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들의 춤

최수철

Photograph by Werner Bischof

그런저런 경험을 하고 나서, 몇 달쯤 전 어느 날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뒷산에 올랐다가 예기치 못한 경험을 했다. 덤불 속에 종이 한 장이 구겨진 채 떨어져 있는 걸 보고서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종이에 인쇄된 활자나 그림이 왠지 산에서 흔히 보는 홍보용 종잇장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굽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흙이 묻고 얼룩지고 가시에 찔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상 무인비행체를 발견 시 신고를 생활화합시다. 사진 촬영 가능 시 실제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포상: 부대장 표창 수여, 소정의 포상, 제 5708 부대장.’ 이러한 문구와 더불어, 파주 추락 무인기와 백령도 추락 무인기의 사진이 실려 있었고, 그 밑에는 신고 전화번호와 신고 요령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아찔했다. 4, 50년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도 비행기가 수시로 하늘 높이 떠서 삐라라고 부르는 전단을 뿌렸고, 아이들은 하늘에서 반짝이며 떨어지는 삐라를 줍기 위해 논밭으로 산으로 쫓아다니곤 했다. 그 전단으로 뭘 어쩌려는 게 아니었다. 그 사각형 종잇장들은 반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간첩 신고를 촉구하는 거친 활자들과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우리에는 단지 그것을 손에 넣는 행위가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 누구든 더 많이 얻는 아이가 승자였다. 전단을 주우려다가 나무 가시에 긁히거나 철조망에 찔려 피가 나는 일 정도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피가 몰리면서 다시금 우울증이 온몸을 오그라뜨리는 것을 느꼈다. 4, 50년 전에는 간첩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지금은 무인비행체라는 존재가, 그 실체도 모호한 존재들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과학의 발전만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동족 간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8년째 1위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한말의 혼란, 일제강점기, 국토의 분할, 동족상잔의 전쟁, 휴전, 군부독재, 그리고 여전히 휴전 상태, 지금도 휴전선 250킬로미터를 따라 몇 겹으로 경계를 갈라놓고 있는 철조망. 우리는 어쩌면 철조망이 둘러쳐진 수용소 안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정상적일 수 있겠는가. 너무 오래 지속된 긴장이 우리 마음의 근육 무력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에 들어 있었다. 거제도는 아우슈비츠와 달랐다. 아우슈비츠에서 포로들은 어느 날 불려 나가 목욕실로 끌려가서 가스 중독으로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거제도에서는 오늘 이 초라한 침상에서 잠들었다가 내일 온전히 깨어날 수 있을지 보장받을 수 없었다. 단지 잠깐 동안의 소강상태가 있을 뿐, 전쟁은 매순간 계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적은 우리 자신 속에 정체를 감춘 채 숨어들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저들을 죽여야 했다. 내가 저들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저들도 나를 죽여야 했다. 내가 저들의 적이었고, 내가 곧 나의 적이었다.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수용소의 죄수처럼 한 손에 전단을 들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왔다. 마치 나 자신이 남쪽이든 북쪽이든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어 철조망들 사이의 좁은 통로 속에 갇혀 있는 외로운 포로처럼 느껴졌다.

나는 막 전단을 버리려 하다가 뭔가 미련을 느끼고서 다시 펼쳐들고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나는 방금 무엇이 그 전단을 버리려는 것을 막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형편없이 훼손된 전단 위로 나는 한수영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서울을 떠나온 날 보았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날이 밝는 대로 짐을 꾸리기로 마음을 정하고서 거실로 나가 침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내는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비치는 여명을 받으며 세 명의 어린 여자들과 좁은 침대 위에 한데 엉겨 잠들어 있었다. 초여름이라 그들의 드러난 맨살이 부드러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중 아내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는 앳된 얼굴의 한 여자는 아랫배가 불룩했다. 그때 나는 어쩌면 고향을 돌아가지 않고 아내의 곁에 머무르며 저 여자들, 자기들도 어쩌지 못하여 고통 받는 저 어린 여자들을 위해 뭔가를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런데 어두운 산길을 홀로 서서 수영과 아내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린 순간, 나는 갑작스레 뭔가를 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수영과 아내가 내게 뭔가를 쓰도록 고무하고 종용하고 있었다. 사실 명색이 작가인 나는 분단으로 인해 수천만의 한국어 독자를 빼앗긴 가련한 소설가였다. 그렇다면 독자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만성적인 우울증에 걸려 쥐가 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뭔가를 써야 하는데,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비숍이 찍은 사진 속 장면,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포로들의 모습을 보고 또 보고 다시 들여다본 것도, 무엇을 써야 하는지 그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 장면을 수없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오랜 여행을 했다. 그 오랜 여행 끝에 다시 이 장면 앞으로 돌아온 지금,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이 순간 막막한 공포를 가면으로 간신히 억누르며 경쾌하게 몸을 놀리는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나는 사진의 안팎으로 넘나든다. 내가 포로가 되고, 또 비숍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아버지가 쓰고자 했던 소설, 한수영이 시작했던 그 소설을 계속해서 써나가기 위해, 이 사진 한 장이 내게 허락한 짧고 치명적인 꿈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11. 포로들의 춤

