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빛

1

도시의 서쪽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그늘이다.
숲속에 작은 호수가 있다.
거기 유일한 빛이 비치고 있어.



2

도시의 사람들이 숲을 향해 간다. 숲의 그늘 아래 자신의 그림자를 숨긴다. 누구도 찾아내지 못하도록 차분히 겹쳐내고 지워져 형체를 잃어버린 채로 숲을 거닌다. 숲에는 아직 제대로 된 길이 없다. 입구나 출구도 없고 막다른 길 또한 없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구든 길을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자꾸만 같은 곳을 돌고 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면 매번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길게 자라난 잡풀과 크고 작은 바위가 도처에 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뿌리내린 나무가 높게 솟아 있다. 가끔 짐승들의 사체나 분뇨가 방치되어 있다. 그런다고 한들 살아 움직이는 짐승을 목격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아주 희박한 확률로 사람들이 마주친다. 숲의 그늘을 가로지르며 가까워지고 있다. 도시에서는 익숙했던 일이 숲에서는 낯선 일이 되기에 그런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입술을 굳게 다문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아서 서로의 정체를 모른다. 모두가 동일한 곳을 떠나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된다. 각기 다른 언어가 각자의 모국어가 되어서 짧은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자연스레 서로를 비켜간다. 어깨나 팔을 비롯한 신체의 어느 부위도 닿지 않는다. 어깨가 일직선에 놓이고 거기서 한 걸음만 나아가면 다시, 혼자가 된다.

창백한 얼굴을 한 연인이 있다. 성한 잡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있으므로 두 사람의 나체가 가리어져 있다. 멀리서는 간신히 머리만 보이기에 체고가 작은 한 쌍의 어린아이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손질되지 않고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에 얼굴이 반쯤 덮인 채 나란히 어깨를 맞댄 연인은 꽤나 다정하다. 손을 나누어 잡고 최소한의 체온을 나누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연인은 언제나 거기 있다.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로든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거기 연인이 있는 걸 모르고 사람들이 지나간다. 해가 저물고 있으므로 모두 동쪽을 향해 간다. 서쪽으로 나아가면 숲은 하염없이 깊어지고 동쪽으로 나아가면 어김없이 도시로 회귀한다. 동일한 방향으로 그림자가 고요히 따라붙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걸음을 서두른다. 자칫하다간 숲에 남겨질지도 모르기에 간절해진다. 그런 마음으로 도착한 도시의 어디에나 길이나 있다. 길이 있기에 입구와 출구가 있으며 막다른 길 또한 있다. 모든 길이 지도에 빠짐없이 표기되어 있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길을 찾을 수 있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아이를 찾을 수도 있다. 그래서 뭐가 됐든지 감추거나 숨길 수 없다. 단 한 번도 길을 헤매지 않고 집에 도착한 그들이 문을 두드린다. 도시의 모든 문이 일제히 열리고 차례로 닫힌다.



3

모두가 떠난 숲에 바람이 분다. 바람의 방향으로 숲이 기울어진다. 어디선가 은신하고 있던 작고 검은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간다. 영영 숲을 떠날 것처럼 세차게 허공을 가로지른다. 숲으로 날아드는 새들은 수시로 떠나야만 하기에 둥지를 틀지 않는다. 그래서 숲에는 버려진 둥지 하나 없다. 바람은 자꾸만 숲을 쓸어내고 새를 몰아낸다. 깊고 낮은 곳까지 잊지 않고 불어 들어서 숲의 서쪽으로 바람이 모인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일궈낸 소리 또한 모여 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숲의 끝이기에 나무에 매달린 잎이 서로 스치고 흔들리는 소리가 주위에 만연하다. 거기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홀로 서 있다. 버려진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낮고 빠른 말을 중얼대고 있다. 여태 살면서 했던 모든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내는 말을 멈추지 않고 바람이 멎는다. 아주 오래전 숲을 떠났던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온다. 마치 숲이 생의 종착지인 것처럼 몸을 숨기고 슬프게 운다. 숲은 새들을 은폐하고서 곧게 서 있다.



