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고요한
여자를 기다리며 나는 종이를 접었다. 하얀 종이를 세로로 절반 접었다 펴서 머리 부분을 안으로 접어 넣었다. 머리 부분을 중심으로 이번에는 가로로 접은 후 양쪽을 다시 접어 몸통에 생긴 삼각형과 맞물렸다. 종이비행기는 머리와 몸통 부분을 맞물려줘야 힘을 받아 견고해졌다. 맞물려준 부분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으로 종이의 양쪽 면을 밖으로 꺾어 날개를 만들었다. 종이비행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날개였다. 날개의 균형을 잡아줘야 무게중심이 맞았고 날렸을 때 손의 탄력을 받아 잘 날아갔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리려면 날개를 잘 접어야 했다.
갓 접은 종이비행기를 들고 나는 반지하방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건너편에 있는 이층 노래방을 바라보았다. 통유리창으로 된 노래방 룸을 하나씩 훑으며 여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노래방 아래층인 편의점에도 여자는 없었다. 고개를 돌려 골목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카디건을 입은 남자와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골목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카디건과 나이키가 노래방에 올라간 후 십 분이 지나지 않아 여자가 골목길을 올라왔다.
여자는 굽이 십 센티미터가 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언제나 여자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키가 커 보이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지만 여자는 구두를 신어도 16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다. 아내의 키도 16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다. 나는 키가 작은 여자가 좋았다. 아내를 좋아한 것도 키가 작아서였다. 독특한 성적취향인지 모르겠지만 키가 작은 여자를 안고 있으면 이 여자가 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노래방으로 올라가려는 여자에게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정확히 여자 앞에 떨어졌다. 여자는 나를 힐끔 돌아보고는 구둣발로 종이비행기를 밟더니 노래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4번 룸에서 카디건과 나이키와 함께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 달 전 나는 아내와 살던 집을 나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삿짐을 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흔 살이나 먹은 남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마흔 이하 구인. 만으로 서른아홉이라 써서 넣어도 소용이 없었다. 경력자를 구하는 곳도 하나 같이 마흔 이하를 구했다. 운 좋게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백 군데 넘게 이력서를 넣었지만 연락이 온 곳은 없었다. 마흔 살에 노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마흔 살에 노인이 되어버린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것도 무료해질 때는 노래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관광객과 노래를 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때부터 밤이 오면 노래방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보이지 않으면 편의점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에는 일본관광객이 많았다. 공항 근처에 묵는 일본관광객이 노래방에 왔다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편의점이 주로 낮에 손님이 많았다면 노래방은 밤에 손님이 많았다. 노래방 손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두 시간 노래를 부르고 가는 손님과 여자를 불러 노는 손님. 전자의 경우는 저녁을 먹고 와서 깔끔하게 노래만 부르고 갔다. 시간을 연장해도 버스나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들어갔다. 카디건과 나이키는 후자였다. 여자를 불러서 노는 손님. 여자는 카디건과 나이키가 올 때마다 노래방에 왔다. 물론 카디건과 나이키가 오지 않을 때도 왔다. 일주일에 세 번 올 때도 있었고 네 번 올 때도 있었다. 여자가 오는 날은 불규칙적이었다.
*
아홉 시가 넘자 여자는 카디건과 노래방에서 나왔다. 여자는 카디건을 따라 골목길을 내려갔다. 나는 반지하방 계단을 올라가 여자를 뒤따라갔다. 여자는 카디건과 골목길 아래쪽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 간판 너머로 공항의 활주로가 보였다. 모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활주로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이십 분 만에 여자는 모텔에서 나왔다.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골목길을 올라갔다. 허공 속에서 누군가 오른쪽 어깨에 실을 매달아 끌어올리는 것처럼 여자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걸었다. 여자처럼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고 걸어가 보았다. 여자의 냄새가 코에 닿았다. 그 냄새에 여자가 조금 좋아졌다.
여자가 노래방에 올라가고 나서 나는 반지하방에 들어갔다. 조금 후 여자는 나이키를 따라 다시 노래방을 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피하는 걸 보면 내게 관심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종이비행기를 접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골목길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이키가 여자의 손을 잡아 끌고 내가 사는 반지하방 건물로 들어왔다. 문틈으로 여자의 다리와 나이키의 다리가 보였다. 나이키는 계단 구석으로 여자를 밀어붙인 후 바지를 까 내렸다. 달처럼 하얗게 나이키의 엉덩이가 솟아올랐다. 벽에 기대 나이키를 받아들이는 여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나는 얼른 문을 잡아당기고 빗자루를 집어 침대 밑에 있는 쥐에게 던졌다. 쥐는 잽싸게 침대 구석으로 숨었다. 간밤에 창문가에서 음식물쓰레기를 먹던 쥐가 여자가 던진 담배꽁초에 놀라 들어온 것이다.
-방을 종이비행기로 도배했네요.
노크도 하지 않고 여자가 문을 열어젖혔다. 문틈으로 계단을 쳐다봤지만 나이키는 가고 없었다. 여자는 구두도 벗지 않고 들어와 방안을 둘러보았다. 열 평도 안 되는 방은 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 왼편에는 주방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창문이 있었다. 창문 옆에는 주방에서 옮겨다 놓은 식탁이 있었다. 식탁 뒤로는 옷장과 침대가 있었다. 침대 아래에는 제지회사를 다닐 때 갖다놓은 종이가 쌓여 있었다. 인쇄지에서부터 필기용지, 박엽지, 백판지, 모조지, A4용지까지 있었다.
-노래방에서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부를 때마다 이 방을 보면 무언가가 날아다녔는데 이제 보니 그게 종이비행기였네요. 세상에 종이비행기를 접는 남자라니. 이걸 혼자 접었어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칙칙한 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종이비행기를 접는 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나도 접어 봐요?
여자는 피식 웃고는 허리를 숙여 종이비행기를 만졌다. 바스락, 바스락. 종이비행기에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여자의 입가에는 립스틱이 번져 있었고 눈가에는 마스카라가 번져 있었다. 치마 자락에는 콧물처럼 정액이 묻어 있었다. 뒤늦게 여자는 치마 자락에 묻은 정액을 보고 종이비행기의 날개를 찢어 닦았다. 종이 모서리에 긁혀 치마의 올이 나가자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는데 . . . 한 때는 내게도 꿈이 있었다구요.
-꿈이요?
그때 노래방 건물 위로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비행기가 내뿜는 굉음에 창문이 덜덜덜덜, 흔들렸다. 덩달아 종이비행기도 덜덜거렸다. 텔레비전은 전파방해를 받아 지지직거렸다. 점점 방안은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덜덜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
비행기가 지나간 뒤 여자는 까치발을 들고 내 목을 끌어안았다. 여자의 가슴이 내 가슴 아래에 닿았다. 아내의 가슴처럼 따듯했다. 한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졌다. 여자의 가슴은 아내의 가슴처럼 작았다. 허겁지겁 브래지어를 벗기고 치마를 끌어내렸다.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의 불빛이 여자의 몸을 비췄다. 번쩍 목에서 꽃이 피는가 싶더니 입에서 꽃이 피었고, 손에서 꽃이 피었다. 배꼽에서 꽃이 피는가 싶더니 여자의 그곳에서 꽃이 피었다. 차의 불빛이 여자의 몸에 피워낸 빨간 불꽃. 차가 지나가자 꽃도 사라졌다.