막사 밖에서는 군악대(정확히 말하면 포로 악단)의 군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포로들로 이루어진 악단이어서 음정과 화음이 자주 틀리지만, 소리만은 우렁차다. 나는 검은 휘장을 걷고 ‘가면들의 방’으로 들어간다. 지금 내 앞에는 작고 낮은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골판지와 얇은 천으로 만든 가면 수십 개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하나같이 모양이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만들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중 몇 개를 들춰보다가, 공기가 잘 통할 것처럼 보이는 것을 집어 든다. 처음에 가면은 찬바람을 막아주지만, 나중에는 입김이 맺혀서 차갑게 얼어붙기 때문이다.

나는 가면을 쓰고, 문 옆에 매달려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넥타이를 바로잡는다. 거울 속의 나는 지옥의 사자처럼 근엄하고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멍청한 도깨비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이제 춤출 준비가 끝났다. 나는 반대편 쪽문으로 나간다. 그곳에는 나처럼 가면을 쓴 자들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우리는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하고서 스스로 정렬을 하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오늘 우리는 모두 스무 명이다. 날은 흐린 편이지만, 다행히 바람은 거의 불지 않는다. 운동장 상공에는 만국기가 매달려 있다.

우리가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가서 둥글게 둘러서자 갑자기 음악이 멈춘다. 포로 악단이 이제는 우리를 위해 연주해줄 차례다. 곧 음악이 다시 시작된다. 미국 민요 「밀짚 속의 칠면조」다. 계속해서 「힝키 딩키 파리 부」 「오 수재너」 「캡틴 징크스」 「켄터키 옛집」이 연주될 것이다. 이 노래들은 이미 예전에 내가 하모니카로 능숙하게 불던 것들이다. 물론 언젠가 내가 남쪽의 한 섬에 갇혀서 이 노래들에 맞춰 미국 춤을 추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잠시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며 박자를 맞춘다. 어느새 내 앞에서 두 명의 남자가 서로 팔짱을 끼고 거침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키가 약간 작은 쪽이 몸이 날렵해서 춤 동작도 자연스럽고 민첩하다. 나는 저자가 누군지 모른다. 대충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함부로 추측하는 건 금물이다. 잘못 판단했다가는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우려가 있다. 때문에 춤추는 동안 우리 사이에 결코 대화가 오가지 않는다.

나는 황해도 해주에서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가 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함께 입대한 해주 출신 청년들과 보름 동안 훈련을 받은 후 전투에 투입되었다.

총 쏘는 데 남들보다 서툴렀던 나는 곧바로 철조망 돌파조에 소속되었다. 우리는 전방에 철조망이 나타나면 그 밑으로 막대탄을 밀어 넣어 폭파시키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우리 몸으로 철조망을 덮어야 했다. 우선 철조망에 담요를 걸친 뒤, 두터운 솜을 넣은 누비옷을 여러 겹 껴입은 우리가 그 위에 엎드리면 다른 병사들이 우리 등을 밟고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얼굴을 보호하는 게 특히 어려웠는데, 두꺼운 천으로 만든 보호대를 머리끝에서 목까지 뒤집어쓰고서 안면을 두 팔 안에 단단히 묻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철조망의 가시에 몸이 찔리는 게 다반사였지만, 다른 병사들의 심각한 부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나는 그 일을 영웅적으로 해냈다. 남들보다 키가 큰 편이라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곧 훈장을 받게 될 정도라고 여럿이 나를 추켜세울 정도였다.