4

도시의 동쪽은 푸른 새벽이다. 누구나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이불을 나누어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생시와는 정반대의 꿈을 연달아 꾸고 있다. 꿈에서 죽은 나무에 열매가 열리고 절벽 아래로 끝없이 떨어진다. 선로를 이탈한 열차가 숲을 지나가고 그 뒤로 발 없는 아이들이 맘껏 달려 다닌다. 굴뚝에 올라 사다리를 자르던 부모들은 그걸 보며 무음의 박수를 친다. 그러니 누구든 쉽게 잠에서 깨어날 리 없다.


거실 창가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작은 몸집이 소파에 다 가려져 보이는 거라곤 바깥으로 나와 있는 팔과 다리가 전부다. 고개를 뒤로 꺾고 소파에 반쯤 누워 축 늘어진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그 상태로 슬며시 눈을 뜬 여자가 천장을 빤히 응시한다. 여자는 며칠째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다. 하루의 피로가 한순간에 몸을 덮치고 혼곤한 잠으로 끌고 들어가기에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없다. 그저 매일 낯설고 두려운 기분에 사로잡혀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여자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벽면에 스위치를 켠다.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형광등 불빛이 전방을 비춘다. 잠시 눈을 찡그리다 발치에 떨어져 있는 하얀 손수건을 발견하고 협탁에 잘 개어둔다. 몸을 일으킨 여자가 굳게 닫힌 방문 앞으로 걸어간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가만히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방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방 한가운데 나무로 된 요람이 놓여 있다. 울타리 모양의 난간에 달아놓은 인형 모빌이 공중에 얌전히 멈춰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여자가 손수 만든 모빌이다. 자세히 보면 인형의 얼굴이 조금씩 틀어져 있다. 눈과 입술의 크기나 모양이 비대칭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인형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손으로 툭 건드리면 모빌이 돌아가며 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퍼뜨린다. 모빌은 언제나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모빌을 만든 여자도 그 사실을 모른다.


일어날 시간이야.


여자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요람 안을 들여다본다. 아이의 몸에 이불이 잘 덮여 있다. 손과 발을 비롯한 신체의 어느 곳도 보이지 않아 체고를 가늠할 수 없다. 일어날 시간이야. 한참을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몸을 일으킨다.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간다. 그 순간 열린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들다 사라진다. 여자가 방문을 닫고 나가서 방은 다시 어둠에 잠긴다. 흔들리던 인형 모빌이 아무도 모르게 멈추고 나무로 된 요람은 여전히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5

호수가 얼고 있다.
그걸 바라보던 연인의 입이 동시에 벌어진다.


당신 말대로 가장자리부터 단단해지고 있어.



6

동이 트지 않은 도시는 어둡다. 차가운 바람만이 거리를 쓸고 지나간다. 바람은 낙엽을 옮기고 골목에 쌓인 재를 날려 보낸다. 창문을 흔들고 집마다 걸린 붉은 깃발을 펄럭인다. 바람이 만들어낸 기척에 누군가 잠에서 깨어난다.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사방이 어둡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둡기만 하다. 돌아왔던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고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든다. 잠시 중단되었던 꿈을 곧바로 이어서 꾼다. 그 꿈을 몇 번째 반복해서 꾸고 있는지 모른다. 누구나 자신을 꿈속에 가두고 새벽을 보낸다.


거실에서 여자가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창문에는 제대로 된 커튼 한 장 달려 있지 않다. 언젠가 커튼 끝자락에 불이 붙어 절반 이상이 다 타버린 뒤로 지금껏 커튼을 달지 않고 있다.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여자가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창문이 흔들리면서 여자의 모습이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바람이 멎지 않아서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여자는 주방의 수납장을 열어 냄비를 꺼낸다. 수프를 끓이면 열흘은 꼬박 먹을 수 있을 만큼 크고 깊은 냄비에 물을 가득 받아 약한 불에 데운다. 냄비에 담긴 물의 양에 비해 불이 너무 약해서 한참이 지나도 물은 끓어오르지 않는다. 불을 살짝 키우고 여자는 최근에 아이를 씻겼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그건 너무 오래되었다.