사라진 꽃을 찾을 것처럼 나는 여자의 가슴을 빨았다. 여자의 가슴에서 꽃이 피어났다. 사라진 꽃보다 그 꽃은 빨갰다. 나는 여자를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지렁이처럼 여자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정성스럽게 가슴까지 기어 올라가며 애무를 하자 여자는 완전히 젖었다. 가슴에 핀 꽃을 보면서 천천히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좋아요? 아내와 할 때처럼 무언가를 확인하듯 물었다. 너무 좋아요. 그 말에 더 빨리 엉덩이를 움직였다. 여자의 손톱이 엉덩이를 파고드는 순간 사정을 했다. 여자는 두 다리로 내 허리를 조였다. 구두 한 짝이 내 등짝에 떨어졌다. 여자는 발로 등짝에 떨어진 구두를 밀쳐냈다. 나머지 구두 한 짝도 벗어 던졌다. 나는 노래방 건물 위로 내려앉는 비행기를 보면서 여자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내 꿈은 한국의 이시다 아유미가 되는 거였어요. 왜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부르는 일본 여가수 있잖아요. 얼마나 이 여자를 좋아했는지 예명도 아유미라고 했죠.
여자는 옷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하얗게,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여자는 급하게 담배를 빨고는 내 입 속에 담배연기를 넣어주었다. 담배연기 속에서 여자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아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여자가 조금 더 좋아졌다. 여자는 다시 내 입속에 담배연기를 넣어주었다.
-처음엔 밤업소에서 노래했는데 웬걸 아유미라는 예명 대신 난쟁이로 불렸죠. 하지만 키는 작아도 남자들한테 인기는 많았죠. 남자들은 언제나 꿈을 키워주겠다며 접근했어요. 그래서 남자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죠. 그때 부른 노래가 부루라이토 요코하마예요. 하지만 남자들은 자고나면 내 꿈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떠났어요.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노래만 부르다 이 구석진 동네의 노래방까지 떠밀려 왔죠. 근데 당신 꿈은 뭐였어요?
-내 꿈은 파일럿이었어요.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그걸 몰고 어머니가 있는 북해도에 가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파일럿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는 유골로 돌아왔죠. 그날 꿈은 깨졌어요.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고 나서 종이비행기를 접을 때 파일럿이 되겠다는 꿈도 같이 접었으니까요.
내가 처음 종이비행기를 접은 것은 어머니가 북해도에 간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일 년 만에 종이비행기가 북해도에 닿았는지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유골을 뿌린 후 종이비행기를 접지 않았다.
두 번째로 종이비행기를 접은 것은 아내가 앞집 남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갔을 때였다. 앞집 남자는 나보다 두 살 어려 형님동생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혼자 밥을 먹는 게 안쓰러워 종종 불러 밥을 먹었는데 아내와 바람이 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람이 아니라며 아내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염원할 때보다 더 간절하게 밤새도록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하지만 아내는 아침이 와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지회사에 출근도 않고 아내를 기다렸다. 두 달이 지나도 아내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가 없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접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접지 못하고 대신 방안에 있는 물건을 트럭에 실고 이곳에 왔다. 이곳은 어머니가 북해도로 가기 전에 살던 집이었다.
*
다음날 여자는 카트에 자신의 물건을 실고 왔다. 카트에는 낡은 트렁크와 핸드백, 옷, 구두, 탬버린, 싸구려 화장품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잎이 둥근 식물과 북해도 여행책도 있었다. 여행책은 얼마나 봤는지 모서리가 닳아있었고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여자는 카트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싸구려 화장품과 탬버린은 텔레비전 위에 놓고 식물은 햇빛이 드는 창문가에 놓았다. 구두는 신발장에 넣고 트렁크는 옷장에 넣었다. 여자의 옷은 아내 옷을 밀쳐놓고 그 자리에 걸었다. 여자가 볼까봐 아내 옷은 내 옷으로 덮었다. 아내가 쓰던 물건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버렸지만 옷은 버릴 수 없었다. 막연하게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온 후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와의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여자의 물건이 놓이자 방안은 꽉 찼다. 칙칙한 방안이 산뜻해졌다. 무엇보다 여자 냄새가 나서 좋았다. 그 냄새는 어딘가 아내의 냄새와 비슷했다. 나는 눈을 감고 여자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마치 옆에 아내가 있는 것 같아 미소를 짓는데 여자가 내 손을 잡고 침대로 올라갔다.
-누구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미소를 지어요? 누군지 모르지만 그 생각은 그만 하고 이거나 봐요. 내가 북해도 구경시켜줄게요.
침대에 엎드리자 여자가 여행책을 펼쳤다. 눈에 덮인 설산이 나타났다. 설산은 하늘 높이 치솟아 신비스러워 보였다. 설산 위에는 하얀 달이 떠 있었고, 설산 아래에는 눈에 덮인 일본 전통가옥이 지붕만 드러낸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음 장을 펴자 눈 속을 걸어가는 남녀가 보였다. 남녀는 두 손을 잡은 채 하염없이 눈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네 개의 발자국은 계속 생겨났지만 눈에 묻혔다. 쏴아악, 하고 바람이 눈 위를 휩쓸고 지나가자 순식간에 남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이 내린 전신주에 앉아있는 까마귀들, 눈 속을 달리는 기차, 눈이 내리는 하코다테의 야경, 끝없이 자작나무가 펼쳐진 눈의 언덕, 눈 속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 눈 덮인 북해도 사진을 보고 있자 아내가 집을 나갔을 때처럼 쓸쓸해졌다.
나는 여행책을 덮고 여자에게 쓸쓸하다고 말했다. 여자는 옷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몇 모금 빨더니 여자는 내 입속에 담배연기를 넣어주었다. 담배연기를 들이마시자 쓸쓸함이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내뱉자 쓸쓸해졌다. 또 쓸쓸하다고 말하자 여자는 옷을 벗고 나를 안았다. 이리 들어와요. 내 몸 안에 들어오면 쓸쓸함은 사라질 거예요. 허겁지겁 바지를 벗고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아내의 몸과 달리 여자의 몸 안은 깊고 따뜻했다. 사실 아내와는 한 달에 한두 번 밖에 잠자리를 하지 못했다. 제지회사 트럭을 몰고 부산까지 종이 배달을 하고 들어오면 새벽 두시였다. 후다닥 몸만 씻고 아내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아내는 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여자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주었다. 아내가 아니라 이 여자가 내 여자였다.
-저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사정을 하고 났을 때 여자가 노래방 건물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말했다.
-북해도로 가는 비행기에요.
-정말 북해도에 가는 비행기에요?
-그럼요. 어머니도 저 비행기를 타고 북해도에 갔거든요.
여자는 비행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아무거나요.
-아무거나는 만들 줄 모르는데.
-그럼 야채고기밥요.
다른 음식을 고르고 싶었는데 습관적으로 아내가 주말마다 해주는 음식을 말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수록 이상하게 아내가 해준 음식이 떠올랐다. 여자는 주방으로 가더니 냉장고에서 곰팡이가 핀 당근을 꺼내 깍두기 크기로 썰고는 돼지고기를 삶았다. 삶은 돼지고기에 당근을 넣고 간장과 물엿을 부어 프라이팬에 밥과 함께 볶았다. 고소한 냄새가 반지하방에 퍼졌다. 십 분 만에 야채고기밥이 완성됐다. 여자는 하필 아내가 좋아하는 접시에 야채고기밥을 담아 식탁에 놓았다. 그릇을 보자 아내가 떠올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여자와 마주앉아 야채고기밥을 먹었다. 아내가 해준 것보다 맛이 좋았다.
야채고기밥을 먹고 나서 또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 같은 반지하방에서 내가 여자와 할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와 편의점을 들락거리는 일본관광객과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몸을 탐했다. 여자의 몸은 깊었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었다. 그 깊은 몸 속 끝에 다다르기 위해 나는 몸을 더욱 뾰족하게 세웠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른 순간 환락을 느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런 섹스였다. 아내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환락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환락의 끝에 닿은 느낌이랄까. 그 환락을 찾아 또다시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환락 속에서 여자에게 쓸쓸한 정을 느꼈고, 그 쓸쓸한 정을 통해 여자가 조금 더 좋아졌다. 꿈같은 일주일이 그렇게 흘러갔다. 내게는 더없이 완벽한 일주일이었다.