그런데 철조망 돌파는 공격을 할 때뿐만 아니라 후퇴를 할 때도 필요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왜관 일대에 이르기까지 나는 매번 남쪽을 향해 엎드렸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에서 인민군 주력부대가 큰 타격을 입고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긴 후로는, 자주 북쪽을 향해 엎드려야 했다. 남쪽을 향할 때는 병사들이 나를 넘어간 후에 내 몸을 스스로 추스를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병사들이 퇴각한 후 나 혼자 남아 버둥거리며 그들 뒤를 따라야 했다. 게다가 비록 담요와 누비옷이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철조망을 넘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춘천 부근에서 철조망 위에 붙박인 채 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어찌나 많은 병사들이 나를 밟고 넘어갔는지, 사위가 조용해져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겨우 고개만 들어서 두리번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가슴과 팔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힌 나머지, 누비옷 속의 솜이 얇게 다져져서 철조망의 가시가 담요와 솜과 천을 꿰뚫고 살 속까지 파고든 모양이었다. 문득 이대로 있다가 들개라도 나타나서 발을 물어뜯으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주변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희끄무레한 달이 떠올랐을 때, 마침내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때 미군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철조망에 명태처럼 꿰인 내 모습을 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총구로 내 몸을 쿡쿡 찌르고 손전등으로 내 얼굴을 비췄다. 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울부짖는데, 그들은 허리를 접어가며 웃고 있었다.

나는 미군 의무대에서 한 달 이상 항생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철조망 가시에 찔려 생긴 상처들로 온몸이 퉁퉁 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심각한 감염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퇴원 후에 나는 여러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51년 3월 미해군 상륙함(LST, Landing Ship Tank)에 실려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내가 수감된 76지구는 특히 강력한 친공 캠프였다. 나는 아직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척 하며 최소한으로 말하고 최소한으로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멍하니 철조망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제야 사람이란 누구나 일단 철조망을 보고 나면 마음속에 우울증과 공포심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 끔찍한 것을 바라보며 내 끔찍한 현실을 간신히 버텨나갔다.

수용소 생활은 하루 종일 이념 교육, 정신 교육, 군사 교육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어린 나이에도 내 눈에는 그 모든 게 우스꽝스런 장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좁은 곳에 수백 명의 장정이 갇힌 상태에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난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른 모든 콤파운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교회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미국인 군목이 주말마다 찾아와 예배를 집전하고, 포로들 중에서 신앙 경력이 있는 독실한 신도가 교화 활동을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 경우에는 공산당 세력이 워낙 강해서 교회는 유명무실했고, 단시 수용소 당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문을 열어놓은 정도였다.

어느 날, 나는 교회 천막 앞을 지나다가 반쯤 벌어진 문틈으로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았다. 해주에서 살 때 마을 한쪽에 교회가 있어서 친구들 손에 이끌려 두 번 예배에 참석해본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교회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친숙하게 여겨질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교회 앞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천막 안은 그늘이 져서 약간 어두웠는데, 멍석을 깔아놓은 바닥에 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몇 발짝 다가가서 살펴보니, 미국인 군목이었다. 그가 텅 빈 예배당 안에 혼자 앉아 기도와 묵상을 하고 있었다.

목사는 그다음 주 일요일 오후에도 같은 시각에 교회를 찾았다. 나는 그가 경비 초소를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회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지난번에 혼자 외롭게 앉아 있던 그 미국인 목사의 모습이 내게 조금 안쓰럽게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목사를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서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환하게 웃더니 왼쪽으로 돌아앉으며 나를 맞은편에 앉게 했다.

그는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선교사 출신의 군목이어서 한국말이 능숙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다가 간간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연민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며 힘든 상황이라 어려움이 많겠다고 똑같은 말로 상대방을 위로했다. 헤어질 때 그는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가 내 뒤로 바짝 다가서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처단 대상 반동분자의 명단에 올랐으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더 낮춰서, 평소에 내가 당의 활동에 미온적으로 참여해서 눈엣가시였던 데다가, 어제 목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순간, 나는 머리에서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잘못하면 내게 귀띔을 해준 사람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게 친공이냐 반공이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몸 보전 잘해서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나는 내가 얼마나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절감했다. 속으로 나 자신에게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미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한번 결정을 내리면 얼마나 가차없이 실천에 옮기는지 나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포로 분류 심사가 시작된다는 소문에 수용소 안팎이 어수선해지면서 내게 다소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나는 일요일 오후를 기다렸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찌감치 교회 천막 안으로 숨어들었다. 목사는 나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내 표정이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버렸다. 나는 자초지종을 밝히고서, 오늘 밤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라고 말했다.