언제부턴가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아 여자는 아이의 목욕물을 손수 데워야 한다. 처음엔 미지근한 물이라도 나왔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지금은 그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만 쏟아져 나올 뿐이다. 번거롭지만 아이를 씻기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기에 여자는 오늘도 목욕물을 데운다. 여전히 물은 끓어오를 기미가 없고 가스 불만 고요히 타오르고 있다.


동이 트고 나서야
아이를 씻길 수 있겠지.


여자는 창 너머를 바라본다. 유독 차갑고 건조해 보이는 대기가 바깥에 있다. 창문으로 내다보는 게 전부이기에 여자는 바깥의 날씨가 얼마나 추워졌는지 모른다. 멀리 보이는 나무의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가 앙상해지는 걸 바라보며 한 계절이 지나고 또 다른 계절이 오는 걸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도시의 겨울은 유독 춥고 눈이 자주 내린다. 한번 쌓인 눈은 잘 녹지 않아서 어디든지 하얀 풍경이 펼쳐진다. 길이 지워져서 가끔 누군가 길을 잃기도 한다. 눈이 녹고 겨울이 지나도 돌아오는 법이 없다.

일인용 소파에 앉은 여자의 눈이 감긴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협탁에 걸치고 있던 팔이 손수건과 함께 아래로 떨어진다. 손수건이 발치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여자는 잠에 들어간다. 그 순간 수면 위로 수증기가 한 가닥 피어오르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넘친 물이 냄비를 타고 흘러내리고 주방 한구석에 뿌연 수증기가 점점 더 몸집을 부풀리며 솟아오른다. 거실 창문 밑부분에 작게 김이 서린다. 그러자 예전에 아이가 찍어놓은 손자국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방에 잠들어 있는 아이의 손과 얼추 비슷한 크기이다. 아이는 뭐든 손으로 만져보곤 했으니 집에는 이런 손자국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옆에 나란히 손자국이 하나 더 찍혀 있다. 아이의 것보다 분명 더 크고 흐릿하게 남아 있다. 두 손자국은 가까이 붙어 있지만 어디 하나 겹치지 않는다. 그저 가끔 동시에 떠오를 뿐이다.



7

숲에서 새가 길게 운다. 숲에 사는 새들은 나무에 몸을 숨기고 우는 게 전부다. 하늘을 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울기만 한다. 그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는 듯 울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살아서 서로의 비명을 듣는다.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그건 유일한 안부가 된다.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언제나처럼 낮고 빠르게 말한다.


들어가도 됩니까.
들어가면 안 됩니까.


사내의 말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어떤 말들은 새들이 물어간다.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멀리 물고 가버려서 숲에는 없는 말이 된다. 하물며 말을 물고 떠나간 새는 돌아오는 법이 없다.



8

도시의 동쪽에 동이 튼다. 눈부신 빛이 거리를 고요히 비춘다. 지붕에 굴뚝이 달린 집들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서로의 간격이 너무나 좁아서 겹치고 뭉개지고 부서진 채로 거리에 떠올라 있다. 도시의 창문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누군가 떠나 비워진 집이라 하더라도 빛은 전과 같은 자리를 비춘다. 집 안에 누워 잠이 들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환하게 빛이 떠오른다. 몸에 덮인 이불을 걷으며 하나둘 잠에서 깨어난다. 간밤에 꾼 꿈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더 잊혀갈 뿐이다. 매일 어떤 기억을 잃은 채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의 기본이 되는 슬픔이 있다. 슬픔의 크기는 각자 달라서 서로 다른 하루를 흘려보낸다.

