냄새가 났다

저 플라스틱들, 저 종이들, 저 옷감들
방에 놓인 물건들과의 정든 추억을 노래로 불러 주었다

노래를 부를 때 전신의 땀샘들이 일제히 침을 흘려
검은 털들을 적셔 주었다

가면을 운동화끈처럼 조이고
레슬러처럼 밖으로 어기적 어기적 나갔다

이제 비밀을 말할 시간, 내 애인은 저 구름
하루 수백 번 표정이 바뀔 때마다 얼굴에서 물이 떨어지는 저 구름

가버린 사람의 아침잠이라고 불러줄까
(하마터면 잊지 않아 더러운 광경이라고 말할 뻔했다)
토끼장 사라져서 쩔쩔매는 토끼라 말해버릴까
내 우울의 노스탤지어라고 말해버릴까
아니면 일 초에 한 장씩 떨어져 땅속에 파묻히고 마는
당신 표정이라고 말해버릴까

초록 딸기 봉우리 구름
하나님 목을 휘감는 흰 머리카락구름
내 목의 동맥을 구름에 거는 갈고리구름
내 집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는 렌즈구름

저기, 저기 노을 속에 붉디붉은 팬티를 머리에 인 도장 소년들이 뛰어가고

나는 저 붉은 구름에서 실을 뽑아 속옷을 지어 입고
뚱뚱해지고 뚱뚱해진 몸을 뒤틀었다





나의 프리마켓

뭐 굳이 사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좌판은 벌인다
새의 혀처럼 생긴 말랑한
침묵을 위한 열쇠 몇 개
붙잡으면 뭉개지는 종소리 몇 개
눈뜨면 슬며시 녹아주는 풍경 몇 장
노래로 만든 관에 함께 묻을 수 있는
금 간 얼굴 몇 장, 덤으로 애매

광기의 전압을 높이는 예배당들이여!
부르르 떠는 은혜받은 밤의 붉은 상점들이여!

그리고 나여! 코 고는 흰 토끼 앞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물렁한 열쇠나 팔겠습니다

나는 지금 장의사처럼 차려입은 피아니스트를 예배하는 중입니다
그의 검은 구두에 박힌 징도 예배하는 중입니다
그의 팔에서 열렸다 떨어지는 별들이
내 좌판의 바퀴를 더듬을 때는 그의 대머리도 숭배해드립니다
그가 앙코르의 앙코르에 답하면서 녹턴을 방출할 때는
그의 발밑 그 밑에 꿇어 엎드려 쉼표마저 주워 먹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철기 시대 우리 아버지는
새파란 처녀에게 물고기처럼 체외 수정을 하셨다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류를 믿고 어류의 아들을 믿는 건가요?
도마 위 물고기에 리본 달아드릴까요?

그 리본을 가슴에 박아줄 꽃핀 사실래요?
누르면 말간 알이 쏟아지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팔뚝에 달 수 있는 별도 물론 있습니다

내 기침 밖으로 쏟아지는 압정들
도마 위에서 칼날을 척척 감싸는 손가락들

덮으면 저 건너 암흑이 슬쩍 보이는
눈동자를 위한 이불 대용 검은 나비 두 마리

홍수에서 건져낸 것처럼 부르튼 좌판에
질문으로 화상 입은 입술 모형도 있어요

코르크 마개를 빼면 듣기 싫은 의심이
쏟아지는 검은 와인 한 병

아예 껍질은 다 도둑맞고 뼈 조롱에
내장만 남은 짐승

목쉰비명바구니
맨발 속에 신는 물고기가시신발

사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