*
일주일 만에 여자가 노래방에 나간 후 나는 공항에 갔다. 공항 청사에 앉아 활주로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에 공항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비행기를 보고 있으면 무료함은 사라지고 괜히 가슴이 설렜다. 밤의 공항 청사는 일본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일본관광객을 보면 어머니에게 배운 일본어로 곤방와, 곤방와, 하고 저녁 인사를 했다. 일본관광객은 무표정하게 곤방와, 하고 인사를 했다.
공항 청사를 한 바퀴 돌아 나와 반지하방으로 갔다. 여자가 없어 반지하방은 더욱 어두컴컴해 보였다. 나는 식탁에 앉아 여자를 기다리며 종이를 접었다. 바람이 좋아 종이는 손끝에 착착 감겼다. 종이를 접을 때는 바람이 불어야 좋았다. 바람이 없으면 종이는 습기를 머금어 쉽게 찢어졌다. 게다가 바람이 불어야 종이비행기를 날릴 수 있었다. 나는 접은 종이를 식탁에 내려놓고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를 찾아 앞집 남자의 고향까지 찾아갔으나 그곳에도 없었다. 아내는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앞집 남자와 도망친 것이었다. 한참동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가 들어왔다. 누구 생각을 하냐고 여자가 물었다. 아내를 생각했지만 죽은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아내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북해도에 가려구요.
여자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시고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물었다.
-북해도엘요? 거길 왜요? 그 먼 곳을 왜 가요? 가지 마요.
-사진만 보는 건 이제 질렸어요. 북해도의 눈을 보고 싶어요. 그 눈을 만지고 먹어보고 느끼고 싶어요. 끝없는 눈 위를 걸어가고 싶어요. 그 눈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부루라이토 북해도를요.
-부루라이토 북해도를요?
-이시다 아유미의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바꿔서 부르는 노래죠.
-그럼 나랑 같이 가요. 나도 어머니가 살았던 북해도에 가고 싶었거든요. 하코다테든 오타루든 삿뽀루든 노보리베쓰든. 일본말도 웬만큼 할 줄 알아요. 아침인사는 오하이오, 점심인사는 곤니찌와, 저녁인사는 곤방와. 맛있다는 말을 할 때는 오이시. 이 말만 알아도 일본인과 대화는 문제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따라가서 가이드해 줄게요.
여자는 피식 웃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가이드는 필요 없어요. 이 여행책만 있으면 돼요.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하코다테에요. 하코다테를 보고 첫눈에 반했으니까요. 하코다테 항구의 야경이 얼마나 근사하던지. 하코다테를 구경하고 나면 여행책에 나온 곳을 한 군데씩 돌아볼 거예요. 그러려면 겨울이 다 갈지 몰라요.
-그렇게나 길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북해도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면발이 쫄깃쫄깃한 라멘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여자가 말을 많이 할수록 절망스러웠다. 여자의 말을 자르고 언제 돌아 오냐고 물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죠. 내일 일도 모르는데 그때 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운 좋게 당신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그 집에서 한 철 더 머물 수도 있구요.
여자는 다음 주 일요일에 북해도에 간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열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심란했다. 나는 여자가 좋았다. 여자와 같이 살고 싶었다. 새 일자리를 구하면 어머니와 살았던 이 반지하방에서 여자와 새 출발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떠난다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잡아야 했다. 여자마저 떠나고 나면 내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나는 여자의 담배를 빼앗아 한 모금 빨았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한 모금 빨고 여자에게 말했다.
-나랑 살면 안돼요? 아니, 나랑 살아요.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종이비행기를 접는 남자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내가 좋아서 카트에 물건을 실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자는 잠시 나를 지나가는 경유지쯤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여자는 침대로 올라가 불을 끄고 벽에 기댔다. 편의점 앞에 멈춰선 차의 불빛이 여자 얼굴을 비췄다. 여자는 눈을 찡그리더니 차의 불빛을 피해 머리를 돌렸다. 조금 후 차가 지나가자 방안은 어두워졌다.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대 아래서 쥐가 종이비행기를 갉아먹는 소리만 났다.
여자가 잠든 후 나는 여행책을 찢었다. 여행책 안에 여자가 걸어 다니는 골목길도 접어 넣었고, 여자가 다니는 노래방도 접어 넣었고, 여자가 담배를 사는 편의점도 접어 넣었다. 여자가 들고 온 카트도 접어 넣었고, 여자가 밤마다 바라보는 북해도행 비행기도 접어 넣었다. 나는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접어 넣은 종이비행기를 창밖으로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날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
여행책을 또 찢어 접었다. 점점 방안에는 종이비행기가 쌓여갔다. 여행책을 죄다 접고 나서 다른 종이를 찾았다. 이제 종이는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는 접을 게 없자 나는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옷장에서 아내 옷을 꺼내 접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옷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아내 옷을 접고 나서 여자 옷을 접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여자 옷을 접고 나서 식물을 접었다. 또 뭐가 있나 둘러보다 침대 밑에 있는 쥐를 발견했다. 침대 밑으로 머리통을 들이밀고 빗자루로 쥐를 때려잡았다. 종이를 갉아먹은 쥐는 배가 불룩했다. 쥐를 방바닥에 놓고 손바닥으로 배를 누르자 개구리 알 같은 종이가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종이를 훔쳐내고 쥐를 평평하게 펴서 종이비행기와 똑같은 순서대로 접었다.
*
이제 방안은 종이비행기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반지하방 창문으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자 종이비행기들이 날아올랐다. 십 센티미터씩, 이십 센티미터씩, 삼십 센티미터씩 날아오른 종이비행기는 다른 종이비행기의 등에 올라탔다. 등에 올라 탄 종이비행기를 집어 계속 창밖으로 날렸다. 지나가는 차에 휩쓸려 종이비행기가 붕 떠올랐다 떨어졌다. 개중 몇 개는 바퀴에 깔리고 개중 몇 개는 찢어지고 개중 몇 개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알바는 종이비행기를 손님으로 착각하고 어서 오세요, 하며 인사를 했다. 알바는 졸다가도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면 자동으로 일어나 어서 오세요, 했다.
나는 문 밖에 있는 카트를 가져다 여행책으로 접은 종이비행기를 담았다. 침대 아래 있는 것을 담고 있을 때 여자가 들어왔다.
-북해도 비행기 티켓을 사왔어요.
여자는 비행기 티켓을 쥐고 빙그르르 돌았다. 마찌노 아카리가 도데모기레이네, 요코하마 부루라이토 요코하마, 아나따또 후타리 시아와세요, 이쯔모노 요우니 아이노 고또바오…… 탬버린을 치며 여자는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불렀다. 여자는 이시다 아유미보다 간드러지게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도 좋았다. 노래 끝에서 여자는 요코하마 대신 북해도를 넣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여행책이 없다고 북해도에 못가는 건 아니라구요. 이 비행기 티켓만 있으면 돼요. 암튼 이제 반지하방하고도 굿바이네요. 그리고 당신하고도.
굿바이라는 말에 목이 턱 막혔다. 나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셔 목에 사래가 들렸다. 여자는 사이다를 가로채 마시며 물었다.
-종이비행기를 왜 카트에 담는 거예요?
-버릴려구요.
-이 많은 것을요? 어디에다요?
-한강에다.
-한강에다요?
비행기 티켓을 식탁에 놓고 여자는 옷을 갈아입으며 한강에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여자가 등을 돌리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 슬쩍 비행기 시간을 보았다. 내일모레 밤 아홉시 오십 분발 북해도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집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이것만 없애면 여자는 북해도에 갈 수 없었다. 굳이 여자를 붙잡을 필요 없이 이것만 없애면 됐다.
나는 카트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서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비행기 티켓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이내 나왔다. 여자와 카트를 밀고 골목길을 내려갔다. 아내와 카트를 밀고 마트를 돌아다니던 때가 생각나 기분이 좋아졌다. 골목길 아래쪽에 있는 모텔을 지나 왼편으로 가자 공항이 나왔다. 공항 청사에서 일본 관광객들이 트렁크를 끌고 걸어 나왔다. 곤방와, 하고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일본 관광객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곤방와, 하고는 인사를 했다. 일본 관광객들을 지나 십 분을 가자 한강이 나왔다.