여자의 집 안은 어느새 연기로 가득하다. 빛은 연기를 통과하지 못하고 창가에 머물러 연기의 겉면만을 비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기에도 결이 있고 모양이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도 분명 그런 것이 있다. 연기는 허공을 가르고 엇갈리고 풀어지며 집 안을 잠식한다. 그 순간 여자가 눈을 뜬다. 작게 벌어진 입으로 연기가 흘러들어가고 있다. 몇 차례 잔기침을 하며 손으로 협탁 위를 더듬어보지만 여자의 손에 손수건은 잡히지 않는다. 손수건은 전과 같은 자리에 떨어져 있다. 협탁에 잘 개어놓았던 손수건이 어째서 거기 떨어져 있는지 여자로선 도무지 알 수 없다. 여자는 일인용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걸어간다. 창문과 가까워질수록 바깥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인다.


동이 트고 말았어.
오늘은 아이를 씻겨야 하는데.
지저분한 아이로 자라게 할 수 없지.


여자가 유리창에 손을 가져다 대자 아이의 손자국이 가려진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온기가 느껴진다.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이 손바닥 위로 넓게 번져 있다. 힘을 주어 창문을 밀어보지만 여자의 손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창문에 새겨져 있던 손자국들이 모두 지워져가고 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려서 거기 손자국이 새겨져 있던 걸 아무도 모르게 된다. 창문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는다. 여자가 손을 떼자 투명한 물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릴 뿐이다.

여자는 이내 창문 여는 걸 포기하고 주방으로 향한다. 냄비에 차 있던 물은 어느새 절반가량 줄어들어 있다. 불을 껐지만 아직도 연기가 냄비 밖으로 흘러나오고 희미하게 탄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곧장 현관으로 가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러자 집 안에 고여 있던 연기가 조금씩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여자는 벽에 기대앉아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쉰다. 땀이 배어 나온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침착하게 주변을 살핀다. 현관은 오랫동안 쓸고 닦지 않아서 묵은 먼지가 가득하다. 거기 낡은 신발 한 켤레가 흐트러져 있다.

문득 연기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현관문 앞에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자그만 몸집 때문인지 언뜻 보면 여자와 같은 사람처럼 보인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관 센서등이 켜지고 낯익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문을 열어주었구나.
앞으로는 문을 두드리면 열어라.


여자의 어머니가 집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현관문이 저절로 닫히면서 고요하고 적막한 집 안에 신호탄 같은 소리가 비명처럼 짧게 울리고 사라진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센서등이 꺼진다. 여자는 여전히 차가운 현관에 맨발로 서 있다.



9

집 안의 모든 풍경이 희미하다. 안개가 깔린 듯 어디든 고르고 공평하게 희미해져 있다. 현관문을 잠시 열어두어서 전보다 많은 양의 연기가 걷혔지만 아직 말끔히 가시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바깥은 더욱 맑고 쾌청해 보인다. 창문에는 여자의 손자국이 찍혀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남아 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창문 위로 떠오른 손자국을 누군가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다 한들 아이의 손자국은 지워지고 어디에도 없다.

여자의 어머니가 말없이 서서 거실을 둘러본다. 협탁을 쓸어보기도 하고 위에 놓인 조명등을 켜고 끄기도 한다. 벽에 걸린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하고 몰래 만져보기도 한다. 집은 너무나 단출해서 딱히 구경할 만한 게 없음에도 뭐든 보고 만지며 거실을 돌아다닌다. 여자가 멀리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여자의 집에 방문하는 날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라도 한 것처럼 거실 풍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다. 그러다 문득 방문 앞에 선 어머니를 보고 여자가 속삭이듯 말한다.


어머니, 거긴 아이가 잠들어 있어요.
너무나 작고 어린 아이가요.

그러냐. 정말 네 말대로 아이가 있느냐.


여자의 어머니가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 거실로 돌아온다. 여자는 그제야 손에 쥔 손수건을 발견하고 허공에 펼쳐본다. 여태 손에 쥐고 있었던 터라 여기저기 구김이 가 있다. 여자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마개를 막고 물을 튼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얼룩들이 가득한 손수건을 비누로 거품을 내 몇 차례 치대고 헹군다. 마개를 열자 탁해진 물이 밑으로 빨려 내려간다. 마개 주변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고 사라진다. 꽉 짜낸 손수건을 잘 펴서 널어놓는 여자의 손끝이 붉게 물들어 있다.