목사는 한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친공포로들에게 냉대를 당하기는 해도, 나를 도와주면 그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게 되는데, 그건 그리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 왼쪽 팔을 움켜쥐고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제 곧 해가 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와 함께 이곳을 나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소 경비병들이 순순히 문을 열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더 끌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목사가 요구하면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떨어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진 후, 목사가 먼저 천막을 나가서 철망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천막 뒤쪽의 터진 틈으로 빠져나와 철조망을 따라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그 뒤를 따라갔다. 저녁 식사 시간을 맞아 포로들은 취사 천막 앞에 몰려서 있었다. 목사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나는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바싹 붙어 섰다. 철조망 너머에 서 있던 두 병의 한국군 경비병이 나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물러서라고 소리쳤다. 목사가 그들에게, 특별한 용무가 있어 내가 데리고 나가는 것이니 문을 열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급 계급장을 단 경비병이, 상부의 허가가 없는 한 절대 포로를 내보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목사가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둘 중에서 선임으로 보이는 상병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목사가 계속해서 호통도 치고 달래기도 하는 동안, 망루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해 나를 향해 기관총의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망루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허공에 대고 쏘는 위협사격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상당수의 포로가 우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적의를 품고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나를 자기들 쪽으로 끌고 갈 기색이었다. 목사가 목소리를 높였고, 경비병들도 당황해 문에 바싹 붙어 섰고, 포로들은 점점 더 가까이 접근했고, 나는 뒷걸음질을 쳐서 철망문에 등을 붙였다. 두 번 더 위협사격이 있었다. 그들이 주춤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맨 앞에 서 있던 사내 셋이 주머니에서 뭔가 번쩍이는 것을 꺼내들며 불쑥 앞으로 나섰다. 문이 열렸고, 우리는 재빨리 열린 문으로 빠져나왔고, 문이 닫혔다. 이중 철조망을 모두 빠져 나왔을 때, 나는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한국군 헌병들이 나를 데려간 곳은 73지구였다. 번호가 7로 시작하니 그곳도 인민군 포로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76지구보다는 친공세력이 강하지 않아서, 친공과 반공 양측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제 나는 그곳에서 친공포로들이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대상이 되었다.

미군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에서 나를 호출한 것도 나의 그런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첩대 퀀셋 안의 한 방에서 머리카락이 붉은 젊은 미군 대위는 내게 자기들을 돕지 않겠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군 측에 ‘변절 작전Operation Turn Coat'이라는 게 있는데, 인민군 포로들을 차출해 대우를 잘 해준 뒤 전향시켜 간첩활동을 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포로들의 사망 신고서를 허위로 작성해 포로수용소 밖으로 빼돌린 뒤 북한이나 중국에 침투시킨다는 것이었다. 대위의 말대로 그렇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곧 죽을지도 모르지만, 민간인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대위는 붉은색 머리카락만큼이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협조하지 않는다면 76지구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통역을 하던, 옆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포로는 대위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어조를 그대로 흉내 냈다. 나는 그저 쓸쓸히 웃어 보였다.

73지구의 철망문을 지나 막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모든 게 막막하면서도 동시에 매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절박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공 진영에서 나를 자기들 편으로 가담시키려 했지만, 이번에도 나는 미온적인 반응으로 쓸쓸해 웃어보였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장 목사라고 불리는 평양 출신의 포로밖에 없었다. 대대로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장 목사는 신학교를 운영하는 미국 선교사 밑에서 목사 교육을 받던 중에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 정책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 따라서 그는 아직 목사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냥 장 목사라고 불렀다. 그는 내가 죽을 뻔했다가 군목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처음부터 내게 친근감을 표했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으나, 그가 믿고 있는 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너무도 멀었다.

모처럼 바람이 없이 햇살이 따뜻했던 어느 날, 거지들이 빨래한다는 날, 우리도 빨래를 해서 철조망 울타리에 널었다. 철조망에 어지럽게 걸려 있는 젖은 옷들은 거칠게 잘린 인간의 몸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철조망 너머에서 금발의 잘생긴 서양 청년이 우리 쪽으로 렌즈를 향하고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오히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노려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 마주 바라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멀어져갔다.