한강 다리에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연을 날리는 사람도 있었고 낚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들을 지나 한적한 곳으로 갔다. 카트의 뒤쪽 바퀴가 부서져 쇳소리를 냈다. 카트를 세워 놓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카트에 있는 종이비행기를 집어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강물 위로 떨어졌다. 점점 강물 위에는 종이비행기가 늘어났다. 종이비행기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지 못하고 물에 젖었다. 물에 젖자 종이비행기가 펴졌다. 눈이 내린 전신주에 앉아있는 까마귀들, 눈 속을 달리는 기차, 눈 속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 눈이 내리는 하코다테의 야경, 끝없이 자작나무가 펼쳐진 눈의 언덕 . . . 펴진 종이에서 북해도의 풍경이 생겨났다. 풍경과 풍경이 서로 겹쳐지면서 물살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다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비행기 티켓을 꺼내 날렸다.
-미쳤어요? 그건 내 북해도 비행기 티켓인데.
비행기 티켓은 공중으로 떠올랐지만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고 다리에 떨어졌다. 여자는 나를 밀치고 달려가 비행기 티켓을 주워 가슴속에 넣었다. 뒤로 다가가 여자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요.
여자가 몸을 돌려 나를 밀어냈다.
-가지 마라니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요? 세상에 사랑이 어딨어요? 남자들은 자고나면 날 떠나갔어요.
-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웃기지 말아요.
여자는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차고 뛰어갔다. 한 손으로 정강이를 잡고 한 손으로 카트를 밀며 뒤쫓아 갔다. 앞에서 오는 사람들이 시끄러운 쇳소리에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는 공항 청사로 들어갔다. 카트를 밀고 공항 청사로 뒤쫓아 갔다. 여자는 공항 청사를 한 바퀴 돌아 나갔다. 대각선으로 달려 여자를 뒤쫓아 나갔다. 여자는 횡단보도를 건너 달렸다. 나도 횡단보도를 건너 쫓아갔다. 앞에서 오는 사람들이 카트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는 모텔을 지나 골목길을 올라가서는 곧장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계단에 카트를 놓고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내가 비행기 티켓을 가져갈까봐 여자는 옷을 벗지 않고 잤다.
*
다음날 저녁 여자는 트렁크에 자신의 물건을 꾸려 넣었다. 나는 여자에게 꼬꼬뱅 요리를 해주기 위해 편의점에서 사온 생닭을 도마에 올려놓고 식칼로 잘랐다. 반토막 낸 닭을 다시 사등분해 냄비에 넣고 싸구려 와인을 부었다. 와인이 흘러내리면서 닭을 붉게 물들였다. 감자와 단호박을 썰어 넣어주고 골고루 뒤적여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닭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여자의 물건이 하나씩 빠지자 이빨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가 휑했다. 여자는 휑한 자리마다 종이비행기를 놓았다. 하지만 휑한 자리는 메워지지 않고 더 휑해 보였다. 나는 주방서랍에서 컵과 접시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냅킨도 꺼내 사이다와 함께 컵 옆에 놓았다. 그리고 와인에 익힌 닭고기를 접시에 담았다.
-날 위한 최후의 만찬인가요? 고마워요.
식탁에 접시를 놓자 여자가 말했다.
-근데 이건 무슨 요리에요?
-꼬꼬뱅이에요. 와인에 절인 닭. 아내가 좋아한 요리죠.
-아내가 있었어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앞집 남자와 바람이 나서 나를 버리고 떠난 아내가 있었어요. 그래서 혼자 이곳에 온 거죠. 어머니도 나를 버리고 떠났는데 아내도 나를 버리고 떠난 거죠. 여자들은 언제나 내 옆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났어요. 그리고 당신도 나를 떠나겠죠.
나는 사이다 뚜껑을 따서 여자의 잔에 따라주고 내 잔에도 따른 후 잔을 부딪쳤다. 한 모금 입에 대고 잔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뼈를 발라내며 꼬꼬뱅을 먹었다. 양념이 입술에 묻을 때에는 냅킨으로 살짝살짝 닦았다. 나는 꼬꼬뱅을 먹지 않고 사이다만 홀짝였다. 여자는 꼬꼬뱅을 다 먹고 나서 내 목을 끌어안았다.
-마지막으로 한번 해요.
나는 여자를 들어 안아 침대에 올려놓았다. 진하게 여자 냄새가 났다. 여자 냄새를 맡자 여자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가슴 속으로 손을 넣어 비행기 티켓을 찾았다. 비행기 티켓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팬티 속에도 비행기 티켓은 없었다. 팬티를 벗기고 여자의 몸을 뒤집어엎어 등짝을 살폈다. 등짝에도 비행기 티켓은 없었다. 대체 어디에 숨겼을까. 시트에 떨어졌나 살폈지만 종이 쪼가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여자는 내가 찾지 못하도록 비행기 티켓을 꼭꼭 숨겨둔 것이다. 나는 여자에게 다시 한 번 가지 말라고 말했다. 여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당신을 접을 거예요.
여자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날 접는다구요?
깔깔거리며 여자가 웃었다. 그때 노래방 건물 위로 북해도행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비행기 굉음에 묻혔다. 덜덜덜덜, 창문이 흔들렸고 덩달아 내 몸도 덜덜거렸다. 여자의 몸도 덜덜거렸다.
-이제는 나도 종이로 보이나요? 난 종이가 아니에요.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고 나는 배 위로 올라갔다.
-종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난 이 방에 있는 건 다 접었어요. 종이도 접었고 옷도 접었고 식물도 접었고. 심지어 쥐까지. 그러니 당신도 접을 수 있어요.
나는 왼손으로 여자의 허벅지를 누르고 오른손을 등짝 아래로 넣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씩 상체가 올라와 여자는 니은 자 모양이 됐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체위에요? 세상에 이런 체위도 있어요? 이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체위라고 말하고는 여자의 등짝을 세게 눌렀다. 활처럼 등짝이 굽히면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비어져 나왔다.
-이제 당신은 종이비행기가 될 거예요. 내가 당신을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날려 줄게요. 북해도까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발로 등짝을 밟았다. 뚜두두둑. 짧은 비명과 함께 상체가 고꾸라졌다. 반으로 접혀진 여자의 등짝은 하얀 종이 같았다. 여자의 팔을 안으로 접어 넣은 다음 다시 반을 접어 다리와 맞물려주었다. 종이비행기는 머리와 몸통 부분을 맞물려줘야 힘을 받아 견고해졌다. 맞물려준 부분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접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여자가 아니라 종이를 접는 것 같았다. 나는 날개를 만들기 위해 여자의 몸속에서 두 팔을 빼냈다. 팔이 나오면서 비행기 티켓이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제 비행기 티켓은 필요 없었다. 비행기 티켓을 주워 여자의 몸속에 넣고 같이 접었다. 종이비행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날개였다. 날개의 균형을 잡아줘야 무게중심이 맞았고 날렸을 때 손의 탄력을 받아 잘 날아갔다. 원하는 방향으로 날리려면 날개를 잘 접어야 했다. 여자의 팔을 꺾어 날개를 만들어주었다.
이제 침대에는 여자 대신 종이비행기가 놓여 있었다. 여자로 만든 종이비행기. 지금껏 내가 만든 종이비행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여자를 북해도로 날리기 위해 종이비행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종이비행기가 된 여자는 몸이 너무 가벼워져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종이비행기를 침대에 내려놓고 여자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여자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종이비행기를 끌어당겨 여자를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여자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종이비행기가 된 여자와는 할 수 없었다. 여자와 하려면 종이비행기가 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종이비행기가 되어서 바람을 타고 날아가 여자의 등짝에 올라타면 됐다.