주방은 전과 같은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방금까지 연기를 토해내던 냄비가 얌전히 놓여 있다. 냄비에 담긴 물은 여전히 뜨겁다. 불을 끈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도 식지 않았다. 물을 반쯤 더 채우고 목욕물을 다시 데울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냄비의 물이 식어가는 걸 여자가 곁에 서서 바라본다.



10

얼어붙은 호수 위를 내가 걸어간다.

조금도 가까워질 수 없는 마음으로
당신과 멀어지고 있어.



11

한낮의 햇빛이 집 안을 고요히 비춘다. 거실에 놓인 사물마다 그림자가 진다. 여자의 어머니를 본뜬 그림자가 거실 벽에 그림처럼 떠오른다. 몸은 일인용 소파에 가려 있으니 보이는 건 산발한 머리가 전부다. 햇빛은 딱 거실까지만 비춘다. 그늘진 주방에서 여자가 찻잔을 골라낸다. 찻잔은 대개 상태가 좋지 못하다. 대부분 이가 나가 있거나 금이 가 있다. 아예 깨져버린 것도 있다. 그나마 온전한 건 오직 한 세트뿐이다. 아무래도 집에 손님이 찾아온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하얀 찻잔과 받침을 꺼낸다. 혹시나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품을 내 씻는다. 물기가 빠지도록 선반에 뒤집어놓고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찻잎이 담긴 투명한 유리병을 꺼낸 여자는 한참을 돌려가며 겉면을 살핀다. 언젠가 유리병 겉면에 차의 종류와 이름을 적어두었지만 이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져 있다. 이름 모를 찻잎을 주전자 안으로 떨어뜨리고 여자는 뚜껑을 덮는다. 약한 불에 잘 우려진 차는 은은한 붉은빛을 띤다. 여자는 쟁반을 꺼내 차를 내어 간다. 협탁 위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두자 여자의 어머니가 가만히 입을 열어 중얼거린다.


얘야, 잠든 아이는 깨우지 마라.
혹시나 깨어나거든 그 애 이름을 지어줘라.
돌아오지 않으면 자주 불러주면 된다.
그러면 좀 나아진다.


여자는 아무런 말 없이 찻잔을 내려다본다. 손에 들린 쟁반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자신이 쟁반을 들고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손에는 전혀 힘 이 없다. 결국 바닥에 떨어진 쟁반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적막을 깬다. 찻잔에 담긴 차가 미세하게 일렁인다. 여자의 어머니는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하고 고른 숨을 내쉰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깊이 잠들어간다. 여자는 자신과 같은 모습과 얼굴을 하고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잠든 어머니를 골똘히 바라본다. 매일같이 일인용 소파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여자는 다른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여자는 마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여자는 아주 오래도록 곁에 서 있다.

하얀 찻잔에서 하염없이 김이 피어오른다. 향긋한 향기를 품고 둘 사이를 희미하게 가른다. 수면에 떠오른 찻잎이 하나둘 찻잔 아래로 가라앉고 손도 대지 않은 차가 식어간다. 여자는 벽에 기대어 앉아 어머니가 깨어나길 기다린다. 이대로 하루가 다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씩 하기도 한다. 여자는 두 다리를 끌어안고 거기 얼굴을 깊게 파묻는다. 그러자 여자의 몸이 어머니의 그림자에 교묘하게 가려진다. 거실 벽 한구석에 갇힌 여자는 모르고 있다. 여자의 어머니가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 리가 없다.



12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간다. 거실을 비추던 빛이 일체 사라진다. 어두워진 거실에서 여자의 어머니가 천천히 일어난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 몸을 웅크린 여자를 바라본다. 걸음을 쉽게 뗄 수 없는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여자의 어머니는 멀리 보이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본 적이 없다. 매번 방문이 닫혀 있으니 방 안을 본 적도 없고. 아이를 보거나 목소리나 울음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아이는 여태 깨지 않고 깊은 잠이 들어 있다. 몸 위로 얇은 이불이 덮여 있을 뿐이다.