Photograph by Werner Bischof

이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장 목사에게 물었다. 장 목사가 대답했다. 글쎄, 우리 그냥 춤이나 출까요? 서로를 죽이는 것보다 함께 춤을 추는 게 보기도 좋잖아요. 내가 말했다. 좋군요. 그런데 무슨 춤을 출까요? 장 목사가 말했다. 우리가 한데 뒤섞여서 우리 춤을 덩실덩실 추며 미군들이 겁을 먹겠지요? 저들을 안심시키려면 모두가 함께 질서 있게 움직이는 춤을 추어야지요. 스퀘어댄스가 좋겠어요. 신학교에서 선교사들에게서 배웠어요. 소박하면서도 꽤 활동적인 춤이에요. 둘이 쌍을 이루어 빙글빙글 도는 게 기본동작인데, 미국 서부시대의 개척 정신을 표현한다더군요.

장 목사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서 내게 다가서더니 내 오른팔을 자기 팔에 끼고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바퀴도 돌지 못해서 우리는 발이 얽혀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운 채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쩌면 장 목사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것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춤을 추면서 우리는 이 지옥을 조금은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부터 장 목사는 포로들에게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포로들 대부분이 춤사위가 민망하다고 꽁무니를 뺐다. 그러나 장 목사와 내가 열심히 설득해서 춤을 배우는 사람들의 수를 차츰 늘려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반공포로였다. 그러나 그 속에 친공 진영의 프락치도 들어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반공이든 친공이든 자기편의 세포망을 확대하고 유용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반대편의 중요 인물을 제거하는데 춤이 이용되거나, 춤을 추는 도중에 우발적으로 충돌이 일어나서 칼부림이 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장 목사가 가면을 쓴다는 발상을 하게 된 것도 그 점을 우려해서였다. 그는 포로 공작소에 특별히 의뢰하여 가면 서른 개를 만들어 왔다. 가면들은 조잡하고 보기도 흉했지만, 모양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덧 포로들의 춤 솜씨도 훨씬 나아져서 대외적으로 선보 일 만했다. 이제 준비는 모두 갖춰졌다.

어느 날, 장 목사는 춤을 배운 50여 명의 포로를 한데 모았다. 그중에서 선착순으로 20명이 차출되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우선 우리는 옷에서 신분을 식별할 수 있는 모든 표지를 제거했다. 그 과정에서 포로 세 명은 다른 사람과 옷을 바꿔 입어야 했다. 그러고서 차례로 막사 뒤에 마련된 작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장 목사가 ‘가면들의 방’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우리는 각기 가면 하나를 골라 쓰고 밖으로 나왔다. 천막을 나올 때 가면을 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가서 둥글게 둘러서자 갑자기 음악이 멈춘다. 이제 포로 악단이 우리를 위해 연주해줄 차례다. 곧 음악이 다시 시작된다. 미국 민요 「밀짚 속의 칠면조」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목숨을 담보로 하여 긴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여행의 끝에서 지금 나는 가면을 쓰고 나의 파트너와 팔짱을 끼고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숨이 차다. 가면 안에 맺힌 수증기가 차갑게 식어서 얼굴이 시리다.

언젠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대해 들은 말이 기억난다. 그곳에서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그 음악은 대규모 사기극의 일환이라고 했다. 그 아름다운 가락은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들을 잠재우는 한편,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추고 있는 춤 역시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잠재우고, 다가오는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연극적인 기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저 경쾌한 가락이 악마의 트릴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팔과 팔로 연결되어 있는 이 남자는 결코 기만이 아니다. 그에게서 체온과 체취가 느껴진다. 이 냄새와 열기가 나와 그가 인간임을 일깨워준다. 이 절실한 느낌보다 더 진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순간, 나 자신도 추스를 수 없는 충동이 휩싸여 갑자기 그를 으스러지게 부둥켜안는다. 그가 깜짝 놀라 나를 밀어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더 힘껏 그를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몸에서 저항이 사라지더니 그 또한 나를 끌어안는다.

적대감을 가질 때 인간들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철조망이 된다.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생긴다. 그러나 그 철조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담요도 누비옷도 없이 맨몸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렇게 내 몸의 상처와 내 속의 피로 가시를 녹여버려야 한다.

우리는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발을 질질 끌며 천천히 돈다. 이 춤은 더 이상 스퀘어 댄스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놓아주고 탈춤 춤사위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우리가 가면을 벗었던가. 모르겠다. 악단이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가 이내 우리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던가. 그것도 모르겠다. 운동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우리와 함께 덩실덩실 추는 춤 속으로 어우러졌던가. 그것 역시 모르겠다. 그런데 이 춤은 언제 끝날 것인가. 아니,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춤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