나는 종이비행기가 된 여자를 바라보며 옷을 하나씩 벗었다. 팬티까지 벗고 나서 두 팔을 가슴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깨도 최대한 가슴 안으로 모아주고 여자를 접을 때와 똑같은 순서대로 나를 접었다. 다리까지 접고 난 후 몸속에서 두 팔을 빼내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폈다. 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바둥거려도 날개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바람은 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종이의 양쪽 면을 밖으로 꺾어 날개를 만들었다. 종이비행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날개였다. 날개의 균형을 잡아줘야 무게중심이 맞았고 날렸을 때 손의 탄력을 받아 잘 날아갔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리려면 날개를 잘 접어야 했다.
갓 접은 종이비행기를 들고 나는 반지하방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건너편에 있는 이층 노래방을 바라보았다. 통유리창으로 된 노래방 룸을 하나씩 훑으며 여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노래방 아래층인 편의점에도 여자는 없었다. 고개를 돌려 골목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카디건을 입은 남자와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골목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카디건과 나이키가 노래방에 올라간 후 십 분이 지나지 않아 여자가 골목길을 올라왔다.
여자는 굽이 십 센티미터가 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언제나 여자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키가 커 보이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지만 여자는 구두를 신어도 16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다. 아내의 키도 16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다. 나는 키가 작은 여자가 좋았다. 아내를 좋아한 것도 키가 작아서였다. 독특한 성적취향인지 모르겠지만 키가 작은 여자를 안고 있으면 이 여자가 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노래방으로 올라가려는 여자에게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정확히 여자 앞에 떨어졌다. 여자는 나를 힐끔 돌아보고는 구둣발로 종이비행기를 밟더니 노래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4번 룸에서 카디건과 나이키와 함께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 달 전 나는 아내와 살던 집을 나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삿짐을 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흔 살이나 먹은 남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마흔 이하 구인. 만으로 서른아홉이라 써서 넣어도 소용이 없었다. 경력자를 구하는 곳도 하나 같이 마흔 이하를 구했다. 운 좋게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백 군데 넘게 이력서를 넣었지만 연락이 온 곳은 없었다. 마흔 살에 노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마흔 살에 노인이 되어버린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것도 무료해질 때는 노래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관광객과 노래를 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때부터 밤이 오면 노래방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보이지 않으면 편의점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에는 일본관광객이 많았다. 공항 근처에 묵는 일본관광객이 노래방에 왔다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편의점이 주로 낮에 손님이 많았다면 노래방은 밤에 손님이 많았다. 노래방 손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두 시간 노래를 부르고 가는 손님과 여자를 불러 노는 손님. 전자의 경우는 저녁을 먹고 와서 깔끔하게 노래만 부르고 갔다. 시간을 연장해도 버스나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들어갔다. 카디건과 나이키는 후자였다. 여자를 불러서 노는 손님. 여자는 카디건과 나이키가 올 때마다 노래방에 왔다. 물론 카디건과 나이키가 오지 않을 때도 왔다. 일주일에 세 번 올 때도 있었고 네 번 올 때도 있었다. 여자가 오는 날은 불규칙적이었다.
*
아홉 시가 넘자 여자는 카디건과 노래방에서 나왔다. 여자는 카디건을 따라 골목길을 내려갔다. 나는 반지하방 계단을 올라가 여자를 뒤따라갔다. 여자는 카디건과 골목길 아래쪽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 간판 너머로 공항의 활주로가 보였다. 모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활주로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이십 분 만에 여자는 모텔에서 나왔다.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골목길을 올라갔다. 허공 속에서 누군가 오른쪽 어깨에 실을 매달아 끌어올리는 것처럼 여자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걸었다. 여자처럼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고 걸어가 보았다. 여자의 냄새가 코에 닿았다. 그 냄새에 여자가 조금 좋아졌다.
여자가 노래방에 올라가고 나서 나는 반지하방에 들어갔다. 조금 후 여자는 나이키를 따라 다시 노래방을 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피하는 걸 보면 내게 관심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종이비행기를 접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골목길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이키가 여자의 손을 잡아 끌고 내가 사는 반지하방 건물로 들어왔다. 문틈으로 여자의 다리와 나이키의 다리가 보였다. 나이키는 계단 구석으로 여자를 밀어붙인 후 바지를 까 내렸다. 달처럼 하얗게 나이키의 엉덩이가 솟아올랐다. 벽에 기대 나이키를 받아들이는 여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나는 얼른 문을 잡아당기고 빗자루를 집어 침대 밑에 있는 쥐에게 던졌다. 쥐는 잽싸게 침대 구석으로 숨었다. 간밤에 창문가에서 음식물쓰레기를 먹던 쥐가 여자가 던진 담배꽁초에 놀라 들어온 것이다.
-방을 종이비행기로 도배했네요.
노크도 하지 않고 여자가 문을 열어젖혔다. 문틈으로 계단을 쳐다봤지만 나이키는 가고 없었다. 여자는 구두도 벗지 않고 들어와 방안을 둘러보았다. 열 평도 안 되는 방은 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 왼편에는 주방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창문이 있었다. 창문 옆에는 주방에서 옮겨다 놓은 식탁이 있었다. 식탁 뒤로는 옷장과 침대가 있었다. 침대 아래에는 제지회사를 다닐 때 갖다놓은 종이가 쌓여 있었다. 인쇄지에서부터 필기용지, 박엽지, 백판지, 모조지, A4용지까지 있었다.
-노래방에서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부를 때마다 이 방을 보면 무언가가 날아다녔는데 이제 보니 그게 종이비행기였네요. 세상에 종이비행기를 접는 남자라니. 이걸 혼자 접었어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칙칙한 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종이비행기를 접는 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나도 접어 봐요?
여자는 피식 웃고는 허리를 숙여 종이비행기를 만졌다. 바스락, 바스락. 종이비행기에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여자의 입가에는 립스틱이 번져 있었고 눈가에는 마스카라가 번져 있었다. 치마 자락에는 콧물처럼 정액이 묻어 있었다. 뒤늦게 여자는 치마 자락에 묻은 정액을 보고 종이비행기의 날개를 찢어 닦았다. 종이 모서리에 긁혀 치마의 올이 나가자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는데 . . . 한 때는 내게도 꿈이 있었다구요.
-꿈이요?
그때 노래방 건물 위로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비행기가 내뿜는 굉음에 창문이 덜덜덜덜, 흔들렸다. 덩달아 종이비행기도 덜덜거렸다. 텔레비전은 전파방해를 받아 지지직거렸다. 점점 방안은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덜덜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
비행기가 지나간 뒤 여자는 까치발을 들고 내 목을 끌어안았다. 여자의 가슴이 내 가슴 아래에 닿았다. 아내의 가슴처럼 따듯했다. 한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졌다. 여자의 가슴은 아내의 가슴처럼 작았다. 허겁지겁 브래지어를 벗기고 치마를 끌어내렸다.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의 불빛이 여자의 몸을 비췄다. 번쩍 목에서 꽃이 피는가 싶더니 입에서 꽃이 피었고, 손에서 꽃이 피었다. 배꼽에서 꽃이 피는가 싶더니 여자의 그곳에서 꽃이 피었다. 차의 불빛이 여자의 몸에 피워낸 빨간 불꽃. 차가 지나가자 꽃도 사라졌다.
사라진 꽃을 찾을 것처럼 나는 여자의 가슴을 빨았다. 여자의 가슴에서 꽃이 피어났다. 사라진 꽃보다 그 꽃은 빨갰다. 나는 여자를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지렁이처럼 여자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정성스럽게 가슴까지 기어 올라가며 애무를 하자 여자는 완전히 젖었다. 가슴에 핀 꽃을 보면서 천천히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좋아요? 아내와 할 때처럼 무언가를 확인하듯 물었다. 너무 좋아요. 그 말에 더 빨리 엉덩이를 움직였다. 여자의 손톱이 엉덩이를 파고드는 순간 사정을 했다. 여자는 두 다리로 내 허리를 조였다. 구두 한 짝이 내 등짝에 떨어졌다. 여자는 발로 등짝에 떨어진 구두를 밀쳐냈다. 나머지 구두 한 짝도 벗어 던졌다. 나는 노래방 건물 위로 내려앉는 비행기를 보면서 여자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내 꿈은 한국의 이시다 아유미가 되는 거였어요. 왜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부르는 일본 여가수 있잖아요. 얼마나 이 여자를 좋아했는지 예명도 아유미라고 했죠.