거실에 빛이 들기 전에 여자의 어머니가 집을 나선다. 어디로 향해 가는지는 모른다. 어디로든 나아가기도 전에 현관문이 닫혀버렸으니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여자의 어머니는 다시 현관문을 마주하고 설지도 모른다. 문을 일절 두드리지 않고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번 그런 방식으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걸지라도 여자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관엔 그저 낡은 신발 한 켤레가 흐트러져 있을 뿐이다.



13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숲은 멈춰 있다. 작은 몸을 숨기고 있던 새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무성한 잡풀 사이로 새가 날개를 접고 떨고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숨이 끊어지고 순간 또 다른 새가 숲의 저편에서 떨어진다. 추락하는 새들은 울지 않는다. 그저 같은 방식으로 숨을 끊어내고 있을 뿐이다. 새들의 작은 기척이 숲에 만연하다.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좀더 작고 빠르게 속삭인다. 사내 앞에는 죽은 나무가 서 있다. 뿌리를 다 드러낸 채 썩어가고 있다.


들어가도 됩니까.
들어가면 안 됩니까.
죽어도 들어가면 안 됩니까.

그럼…… 나가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내의 말이 숲에 갇혀 있다. 새들은 더 이상 말을 물어가지 않고 죽는다. 죽어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새의 몸 위로 말들이 덮이고 무덤처럼 쌓인다. 잡풀 사이로 검게 솟아나 있는 사내가 여전히 거기 있다.



14

집 안을 비추던 햇빛이 점차 물러간다. 창가에 작은 얼룩처럼 애타게 매달린다. 결국 손을 놓고 추락하게 되겠지만 최선을 다한다. 찰나에 햇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집 안은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진다. 벽에 기대 잠들어 있던 여자가 가만히 고개를 든다. 일인용 소파를 바라보다 눈앞에 찻잔을 집어 든다. 차갑게 식은 차에서 더는 향이 나지 않는다. 여자는 쟁반에 찻잔을 올리고 주방으로 간다. 찻잔에 담긴 차를 그대로 쏟아붓자 찻잎이 싱크대 위에 찌꺼기처럼 남는다. 냄비 안에 담긴 물도 어느샌가 차갑게 식어 있다. 한 번도 끓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조금의 온기도 없다. 냄비 밑부분이 넓게 그을려 있을 뿐이다. 여자가 냄비를 기울여 물을 버리자 찻잎이 모두 한데 쓸려 내려간다.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던 여자가 문득 뒤편에 걸린 손수건을 바라본다. 젖은 손수건 끝자락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다.

방은 여전히 어둡다. 언제나 방문이 닫혀 있고 빛이 가로막혀 있다. 창문이 있지만 몸집이 큰 가구에 가려져 있고 천장에는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매달려 있다. 아무리 스위치를 켜고 꺼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누구도 스위치를 켜거나 가구를 치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방은 어둠에 잠긴 채 기약도 없이 아주 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방문을 열고 여자가 들어간다. 방문을 닫는 걸 잊어서 방 안으로 거실의 빛이 새어 들어간다. 유일한 빛이 요람을 고스란히 비춘다. 여자는 서랍을 열어 켜켜이 쌓인 이불 한 장을 꺼낸다. 아이의 몸에 덮인 이불을 천천히 걷어내고 새 이불을 덮는다. 하얀 이불에 아이의 작은 몸이 잘 가리어진다.


오늘도 아이를 씻기지 못했으니까
어떤 이름도 지어줄 수 없겠지.


여자는 아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매만진다. 이불 끝자락에 작게 자수가 놓여 있다. 그걸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빤히 들여다보다 여자는 이내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어깨가 떨리고 몸이 작게 들썩인다. 숨을 죽이고 흐느끼며 마른 손으로 요람을 부여잡고 흔든다. 난간에 설치된 모빌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낸다. 아이는 인형을 향해 손을 뻗거나 박수를 치지 않는다. 허공을 향해 발을 쳐들지도 팔을 휘저으며 웃지도 않는다. 그저 얌전히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을 뿐이다. 여자는 여전히 방 안에 있고 방문이 저절로 닫힌다.