여자는 옷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하얗게,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여자는 급하게 담배를 빨고는 내 입 속에 담배연기를 넣어주었다. 담배연기 속에서 여자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아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여자가 조금 더 좋아졌다. 여자는 다시 내 입속에 담배연기를 넣어주었다.
-처음엔 밤업소에서 노래했는데 웬걸 아유미라는 예명 대신 난쟁이로 불렸죠. 하지만 키는 작아도 남자들한테 인기는 많았죠. 남자들은 언제나 꿈을 키워주겠다며 접근했어요. 그래서 남자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죠. 그때 부른 노래가 부루라이토 요코하마예요. 하지만 남자들은 자고나면 내 꿈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떠났어요.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노래만 부르다 이 구석진 동네의 노래방까지 떠밀려 왔죠. 근데 당신 꿈은 뭐였어요?
-내 꿈은 파일럿이었어요.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그걸 몰고 어머니가 있는 북해도에 가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파일럿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는 유골로 돌아왔죠. 그날 꿈은 깨졌어요.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고 나서 종이비행기를 접을 때 파일럿이 되겠다는 꿈도 같이 접었으니까요.
내가 처음 종이비행기를 접은 것은 어머니가 북해도에 간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일 년 만에 종이비행기가 북해도에 닿았는지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유골을 뿌린 후 종이비행기를 접지 않았다.
두 번째로 종이비행기를 접은 것은 아내가 앞집 남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갔을 때였다. 앞집 남자는 나보다 두 살 어려 형님동생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혼자 밥을 먹는 게 안쓰러워 종종 불러 밥을 먹었는데 아내와 바람이 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람이 아니라며 아내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염원할 때보다 더 간절하게 밤새도록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하지만 아내는 아침이 와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지회사에 출근도 않고 아내를 기다렸다. 두 달이 지나도 아내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가 없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접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접지 못하고 대신 방안에 있는 물건을 트럭에 실고 이곳에 왔다. 이곳은 어머니가 북해도로 가기 전에 살던 집이었다.
*
다음날 여자는 카트에 자신의 물건을 실고 왔다. 카트에는 낡은 트렁크와 핸드백, 옷, 구두, 탬버린, 싸구려 화장품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잎이 둥근 식물과 북해도 여행책도 있었다. 여행책은 얼마나 봤는지 모서리가 닳아있었고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여자는 카트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싸구려 화장품과 탬버린은 텔레비전 위에 놓고 식물은 햇빛이 드는 창문가에 놓았다. 구두는 신발장에 넣고 트렁크는 옷장에 넣었다. 여자의 옷은 아내 옷을 밀쳐놓고 그 자리에 걸었다. 여자가 볼까봐 아내 옷은 내 옷으로 덮었다. 아내가 쓰던 물건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버렸지만 옷은 버릴 수 없었다. 막연하게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온 후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와의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여자의 물건이 놓이자 방안은 꽉 찼다. 칙칙한 방안이 산뜻해졌다. 무엇보다 여자 냄새가 나서 좋았다. 그 냄새는 어딘가 아내의 냄새와 비슷했다. 나는 눈을 감고 여자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마치 옆에 아내가 있는 것 같아 미소를 짓는데 여자가 내 손을 잡고 침대로 올라갔다.
-누구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미소를 지어요? 누군지 모르지만 그 생각은 그만 하고 이거나 봐요. 내가 북해도 구경시켜줄게요.
침대에 엎드리자 여자가 여행책을 펼쳤다. 눈에 덮인 설산이 나타났다. 설산은 하늘 높이 치솟아 신비스러워 보였다. 설산 위에는 하얀 달이 떠 있었고, 설산 아래에는 눈에 덮인 일본 전통가옥이 지붕만 드러낸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음 장을 펴자 눈 속을 걸어가는 남녀가 보였다. 남녀는 두 손을 잡은 채 하염없이 눈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네 개의 발자국은 계속 생겨났지만 눈에 묻혔다. 쏴아악, 하고 바람이 눈 위를 휩쓸고 지나가자 순식간에 남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이 내린 전신주에 앉아있는 까마귀들, 눈 속을 달리는 기차, 눈이 내리는 하코다테의 야경, 끝없이 자작나무가 펼쳐진 눈의 언덕, 눈 속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 눈 덮인 북해도 사진을 보고 있자 아내가 집을 나갔을 때처럼 쓸쓸해졌다.
나는 여행책을 덮고 여자에게 쓸쓸하다고 말했다. 여자는 옷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몇 모금 빨더니 여자는 내 입속에 담배연기를 넣어주었다. 담배연기를 들이마시자 쓸쓸함이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내뱉자 쓸쓸해졌다. 또 쓸쓸하다고 말하자 여자는 옷을 벗고 나를 안았다. 이리 들어와요. 내 몸 안에 들어오면 쓸쓸함은 사라질 거예요. 허겁지겁 바지를 벗고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아내의 몸과 달리 여자의 몸 안은 깊고 따뜻했다. 사실 아내와는 한 달에 한두 번 밖에 잠자리를 하지 못했다. 제지회사 트럭을 몰고 부산까지 종이 배달을 하고 들어오면 새벽 두시였다. 후다닥 몸만 씻고 아내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아내는 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여자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주었다. 아내가 아니라 이 여자가 내 여자였다.
-저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사정을 하고 났을 때 여자가 노래방 건물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말했다.
-북해도로 가는 비행기에요.
-정말 북해도에 가는 비행기에요?
-그럼요. 어머니도 저 비행기를 타고 북해도에 갔거든요.
여자는 비행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아무거나요.
-아무거나는 만들 줄 모르는데.
-그럼 야채고기밥요.
다른 음식을 고르고 싶었는데 습관적으로 아내가 주말마다 해주는 음식을 말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수록 이상하게 아내가 해준 음식이 떠올랐다. 여자는 주방으로 가더니 냉장고에서 곰팡이가 핀 당근을 꺼내 깍두기 크기로 썰고는 돼지고기를 삶았다. 삶은 돼지고기에 당근을 넣고 간장과 물엿을 부어 프라이팬에 밥과 함께 볶았다. 고소한 냄새가 반지하방에 퍼졌다. 십 분 만에 야채고기밥이 완성됐다. 여자는 하필 아내가 좋아하는 접시에 야채고기밥을 담아 식탁에 놓았다. 그릇을 보자 아내가 떠올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여자와 마주앉아 야채고기밥을 먹었다. 아내가 해준 것보다 맛이 좋았다.
야채고기밥을 먹고 나서 또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 같은 반지하방에서 내가 여자와 할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와 편의점을 들락거리는 일본관광객과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몸을 탐했다. 여자의 몸은 깊었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었다. 그 깊은 몸 속 끝에 다다르기 위해 나는 몸을 더욱 뾰족하게 세웠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른 순간 환락을 느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런 섹스였다. 아내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환락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환락의 끝에 닿은 느낌이랄까. 그 환락을 찾아 또다시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환락 속에서 여자에게 쓸쓸한 정을 느꼈고, 그 쓸쓸한 정을 통해 여자가 조금 더 좋아졌다. 꿈같은 일주일이 그렇게 흘러갔다. 내게는 더없이 완벽한 일주일이었다.
*
일주일 만에 여자가 노래방에 나간 후 나는 공항에 갔다. 공항 청사에 앉아 활주로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에 공항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비행기를 보고 있으면 무료함은 사라지고 괜히 가슴이 설렜다. 밤의 공항 청사는 일본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일본관광객을 보면 어머니에게 배운 일본어로 곤방와, 곤방와, 하고 저녁 인사를 했다. 일본관광객은 무표정하게 곤방와, 하고 인사를 했다.
공항 청사를 한 바퀴 돌아 나와 반지하방으로 갔다. 여자가 없어 반지하방은 더욱 어두컴컴해 보였다. 나는 식탁에 앉아 여자를 기다리며 종이를 접었다. 바람이 좋아 종이는 손끝에 착착 감겼다. 종이를 접을 때는 바람이 불어야 좋았다. 바람이 없으면 종이는 습기를 머금어 쉽게 찢어졌다. 게다가 바람이 불어야 종이비행기를 날릴 수 있었다. 나는 접은 종이를 식탁에 내려놓고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를 찾아 앞집 남자의 고향까지 찾아갔으나 그곳에도 없었다. 아내는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앞집 남자와 도망친 것이었다. 한참동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가 들어왔다. 누구 생각을 하냐고 여자가 물었다. 아내를 생각했지만 죽은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아내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북해도에 가려구요.
여자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시고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물었다.
-북해도엘요? 거길 왜요? 그 먼 곳을 왜 가요? 가지 마요.
-사진만 보는 건 이제 질렸어요. 북해도의 눈을 보고 싶어요. 그 눈을 만지고 먹어보고 느끼고 싶어요. 끝없는 눈 위를 걸어가고 싶어요. 그 눈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부루라이토 북해도를요.
-부루라이토 북해도를요?
-이시다 아유미의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바꿔서 부르는 노래죠.
-그럼 나랑 같이 가요. 나도 어머니가 살았던 북해도에 가고 싶었거든요. 하코다테든 오타루든 삿뽀루든 노보리베쓰든. 일본말도 웬만큼 할 줄 알아요. 아침인사는 오하이오, 점심인사는 곤니찌와, 저녁인사는 곤방와. 맛있다는 말을 할 때는 오이시. 이 말만 알아도 일본인과 대화는 문제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따라가서 가이드해 줄게요.
여자는 피식 웃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가이드는 필요 없어요. 이 여행책만 있으면 돼요.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하코다테에요. 하코다테를 보고 첫눈에 반했으니까요. 하코다테 항구의 야경이 얼마나 근사하던지. 하코다테를 구경하고 나면 여행책에 나온 곳을 한 군데씩 돌아볼 거예요. 그러려면 겨울이 다 갈지 몰라요.
-그렇게나 길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북해도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면발이 쫄깃쫄깃한 라멘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여자가 말을 많이 할수록 절망스러웠다. 여자의 말을 자르고 언제 돌아 오냐고 물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죠. 내일 일도 모르는데 그때 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운 좋게 당신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그 집에서 한 철 더 머물 수도 있구요.
여자는 다음 주 일요일에 북해도에 간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열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심란했다. 나는 여자가 좋았다. 여자와 같이 살고 싶었다. 새 일자리를 구하면 어머니와 살았던 이 반지하방에서 여자와 새 출발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떠난다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잡아야 했다. 여자마저 떠나고 나면 내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나는 여자의 담배를 빼앗아 한 모금 빨았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한 모금 빨고 여자에게 말했다.
-나랑 살면 안돼요? 아니, 나랑 살아요.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종이비행기를 접는 남자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내가 좋아서 카트에 물건을 실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자는 잠시 나를 지나가는 경유지쯤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여자는 침대로 올라가 불을 끄고 벽에 기댔다. 편의점 앞에 멈춰선 차의 불빛이 여자 얼굴을 비췄다. 여자는 눈을 찡그리더니 차의 불빛을 피해 머리를 돌렸다. 조금 후 차가 지나가자 방안은 어두워졌다.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대 아래서 쥐가 종이비행기를 갉아먹는 소리만 났다.
여자가 잠든 후 나는 여행책을 찢었다. 여행책 안에 여자가 걸어 다니는 골목길도 접어 넣었고, 여자가 다니는 노래방도 접어 넣었고, 여자가 담배를 사는 편의점도 접어 넣었다. 여자가 들고 온 카트도 접어 넣었고, 여자가 밤마다 바라보는 북해도행 비행기도 접어 넣었다. 나는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접어 넣은 종이비행기를 창밖으로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날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
여행책을 또 찢어 접었다. 점점 방안에는 종이비행기가 쌓여갔다. 여행책을 죄다 접고 나서 다른 종이를 찾았다. 이제 종이는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는 접을 게 없자 나는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옷장에서 아내 옷을 꺼내 접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옷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아내 옷을 접고 나서 여자 옷을 접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여자 옷을 접고 나서 식물을 접었다. 또 뭐가 있나 둘러보다 침대 밑에 있는 쥐를 발견했다. 침대 밑으로 머리통을 들이밀고 빗자루로 쥐를 때려잡았다. 종이를 갉아먹은 쥐는 배가 불룩했다. 쥐를 방바닥에 놓고 손바닥으로 배를 누르자 개구리 알 같은 종이가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종이를 훔쳐내고 쥐를 평평하게 펴서 종이비행기와 똑같은 순서대로 접었다.
*
이제 방안은 종이비행기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반지하방 창문으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자 종이비행기들이 날아올랐다. 십 센티미터씩, 이십 센티미터씩, 삼십 센티미터씩 날아오른 종이비행기는 다른 종이비행기의 등에 올라탔다. 등에 올라 탄 종이비행기를 집어 계속 창밖으로 날렸다. 지나가는 차에 휩쓸려 종이비행기가 붕 떠올랐다 떨어졌다. 개중 몇 개는 바퀴에 깔리고 개중 몇 개는 찢어지고 개중 몇 개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알바는 종이비행기를 손님으로 착각하고 어서 오세요, 하며 인사를 했다. 알바는 졸다가도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면 자동으로 일어나 어서 오세요, 했다.
나는 문 밖에 있는 카트를 가져다 여행책으로 접은 종이비행기를 담았다. 침대 아래 있는 것을 담고 있을 때 여자가 들어왔다.
-북해도 비행기 티켓을 사왔어요.
여자는 비행기 티켓을 쥐고 빙그르르 돌았다. 마찌노 아카리가 도데모기레이네, 요코하마 부루라이토 요코하마, 아나따또 후타리 시아와세요, 이쯔모노 요우니 아이노 고또바오…… 탬버린을 치며 여자는 부루라이토 요코하마를 불렀다. 여자는 이시다 아유미보다 간드러지게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도 좋았다. 노래 끝에서 여자는 요코하마 대신 북해도를 넣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여행책이 없다고 북해도에 못가는 건 아니라구요. 이 비행기 티켓만 있으면 돼요. 암튼 이제 반지하방하고도 굿바이네요. 그리고 당신하고도.
굿바이라는 말에 목이 턱 막혔다. 나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셔 목에 사래가 들렸다. 여자는 사이다를 가로채 마시며 물었다.
-종이비행기를 왜 카트에 담는 거예요?
-버릴려구요.
-이 많은 것을요? 어디에다요?
-한강에다.
-한강에다요?
비행기 티켓을 식탁에 놓고 여자는 옷을 갈아입으며 한강에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여자가 등을 돌리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 슬쩍 비행기 시간을 보았다. 내일모레 밤 아홉시 오십 분발 북해도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집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이것만 없애면 여자는 북해도에 갈 수 없었다. 굳이 여자를 붙잡을 필요 없이 이것만 없애면 됐다.
나는 카트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서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비행기 티켓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이내 나왔다. 여자와 카트를 밀고 골목길을 내려갔다. 아내와 카트를 밀고 마트를 돌아다니던 때가 생각나 기분이 좋아졌다. 골목길 아래쪽에 있는 모텔을 지나 왼편으로 가자 공항이 나왔다. 공항 청사에서 일본 관광객들이 트렁크를 끌고 걸어 나왔다. 곤방와, 하고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일본 관광객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곤방와, 하고는 인사를 했다. 일본 관광객들을 지나 십 분을 가자 한강이 나왔다.