도시의 동쪽은 밤이 된다. 각자의 일과를 마친 이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온다. 집을 향해 가는 그림자가 거리를 가득 채운다. 오늘따라 유독 검고 짙은 그림자를 짓밟고 뭉개고 뛰어넘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일제히 집에 도착한다. 아침에 걷어낸 모습 그대로 이불이 놓여 있다. 거기 도로 들어가 누워 눈을 감는다. 모두가 잠이 들고 꿈을 꾸기 직전이다. 도시의 모든 불빛이 동시에 꺼진다.



15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춤을 춘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멈추지 않는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한 당신이 멀리서 비명만 지르고 있어.
순간 단 하나의 금이 호수를 길게 가른다.



16

숲은 언제나 도시의 서쪽에 있다. 나침반 없이도 해가 저무는 방향을 따라 숲에 도착할 수 있다. 도시의 사람들은 언제나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숲을 향해 간다. 숲의 그늘 아래 각자의 그림자를 숨긴다. 도시에는 없는 자유를 만끽하며 숲을 거닌다. 그러다 보면 누구나 호수를 발견한다. 호숫가에는 버려진 낚싯대나 간이 의자 하나 없다. 종이 돛단배나 작은 오두막집 하나 없고, 누군가 호수에 다녀가거나 머무른 흔적이 전혀 없다.

호수의 수면이 빛을 머금고 눈부시게 빛난다. 나뭇잎 하나가 수면 위를 유유히 떠다니다가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걸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식을 내지른다. 한번 가라앉은 것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기에 호수에 어떤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나무 그늘 아래 발을 붙이고 서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빛이 있고 호수가 펼쳐지지만 멀리서 바라보다 걸음을 돌릴 뿐이다. 돌 하나 던지지 않고 모두 떠나가버려서 수면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다. 수면 위로 비친 모든 풍경이 정지해 있다.

호숫가에 한 연인이 있다. 다리를 모으고 잡풀 사이에 나체의 몸을 가린 채 앉아 있다. 정면에 너무나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져 있고 그걸 차분히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발치에 수면이 있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떠 있다.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고 고요히 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구름이 해를 가려서 호수에 유일한 빛이 사라지고 없다. 연인은 호수를 끼고 시계 방향으로 돈다. 그들의 오른편엔 언제나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본다. 왼편에 선 남자는 오른편에 선 여자의 뒷모습만을 본다. 오른편에 선 여자는 왼편에 선 남자의 얼굴을 잊었다. 손을 잡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떠나고 있다. 그들은 호수를 떠나지 못해서 남겨져 있다. 시간이 흘러 구름이 걷히고 호숫가에 서서히 빛이 들어찬다. 처음과 같은 양의 빛이 호수를 비추고 있다. 어느새 연인은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빛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17

숲에 바람이 불고 그친다. 숲으로 날아들던 작고 검은 새들이 더는 없다. 곳곳에 만연하던 새의 울음소리 또한 없다. 숲에 숨어 살던 새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죽는다.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해 바위에 곤두박질친다. 온몸이 부서진 채로 무성한 잡풀 사이에 누워 차갑게 굳어간다. 다시는 날지 못하리란 걸 아는 것처럼 날개가 가지런히 접혀 있다. 새들은 죽는 순간까지 서로를 보지 못한다. 단지 몸을 숨기고 각자 죽어갈 뿐이다.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얼핏 보면 숲의 유일한 그림자가 형체를 갖고 솟아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 그림자의 발치에서 최후의 새가 숨을 끊어내고 그 순간 사내가 숨을 멈추고 입술을 굳게 다문다. 나약한 입김이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검은 모포가 풀썩 주저앉으며 잿빛 먼지가 사방에 날린다. 바람이 멎어버린 숲의 새벽을 고요히 부양한다.