한강 다리에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연을 날리는 사람도 있었고 낚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들을 지나 한적한 곳으로 갔다. 카트의 뒤쪽 바퀴가 부서져 쇳소리를 냈다. 카트를 세워 놓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카트에 있는 종이비행기를 집어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강물 위로 떨어졌다. 점점 강물 위에는 종이비행기가 늘어났다. 종이비행기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지 못하고 물에 젖었다. 물에 젖자 종이비행기가 펴졌다. 눈이 내린 전신주에 앉아있는 까마귀들, 눈 속을 달리는 기차, 눈 속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 눈이 내리는 하코다테의 야경, 끝없이 자작나무가 펼쳐진 눈의 언덕 . . . 펴진 종이에서 북해도의 풍경이 생겨났다. 풍경과 풍경이 서로 겹쳐지면서 물살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다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비행기 티켓을 꺼내 날렸다.
-미쳤어요? 그건 내 북해도 비행기 티켓인데.
비행기 티켓은 공중으로 떠올랐지만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고 다리에 떨어졌다. 여자는 나를 밀치고 달려가 비행기 티켓을 주워 가슴속에 넣었다. 뒤로 다가가 여자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요.
여자가 몸을 돌려 나를 밀어냈다.
-가지 마라니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요? 세상에 사랑이 어딨어요? 남자들은 자고나면 날 떠나갔어요.
-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웃기지 말아요.
여자는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차고 뛰어갔다. 한 손으로 정강이를 잡고 한 손으로 카트를 밀며 뒤쫓아 갔다. 앞에서 오는 사람들이 시끄러운 쇳소리에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는 공항 청사로 들어갔다. 카트를 밀고 공항 청사로 뒤쫓아 갔다. 여자는 공항 청사를 한 바퀴 돌아 나갔다. 대각선으로 달려 여자를 뒤쫓아 나갔다. 여자는 횡단보도를 건너 달렸다. 나도 횡단보도를 건너 쫓아갔다. 앞에서 오는 사람들이 카트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여자는 모텔을 지나 골목길을 올라가서는 곧장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계단에 카트를 놓고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내가 비행기 티켓을 가져갈까봐 여자는 옷을 벗지 않고 잤다.
*
다음날 저녁 여자는 트렁크에 자신의 물건을 꾸려 넣었다. 나는 여자에게 꼬꼬뱅 요리를 해주기 위해 편의점에서 사온 생닭을 도마에 올려놓고 식칼로 잘랐다. 반토막 낸 닭을 다시 사등분해 냄비에 넣고 싸구려 와인을 부었다. 와인이 흘러내리면서 닭을 붉게 물들였다. 감자와 단호박을 썰어 넣어주고 골고루 뒤적여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닭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여자의 물건이 하나씩 빠지자 이빨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가 휑했다. 여자는 휑한 자리마다 종이비행기를 놓았다. 하지만 휑한 자리는 메워지지 않고 더 휑해 보였다. 나는 주방서랍에서 컵과 접시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냅킨도 꺼내 사이다와 함께 컵 옆에 놓았다. 그리고 와인에 익힌 닭고기를 접시에 담았다.
-날 위한 최후의 만찬인가요? 고마워요.
식탁에 접시를 놓자 여자가 말했다.
-근데 이건 무슨 요리에요?
-꼬꼬뱅이에요. 와인에 절인 닭. 아내가 좋아한 요리죠.
-아내가 있었어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앞집 남자와 바람이 나서 나를 버리고 떠난 아내가 있었어요. 그래서 혼자 이곳에 온 거죠. 어머니도 나를 버리고 떠났는데 아내도 나를 버리고 떠난 거죠. 여자들은 언제나 내 옆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났어요. 그리고 당신도 나를 떠나겠죠.
나는 사이다 뚜껑을 따서 여자의 잔에 따라주고 내 잔에도 따른 후 잔을 부딪쳤다. 한 모금 입에 대고 잔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뼈를 발라내며 꼬꼬뱅을 먹었다. 양념이 입술에 묻을 때에는 냅킨으로 살짝살짝 닦았다. 나는 꼬꼬뱅을 먹지 않고 사이다만 홀짝였다. 여자는 꼬꼬뱅을 다 먹고 나서 내 목을 끌어안았다.
-마지막으로 한번 해요.
나는 여자를 들어 안아 침대에 올려놓았다. 진하게 여자 냄새가 났다. 여자 냄새를 맡자 여자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가슴 속으로 손을 넣어 비행기 티켓을 찾았다. 비행기 티켓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팬티 속에도 비행기 티켓은 없었다. 팬티를 벗기고 여자의 몸을 뒤집어엎어 등짝을 살폈다. 등짝에도 비행기 티켓은 없었다. 대체 어디에 숨겼을까. 시트에 떨어졌나 살폈지만 종이 쪼가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여자는 내가 찾지 못하도록 비행기 티켓을 꼭꼭 숨겨둔 것이다. 나는 여자에게 다시 한 번 가지 말라고 말했다. 여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당신을 접을 거예요.
여자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날 접는다구요?
깔깔거리며 여자가 웃었다. 그때 노래방 건물 위로 북해도행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비행기 굉음에 묻혔다. 덜덜덜덜, 창문이 흔들렸고 덩달아 내 몸도 덜덜거렸다. 여자의 몸도 덜덜거렸다.
-이제는 나도 종이로 보이나요? 난 종이가 아니에요.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고 나는 배 위로 올라갔다.
-종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난 이 방에 있는 건 다 접었어요. 종이도 접었고 옷도 접었고 식물도 접었고. 심지어 쥐까지. 그러니 당신도 접을 수 있어요.
나는 왼손으로 여자의 허벅지를 누르고 오른손을 등짝 아래로 넣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씩 상체가 올라와 여자는 니은 자 모양이 됐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체위에요? 세상에 이런 체위도 있어요? 이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체위라고 말하고는 여자의 등짝을 세게 눌렀다. 활처럼 등짝이 굽히면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비어져 나왔다.
-이제 당신은 종이비행기가 될 거예요. 내가 당신을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날려 줄게요. 북해도까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발로 등짝을 밟았다. 뚜두두둑. 짧은 비명과 함께 상체가 고꾸라졌다. 반으로 접혀진 여자의 등짝은 하얀 종이 같았다. 여자의 팔을 안으로 접어 넣은 다음 다시 반을 접어 다리와 맞물려주었다. 종이비행기는 머리와 몸통 부분을 맞물려줘야 힘을 받아 견고해졌다. 맞물려준 부분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접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여자가 아니라 종이를 접는 것 같았다. 나는 날개를 만들기 위해 여자의 몸속에서 두 팔을 빼냈다. 팔이 나오면서 비행기 티켓이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제 비행기 티켓은 필요 없었다. 비행기 티켓을 주워 여자의 몸속에 넣고 같이 접었다. 종이비행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날개였다. 날개의 균형을 잡아줘야 무게중심이 맞았고 날렸을 때 손의 탄력을 받아 잘 날아갔다. 원하는 방향으로 날리려면 날개를 잘 접어야 했다. 여자의 팔을 꺾어 날개를 만들어주었다.
이제 침대에는 여자 대신 종이비행기가 놓여 있었다. 여자로 만든 종이비행기. 지금껏 내가 만든 종이비행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여자를 북해도로 날리기 위해 종이비행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종이비행기가 된 여자는 몸이 너무 가벼워져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종이비행기를 침대에 내려놓고 여자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여자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종이비행기를 끌어당겨 여자를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여자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종이비행기가 된 여자와는 할 수 없었다. 여자와 하려면 종이비행기가 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종이비행기가 되어서 바람을 타고 날아가 여자의 등짝에 올라타면 됐다.
나는 종이비행기가 된 여자를 바라보며 옷을 하나씩 벗었다. 팬티까지 벗고 나서 두 팔을 가슴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깨도 최대한 가슴 안으로 모아주고 여자를 접을 때와 똑같은 순서대로 나를 접었다. 다리까지 접고 난 후 몸속에서 두 팔을 빼내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폈다. 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바둥거려도 날개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바람은 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